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와 함께 미술을! (2)

녹두거리와 소호(SoHo)

이른 저녁. 대학동 녹두 호프 앞에 멈춰 선 필리포.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담배를 하나 꺼내 문다.
불을 붙이고 연기를 한 모금 들이마시자마자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는 고든. 필리포는 한 손을 들어 고든을
맞이한다. 필리포의 큰 손을 알아본 고든은 잰걸음으로 필리포에게 다가간다.

고든: 녹두호프는 올 때마다 참 멀구먼그래.

필리포: 아무래도 고시촌이니까⋯ 서울대생 없이 녹두 호프를 가는 게 조금 어색하군.

고든: 아무래도 그렇지. 그래도 종종 대학생 느낌을 내고 싶으면 오는 곳이네. 한때 학생운동의 중심가 중
하나였기도 하고, 여전히 많은 대학생이 오고 가는 곳이니까. 2020년대에도 민중가요를 라이브로 들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이지 않은가.
잠시 하늘을 쳐다보는 고든. 이내 필리포가 담배를 물고 휴대전화 화면을 스크롤 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
라본다.

고든: 그쯤 피우고 이제 들어가지. 이제 담배도 좀 끊고.

필리포: ⋯ 먼저 들어가게.

필리포는 마지막으로 연기 한 모금을 머금은 뒤, 하늘로 연기를 내뿜으며 녹두호프로 들어간다.
호프로 들어가자마자 맡아지는 퀴퀴한 냄새. 창문이 없는 벽과 언제 세탁했는지 모를 소파에서 기름냄새
가 스며 나온다. 식당 주인이 고든과 필리포를 인지했다는 신호를 주고, 둘은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는다.
QR 체크나 명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래된 인조가죽 소파와 칠이 벗겨진 식탁이 있는 곳에 앉는 고든과
필리포. 손님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식당 주인. 몸은 고든과 필리포를 향해 있지만, 눈은 텔레비전을 향
해 있다.

메뉴를 고심하는 둘. 필리포는 기름때가 묻어있는 메뉴판을 대충 뒤로 넘겼다가, 다시 처음으로
넘겨 메뉴를 정독한다. 메뉴판을 뒤적이는 필리포를 두고 고든이 손을 번쩍 들어 식당 주인을 부른다.

고든: 여기 골뱅이무침이랑 레몬소주 주세요.

잠시 필리포를 쳐다보는 고든. 필리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주문을 받고 자리를 뜨기 위해 몸을 돌리는 식당 주인. 필리포가 다시 식당 주인을 부른다. 다시 돌
아서는 식당 주인.

필리포: 사장님. 여기 레몬소주 말고 매화수로 주세요.

식당 주인은 피식하고 웃은 뒤 주방으로 종종 사라진다. 주문이 끝나고 잠시 찾아온 침묵. 필리포
가 침묵을 깬다.
필리포: 요즘 날씨가 슬슬 추워지고 있네. 한국에서 지낸 지 오래되었지만, 날씨가 바뀔 때마다 늘 새롭고
설레는 것 같네. 한국인들도 그럴까?

고든: 생각해보면 우리가 대학 생활을 한국에서 하긴 하지만, 한국 대학의 문화를 경험하는 경우는 아주
적은 것 같아. 돌곶이는 조금 메말라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정이 들기는 했지만, 다른 대학에 있었으
면 한국 대학생의 삶을 좀 더 실감 나게 경험했을 것 같아.

필리포: 맞아. 돌곶이는 낭만이 없어. 담배 연기. 배신감과 패배 의식이 가득한 술자리. 음식의 격에 맞지
않는 가격표. 거대한 무덤과 간장게장을 먹고 세상을 떠난 왕⋯.

기억을 더듬으려는 필리포의 의지를 비집고 들어오는 식당 주인의 쟁반. 매화수와 골뱅이무침이
상 위에 차려진다. 외국인 치고 젓가락질을 잘하는 고든과 필리포. 안주가 나오자마자 젓가락을 든다. 골
뱅이를 소면으로 말아 입에 쑤셔 넣는 필리포.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눈빛과 우물거리는 입을 한 채 젓가
락으로 접시를 가리킨다.

