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중재할 수 있지만 유튜버는 막을 수 없는 이유

민주당이 발의한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화제다. 이 개정안은 온라인을 토대로 퍼져나가는 가짜뉴스와 선정적 보도를 문제시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징벌적 손해배상, 정정보도 확대, 열람차단청구권 등을 제시한다. 여러 평자들은 근자에 발생한 여러 정치적 사안을 떠올리며 개정안의 적실성을 가늠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안의 세목을 들여다보는 것이 본 기사의 목적은 아니다.

이 사태를 정부의 언론 탄압이라는 익숙한 맥락에서 독해하는 순간, 기사는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 ‘언론의 자율성 위축’과 같은 원론적인 수사를 거쳐 언론의 책임과 자정작용을 요청한다는 모범답안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런 구도가 상황을 해석하는 데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이유는 이렇다. 가짜뉴스와 선정적 보도는 대부분은 개정안이 규제의 대상으로 상정하는 주류 레거시 미디어보다는 1인 미디어나 SNS를 통해 퍼져나간다. 가짜뉴스의 주된 진원지는 내버려 두고 전통 미디어만을 주목하는 것은 문제의 과녁을 엇나가는 처사가 아닐까.

이런 맹점은 이미 여러 평자에 의해 간략하게 지적된 바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들은 이 맹점을 파고들며 플랫폼에 대한 규제가 불가능한 이유를 분석하는 대신, 정책의 미비함을 근거로 국가 폭력의 부조리와 언론의 자율성에 재차 방점을 찍는 원론적 논점으로 회귀한다. 1인 미디어와 플랫폼에 대한 논점은 다시금 망각되고, 사태는 국가와 기성 언론이라는 이분법적 대립항으로 환원된다. 혹자는 이 환원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아무리 1인 미디어가 범람하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레거시 미디어는 여전히 모범적인 보도의 기준을 제시할 공적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고 말이다. 누구나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타당한 주장이다. 그런데 사실 이 부분적 타당성과는 별개로, 이들이 끝내 고수하려 하는 국가와 언론의 대립 구도가 상황의 더 본질적인 진상을 보지 못하게 막고 있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국가와 언론이 대립하고 있다는 직관적인 구도는 시민의 알 권리가 여전히 공적 기관에 의해 주재되는 세계를 상정한다. 하지만 불과 5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어느 정도 유효했던 이 구도는 오늘날 거의 완전히 붕괴했다. 몇 가지 의미심장한 증거도 있다. 시사주간지 『시사in』이 매년 진행하는 언론 신뢰도를 설문한 결과, ‘어떤 신문 매체를 가장 신뢰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없다/모름/무응답’으로 선택한 응답자의 비중은 2015년 25.7%에서 2021년에는 무려 54.8%로 급상승했다.(1) 지난해의 45.5%로부터도 무려 10%가량 상승한 수치다. 이런 설문이 아니더라도 기성 언론의 위기가 새삼스러운 소식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잠정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셜 미디어가 제2의 자연으로 정착한 2010년대 중반의 어느 시점 이후, 기성 언론은 신뢰도를 잃는 것을 넘어 이제 그 존재조차 잘 인지되지 못하는 세상이 도래했다(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서 인지되지 못하는 요소는 브랜드의 이름 같은 게 아니라 언론이 지닌 고유한 해석학적 관점이다).

돌이켜보면 정말 그런 시대다. 정부는 소셜 미디어와 IT기업을 규제하는 데 실패했으며, 각종 메신저와 어플리케이션의 사용을 공적 용도로 의무화하는 제도적 압력이 일반화됨에 따라, 스마트폰은 사적 소비품의 범주를 넘어 신체 기관과 같은 것으로 변형됐다. 전통적 미디어가 정보를 독점하며 대중의 집단적 기억을 구축하던 시대와 달리, 이제 시민은 자신만의 리얼리즘을 쇼핑하듯 취사선택하며 살아간다.

