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노랑무늬 영원>, 우리는 회복될 수 있을까?

코로나 시국에 들어선 지 어느덧 2년이 다 되어간다. 코로나가 우리에게 앗아간 건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 가장 큰 것은 정당한 미래를 상상할 자유가 아닐까 싶다. 한 달 뒤, 반년 뒤, 그리고 일 년 뒤에는 어떤 것을 하고 있을지 상상할 자유, 혹은 어떤 일을 시도해 볼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 말이다. 작게는 여행을 계획하는 것부터 해서 크게는 이직을 하거나, 결혼을 하는 등과 같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관련한 크고 작은 ‘상상 가능한 미래’를 코로나는 앗아갔다. 카뮈가 그의 책 <페스트>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랑에는 어느 정도 미래가 요구되는데, 우리에게는 순간들만 남은 것”(1)이다. 

순간만을 반복하다 보면 우리는 과거에 갇히고 만다. 앞으로 흐르는 시간의 작용을 상상할 수 없게 되고, 시간은 멈춰 있거나 과거로 자꾸만 돌아간다. 그러다가 어떤 때엔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기도 하고, 그 과거로 인해 미래의 청사진 또한 완전히 뒤틀려 버린다. 이처럼 과거와 미래가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개념을 프로이트는 ‘트라우마’의 기본 형태로 보았다. 트라우마가 되는 사건과 그 사건이 끔찍한 것이었다는 깨달음 사이에는 시간적 간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의 시간은 가역적인 것이며, 과거는 오로지 현재가 재구성하는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과거는 아직도 완료된 것이 아니며, 사후에 재구성될 여지를 늘 갖고 있는 ‘미래 완료’의 형태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미래 완료의 시간을 ‘트라우마적 현상’에 집중해 논의를 전개했다. 그러나 이 지면에서 전개하고 싶은 논의는 트라우마가 아니다. 외려 그 반대다. 

회복. 우리는 회복할 수 있을까. 회복은 정말로 가능한 것일까. 우리는 과거의 상처를 회복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정답’이란 당연히 존재할 수 없겠지만, ‘현답’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품을 하나 소개하고 싶다. 한강의 소설집 <노랑무늬 영원>이다. 2012년에 출간된 이 단편집은 회복과 회구에 대한 7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는 표제작 <노랑무늬 영원>만을 다뤄보려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프로이트는 트라우마의 특질을 시간적 차이에 둔다. 과거의 상처가 현재에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 그러므로 아직도, 혹은 어쩌면 영원히 완료되지 않을 사건이 ‘트라우마’의 작동 구조라는 것이다. 이 기본 구조를 반대로 회복에도 적용시켜 보면 어떨까. 상처뿐 아니라 회복 또한 단절된 과거에서 완전히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계속해서 대화를 주고받으며 미완의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말이다.

한강의 이 소설은 바로 그런 과거-현재의 대화가 우리의 회복을 구성한다고 말하고 있다. 주인공 ‘나’(현영)는 서른세 살의 기혼 여성이다. 그림을 그리는 일을 평생의 직업으로 선택한 그는 돌연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오른손을 비롯한 양손 모두를 거의 쓰지 못하게 된다. 평생 화가로 살아온 그녀 앞에 손의 불능성이라는 문제는 그간의 삶의 기본적인 전제조건을 무너뜨린다. 손을 쓸 수 없는 화가가 되어버린 나는 살아갈 수 있을까, 살아갈 이유가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한 채 일상을 이어가는 그녀의 앞으로 몇 개의 이미지들이 나타난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비워 두었던 작업실 한 켠에 놓인, 재일교포 1세대 화가 Q의 유작전 도록, 과거의 대학 동기 ‘소진’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 그리고 ‘소진’의 동네 사진관에 걸려 있다던 그녀도 출처를 전혀 알 수 없는 자신의 대학 시절 사진. 이 세 개의 사건은 모두 과거에서 길어 올려진 것들이다. 과거에 다녀온 전시, 과거의 대학 동기, 그리고 과거의 ‘나’. 만약 우리가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구조를 여기에도 적용시켜 볼 수 있다면, 이 소설의 회복 구조 또한 가역적이라고 말해 볼 수도 있다. 현재의 이 부스러진 손이 아니었다면 과거의 세 이미지들은 재인식될 수 없었을 것이므로. 

‘나’는 과거의 전시를 떠올리며 그때의 이 노랑 무늬 그림들이 지금의 나에게 어떻게 인식되는가를 느낀다. 또 과거의 자신이 담겨있는 사진을 보며 그것이 어디에서, 누구에게 찍혔는지를 상기하게 된다. 취미 삼아 등산을 하던 20대 시절에 우연히 만나게 되었던 다른 등산객, 어떤 남자 ‘최인성’이 찍어주었던 사진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일들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앞에 제출된 이 이미지들과의 연속된 시간성을 느낀다.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 혹은 나에게 과거가 존재했었다는 감각. “나는 그 남자, 최인성이 찍었던 사진들을 본다. 나무와 하늘, 빛을 받은 잎사귀들. 내가 찍은 그의 프로필, 내 사진 석 장. 얼음 덮인 바위틈의 연둣빛 싹. 거기 겹쳐진다. 더운 김이 피어오르는 그의 목덜미, 흰 피부의 잔 솜털들. 거기 입술을 누르고 싶었던 순간의 아득함. 그 모든 것들이 고요히, 그 사진관의 먼지 낀 상자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내 시계처럼. 이 년 동안 어둠 속에서 죽지 않고 고요히 돌아가고 있었던 초침처럼.”(2) 트라우마가 과거 속에서 급작스럽게 밀려오듯이, 우리의 회복 가능성 또한 어둠 속에서도 죽지 않고 돌아가고 있던 초침처럼, 여전히 우리 속에 존재하고 있다. 단지 그 시간의 연결고리를 묶을 수 없었을 뿐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회복의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를 듣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이 상처(트라우마)다. 상처가 없었다면, 시간은 소급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므로.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좋은 소설이지만, 한강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여기에 돌연 ‘영원’이라는 화두를 던져 놓는다. 도록 – 대학 동기와의 만남 –  과거의 사진이라는 세 개의 이미지와 함께 세 개의 ‘영원’이 제출된다. 우리는 영원히 회복될 수 없을까? 우리 안의 어떤 부분은 영원히 죽었을까? 그리하여 우리의 과거는 영원히 우리의 사생아로만 남게 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답변이 이 소설에는 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것은 고통이 된다. (중략) 그것은 평생토록, 끈덕지게 죽지 않고 살아 꿈틀거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으로 고통이 아름다움을 다시금 상기시키기도 한다. 바로 그 고통과 아름다움의 역전된 순간을 한강은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대목에 위치시킨다. 그 순간을 여기에 옮겨놓고 싶지만, 단편적으로 발췌된 구절이 그 아름다움을 해칠까 두려워 그것만큼은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다. 다만, ‘영원’도 영원히 소급되는 것이니,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발명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그것은 시간의 고리 속에서 계속 획득되는 것이라는 깨달음만이 지금, 상상할 수 없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작은 위로를 준다. 

회복 또한 미래 완료의 시제라는 것은, 영원히 회복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과거 속에 회복의 순간이 켜켜이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프로이트가 말한 ‘이상한 시간의 작용’은 상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이 소설은 고요히 제안하고 있다.  

  1. 알베르 카뮈, 『페스트』,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1
  2. 한강, 『노랑무늬 영원』, 문학과지성사, 2012

박채원 기자
onewonn@kart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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