필리포: 역시 골뱅이무침은 실패하지 않는 메뉴야. 어딜 가나 꽤 맛있다네. 언뜻 평준화된 맛인 것 같으면
서도, 각자의 맛이 다 있어! 그래서 새로운 곳에서도 걱정 없이 시키기에 좋은 아주이기도 하지.

골뱅이가 목구멍을 한참 지나고 있을 때쯤 매화수를 입안으로 털어 넣는 필리포. 매실향과 골뱅이
의 조화에 대해 잠시 언급한다.

필리포: 나는 골뱅이소면과 매화수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네. 매화수의 단맛과 떫은 맛이 골뱅이의 맵
고 신 맛을 상쇄해주지. 또 골뱅이소면에 매실청이 조금 들어가 있으면, 매화수가 그 향을 증폭시켜주기도
하고!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고든이 필리포의 빈 잔을 채워주면서 이야기한다.

고든: 골뱅이소면은 늘 지루하지만 맛있다고 생각하네. 골뱅이와 매실주의 조화로움에 대해 들으니, 자네
는 지루함 속에서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 같아. 많은 미식가들이 그러하듯, 먹는 것을
좋아한다기보다 새로운 경험을 좋아하는 것 같네.

필리포: 굳어있는 삶보다는 부유하는 삶이 더 낫다고 생각하네. 부유하며 살려고도 하고. 부유한 것도 좋
지만 말이야!
필리포의 농담에 고든이 피식한다. 그리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만족한 표정의 필리포.
잠시 뒤 고든이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한 뒤 입을 연다.

고든: 생각해보면 대학생과 미술가들은 공유하고 있는 점들이 몇 가지 있는 것 같네.

필리포: 어떤⋯?

고든: 뭐랄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든지, 자신의 가능성을 크게 평가한다든지, 위험을 감수
하는 것에 거리낌이 적다든지⋯ 등등. 이야기하고 나니 요즘의 대학생들과는 거리가 있는 특성일 수도 있
겠네.

필리포: 대학생이라기보다 젊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특성이 아닐까 싶네. 대학생은 대체로 그 자체로
서 젊고, 미술가들은 조금 젊게 사는 측면도 있고. 무모하거나 이상적이고, 대체로 가난하고.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향이 없다고는 못하겠지.

이야기를 나눌수록 필리포와 고든은 기운이 빠진다. 꼿꼿했던 허리는 물렁해졌다. 팔로 몸을 지탱
하며 술을 입에 털어넣고 골뱅이를 씹는 둘. 술이 끊기지 않게 이야기 중간중간 술병을 가리키며 술을 주
문한다.

고든: 입고, 먹고, 자는 것과 이상을 저울질하기. 현재를 저당잡힌 채로 미래를 기다리기.

필리포: 자본의 논리 아래서 많은 이들이 그런 고민을 하지.

고든: 자본의 논리 아래에서 나를 얼마나 지울 것인가에 관한 고민이네.

필리포: 나를 지운 뒤에 나를 다시 그리는 상상을 해보세. 1970년대 뉴욕의 소호에서 등장했던 처
럼 말이네.

고든: 고든 마타-클락의 식당을 말하는군. 이야기를 좀 더 해보게.

필리포: 사실 소호는 공장 지대였네. 이때 도시 재생 정책의 일환으로 뉴욕시에서 예술가들에게 소호의 공
간들을 값싸게 제공했지. 작가들의 작업실이 들어서고 갤러리들이 들어섰네. 젊은 예술가들은 모여들었
지만, 이들이 교류를 할 수 있는 장(場)이 부족했어.

고든: 그래 공장 지대였으니까. 예술가와 공장 노동자의 성향이 비슷하지는 않지.

필리포: 그래서 고든 마타-클락은 발레리나였던 여자친구와 그린스트리트에 식당을 세웠지. 가격은 저렴
하면서 젊은 예술가들이 한데 모여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제시하였네. 먹는 것보다 함께 먹는 것을 기대
한 거지.

고든: 학생운동과 녹두거리의 관계와 비슷한 공간이었던 것처럼 들리는군.

필리포: 비슷하지. 는 단순히 음식만을 제공하지 않았네. 당시의 이국적인 살사나 초밥을 내어놓
기도 하고, 뼈만 나오는 접시도 메뉴에 있었네. 예술가의 실험정신을 담으면서도 다른 예술가의 실험정신
을 자극하기도 한 것이지. 거기에 가격까지 저렴했으니 는 소호 예술인들의 아지트가 될 수밖에
없지 않았겠나.

