영화평론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영화평론상, 신춘문예, 예술지망생

14면 상단 이종완(삽화 김아름) 2
 

올해 열린 제18회 씨네21 영화 평론상은 최우수상 없이 우수상만 있었다. 2013년 초에 열린 17회 씨네21 영화 평론상은 아예 ‘수상작 없음’이었다. 이미 2012년 제16회 영화 평론상 때부터 이와 같은 조짐이 보였고, 그때에도 최우수작을 제외하고, 우수작만 뽑혔다. 남다은 평론가의 평은 다음과 같다.

 

“본심에 오른 11명의 글 중 예상했던 국내외 작가 감독들이나 문제작들에 대한 비평보다는 비평의 제재로 삼기에 다소 의아해 보이는 영화들에 관심이 갔다. […] 비평의 대상이 될 영화를 선택하는 안목과 직감, 의제를 설정하는 모험심이 평론가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자질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시간이었다.”

 

남다은의 지적에서 흥미로운 점은 모험심 있는 도전적인 글들을 기다리면서, 비평의 제재를 ‘작가 감독들이나 문제작’과 같은 특정 작품으로 한정 짓는 것이다. 그녀의 심사평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2013년 하반기에 다시 열린 씨네21 영화 평론상은 제재(題材)가 될 작품을 <홀리 모터스>, <화이>, <베를린> 외 4편으로 미리 정해놨다. 이쯤 되면 그들이 도전적이라고 생각하는 글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그녀의 말처럼 역대 씨네21 영화 평론상에서는 작가 감독이나 문제작에 대한 비평이 많았다. 특히, 홍상수, 김기덕, 다르덴 형제, 라스 폰 트리에 같은 감독들의 작가 이론이 수상작 대다수였다. 작가 이론은 프랑스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주요 편집 정책이었다. 이들은 상업영화 감독으로만 간주되던 알프레드 히치콕, 존 포드 같은 감독을 ‘작가’라고 호칭했다. 이는 때때로 작가 숭배로까지 이어지는데, 숨어 있는 작가나 작품canon을 발굴하는 것이 간혹 시네필에게 요구되는 능력마냥 여겨지게된 것이다.

 

일부 씨네필은 일본의 오타쿠를 닮아있다. 비평가 아즈마 히로키의 말처럼 오타쿠들은 데이터베이스를 소비한다. 오타쿠나 씨네필에게 텍스트란 많이 축적해서 스노비즘[학식을 공개적으로 자랑하는 기질]적으로 소비해야 할 가상의 아카이브다. 오타쿠들에게 정전canon의 기준은 설정이 완벽하게 채워지고(well-made), 설정을 상업적으로 소비하기 좋은 작품이다. 작품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는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텍스트 읽기는 결국 예술을 위한 예술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영화평론을 쓴다고 해서 반드시 들뢰즈와 라캉을 끌어올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무수한 인용과 각주, 그리고 끌어들인 텍스트의 양이 좋은 글의 가치인 것은 아니다. 글쓰기란 자신의 경험과 독서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질문의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유운성 평론가는 비평에 대해서, “자기의 기호(嗜好)로 읽었던 책과 기호(嗜好)로 봤던 영화를 무리하지만, 성공적으로 엮는 것,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연관을 믿게끔 하는 게 비평”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글쓰기는 쓰면서 질문하고, 답변을 찾는 ‘과정’에 있다. 안 어울리는 텍스트끼리, 혹은 영화와 문학, 영화와 음악과 같이 다른 매체끼리, 심지어 사적인 기억까지 글쓰기의 중요한 제재가 될 수 있다. 텍스트와 매체를 넘나드는 ‘모험’이 전제되어야, 예술은 비로소 예술을 억압하는 낡은 교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백남준은 마르크스주의자였고, 동시에 작곡자이자 피아니스트였다. 아도르노는 쇤베르크의 작곡자 집단에 가입하여, 쇤베르크의 음악에 심취했다. 그들은 철학자였고, 동시에 장르를 넘나드는 모험가였다.

 

수많은 신춘문예는 도전적인 글들을 모집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그들이 원하는 글들은 대문자의 역사나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는 글들이다. 좋은 문장과 진행력, 빈틈없는 논리, 그리고 어느 정도 개성적pseudo-individuality이면 그들은 좋은 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술은 그 담론의 무서운 힘이나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어야 한다. 예술의 무시무시한 잠재성은 신춘문예라는 경쟁에서 단순히 포획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거만하게 예술가 지망생들에게 독창적 의제를 끌어내는 데 부족하다는 둥, 응모작의 수준이 기대 이하라는 둥 폭언을 서슴지 않는다. 그럼에도… 예술가 지망생들에게는 글을 쓸 지면이 필요하다.

 

«슈퍼스타 K»가 나온 지 벌써 6년 차인데,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TV의 오디션 프로그램과 같은 자기계발의 서사다. 아주 뒤늦게 «아트 스타 코리아» 같은 현대 예술을 소재로 한 오디션 프로그램도 나오지 않았는가? «아트 스타 코리아» 1화에서 차지량이 오디션에 반대한다고 외치며, 자신을 떨어뜨려 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심사의원들은 이를 훌륭한 행위예술로 받아들인다. 그는 심사평에 당연하게 순응하고, 이후의 경연에도 성실하게 참여한다. 촌극으로 끝나버린 그 행위예술이 슬프게도 «아트 스타 코리아»에서 제일 재미있는 장면이다. 예술은 불가피하더라도 이 배틀로얄에서 그나마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너 외롭구나»의 김형태나 김난도만으로도 부족해서, 예술가나 평론가들까지 예술가 지망생들에게 끊임없이 훈장질한다. 앞서 언급한 그 평론가는 독립 영화제에 영화를 제출한 영화감독 지망생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거의 대부분의 영화들이 점점 더 나빠지는 세상을 체감하고는 있었지만, 그 세상의 불행과 정면 대응할 자기만의 언어를 가진 영화들은 찾기 어려웠습니다. […] 자기도취적인 이미지와 형식의 나열을 마치 대단한 독창성인 듯 치장하는 영화들도 있었습니다.” 영화 평론가라면 지망생들이 그 자기만의 언어를 갖지 못한다고 지적하기보다, 왜 그들이 그 언어로 말을 하는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아마 자신이 지망생들의 작품을 심사하기 때문에 스스로 ‘대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2000년에 소설가 이문열이 홍위병 논쟁에 휘말렸을 때, 그는 한 문화평론가에게 자기의 직분과 이력도 보지 않고, 감히 정치에 대해 떠들어 대냐고 말했다. 그 문화평론가는 소크라테스를 인용하며 답했다.

 

“시인들은 시작의 능력이 있기에 (자신이) 다른 분야에서도 가장 현명하다고 착각하곤 한다.” 글 이종완/삽화 김아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