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 자세

다른 누군가의 얼굴을 보는 행위가 디지털 기기에의 접속으로 대체된 시대, 나는 문득 기계를 거치지 않고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쉴 새 없이 이동하는 것이 미덕이 된 도시에서, 시민들은 형체 없는 잔상만 남기며 바삐 자리를 옮기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이들이 성냥갑 속의 나뭇개비처럼 얌전하게 늘어앉은 지하철이 연필을 들 장소로 결정된 것은 이상하지 않다. 여기, 사라져가는 만남의 흔적이 있다. 짧은 접촉이 남긴 윤곽, 그리고 책장 속으로 사라져버린 시대의 인간들이 남긴 심려의 말들.

“꿈에 자꾸 도쿄 상가의 모습이 나타나. 도시 곳곳으로 지하도가 보였지.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길을 찾다가 잃어버려. 장소마다 지나간 이들의 꿈이 서려 있고 다음날 잠이 깨면 전날 밤 숨어버렸던 실체를 찾아 지하 미로 속을 헤매고 다녀. 정말 그 꿈들은 내 것이었을까. 아니면 도시에 투영된 거대하고 총체적인 꿈의 집합의 일부였을까.”

  • 크리스 마커, <태양 없이>

“그들이 서로를 보지 않고, 서로를 지나쳐 걸어가고, 상대방이 말할 때 어딘가 가까이에서 소리를 내는 익숙한 형체만을 인식하면서 뭐라고 하고 말하는 곳.”

  • 돈 드릴로, 『침묵』

김신 기자
sans_soleil@kart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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