고든: 음식으로 예술가들이 모이고. 예술가들이 음식을 먹으며 재밌는 작업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아나키
텍쳐(Anarchitecture) 그룹도 에서 시작된 것으로 아네.

필리포: 나도 낱낱이 알지는 못하지만, 정말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진행되었다고 알고 있네. 여기 녹두호프
도, 학생운동을 탄압하는 경찰들을 피해 도망 온 학생들을 숨겨주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지.

고든: 나도 그 이야기를 들었네. 자네도 성준이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지 아마?

필리포: 맞아. 우리 같이 들었던 것 같군.

필리포: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제 예전의 소호는 없다는 것이네. 마타-클락이 만들어낸 소호의 문화도
상품으로 전락한 것이지. 멀리 가지 않더라도, 홍대거리와 문래동 등의 예만 보더라도 알 수 있네. 문화는
상품이 된다는 사실을.

고든: 그러한 점에서 이 녹두거리는 독특한 것 같네. 학생운동 또는 민주화 운동은 상품이 되기에는 역부
족인 것일까?

필리포: 현재까지 그렇게 매력적인 상품은 아니라고 믿네. 과거에는 어땠을지 잘 모르지만 말이야. 그럼에
도 녹두거리는 예전의 녹두 거리가 아니네. 더 이상 민주주의나 학생운동의 공간이 아니지 않은가. 그냥
녹두전을 파는 먹자골목과 대학가 상권이 합쳐졌을 뿐이네. 샤로수길이 생기고 난 뒤부터 이곳 상권이 많
이 죽기도 했지만 말이야.

고든과 필리포는 한동안 말없이 술을 마신다. 고든이 안주를 향해 젓가락을 뻗는다. 젓가락을 대
면 부스러지는 불어터진 소면이 눈에 뜨인다.

고든: 예술가들이 모여 문화를 생산하고, 그 문화는 다시 상품이 되고. 도시는 상품으로 쌓이고, 뒤덮어져
문화를 소외시키고. 마타-클락이 하늘에서 지금의 소호를 보면 담배를 하나 꺼내 물 것 같군. 적어도 마타
-클락은 자본의 논리를 전복하려고 시도했으니 말이야.

필리포: 그 소외 때문에 새로운 시도가 탄생하는 것이기도 하지. 마타-클락은 그저 자본주의에 대한 안티
테제를 제시하는 것에 머물렀을 뿐이니까. 진테제로 나아가지는 못한 것이지. 아마 그 누구도 혼자 진테제
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네. 영웅은 없다고 생각하네. 변화는 함께해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믿네.

고든: 결국 상품을 소비하는 것은 개인이니까. 나도 필요보다 욕구가 앞서고, 앞서는 욕구에 판단력이 흐
려지는 경우가 많네. 소비를 통해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 더 많은 것을 움켜쥐고 싶은 욕구. 남을 짓밟
고 일어서고 싶은 욕구.

필리포: 자네, 어떤 욕구와 그 욕구에 대항하고자 하는 욕구가 공존하는 것이 인상적이네. 소인이 수기치
인(修己治人) 하고자 하는 것처럼 말이야.

고든: 허허. 스스로 군자라고 생각하는 군자가 있을까? 스스로 소인이라고 생각하는 군자만이 존재하네.

필리포: 대충 할 이야기는 다 한 것 같군. 이제 곧 10시니 슬슬 나가도록 하지.

고든: 그래. 오늘 꽤 재미있었군.

필리포와 고든은 휴대폰과 지갑을 챙긴다. 필리포가 계산대에서 계좌이체를 한다. 일 층으로 다
시 올라온 둘. 필리포는 담배를 꺼내 문다. 라이터를 딸깍이지만, 바람 때문에 불이 켜지지 않는다. 담배를
다시 갑에 넣어 두는 필리포. 둘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정류장 이름이 눈에 뜨인다.

“대학동 고시촌 입구”

<참고문헌>
심현섭 (2019). 고든 마타-클락(Gordon Matta-Clark)의 장소의 전복. 한국예술연구(23), 101-121
이지은 (2011). 먹는 미술. 현대미술사연구, 29, 265-290

오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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