여당의 언론중재법이 언론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거나, 아니면 반대로 언론이 이미 자정작용을 상실했다는 주장은 각자가 나름의 설득력을 지닌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책임의 초점을 정부와 언론으로 축소하는 순간, 우리는 이 시대를 특징짓는 전대미문의 현상을 직시하지 못하게 된다. 이미 언론과 정부가 중앙집권적인 정보의 통제권을 상실했으며, 그러한 공적 영역의 소멸로 인한 사회적 인식의 급격한 주관화야말로 바로 오늘날의 유일하게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기성 언론조차 생존을 위해 비주류 미디어의 문법을 빌려오는 시대, 가짜뉴스와 선정적 보도의 범람은 어쩌면 플랫폼의 확장이라는 본질적 현상이 낳은 결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왜 우리는 이 사태의 본질적 문제인 소셜 미디어를 규제한다는 담론으로 옮겨가지 못한 채 국가와 언론이라는 구도에 머물고 있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혹시 우리가 고수하는 이데올로기적 프레임이 이 사태를 직시하지 못하도록 저지하고 있는 걸까. 짧게나마 가설을 꺼내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셜 미디어가 문제적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그것이 시민에게 정치적 자율성을 제공하는 순기능을 지닌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동의하는 견해는 주로 근래에 일어난 아랍의 봄, 미얀마 사태 등을 예시로 거론하며 소셜 미디어가 권력의 부조리를 감시하는 도구로 전용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논의의 핵심은 ‘감시’라는 순기능과 연결되며, ‘본다’는 행위의 능동성은 ‘보인다’는 억압적 상태, 혹은 무지라는 수동적 조건을 타파할 수 있는 정치적 활동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충분한 진단인가.

미디어 이론가 조너선 크래리는 위와 같은 논점을 비판하며 감시 담론의 맹점을 이야기한 바 있다. 그는 미셸 푸코의 철학적 성과로 잘 알려진 근대 국가의 감시 권력에 대한 비판이 간과한 한계를 지적한다.(2) 푸코는 감옥의 수감자를 처벌하고 감시하는 근대 형벌 제도가 감시 기술을 통해 시민을 예속시키는 과정을 분석한 바 있다. 한쪽에 감시하는 주체가 있고 반대편에 감시당하는 객체가 있다. 이 선명한 이원론적 구도는 시각을 주체적 행위로 자연스럽게 맥락화한다.

(사진1) ▲19세기 말의 카이저 파노라마

하지만 크래리는 본다는 행위가 수동성을 띨 수 있음을 숙고하며 19세기의 시각문화가 낳은 무수한 광학 기계에 눈을 돌린다. 대표적으로 만화경, 카이저 파노라마와 같은 당대의 광학 기계는 새로운 유희거리였던 동시에 산만한 기하학적 효과와 착시 작용을 통해 소비자의 주의력을 빼앗는 도구였다. 이 시기는 시각과 주의력이 분석되고 통제될 수 있는 생리학적 데이터로 변환되면서 수익 창출의 도구로 활용되는 국면이기도 했다. 크래리는 말한다. 19세기 광학 문화에서 텔레비전과 컴퓨터에 이르는 기계들은 “설령 사용자의 능동성과 ‘인터랙티비티’라는 환상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파티션을 통한 공간의 분할, 앉는 자세를 강제sedentarization하거나 신체를 제어할 수 있게 만드는 수단과 함께 주의력을 통제하는 방식”(3) 으로 기능해왔다고.

미디어의 사용을 수동성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그의 분석이 오늘날에 더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가령, 빅테크 기업은 스크린을 응시하는 동공의 떨림, 특정한 화면의 좌표에서 시선이 얼마나 머뭇거리는지와 같은 데이터를 끌어모으는데 천문학적인 규모의 예산을 투자한다. 그 리서치는 기기를 사용하는 소비자의 주의력을 착취하거나, 웹페이지 창의 팝업 속도를 조절해 소비자가 실수로 광고를 클릭하게 하는 식의 인터페이스를 최적화하는 데 활용된다. 그러므로 디지털 기기나 소셜 미디어가 시민의 정치적 주체성을 보조할 수 있다는 주장은 그 이면의 기술이 이미 일상을 훨씬 포괄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상황을 간과하는 진술이다. 가령 유튜브 유저는 종종 몇 분만 지나면 내용조차 망각할 무의미한 영상을 몇 시간 동안 멍하니 쳐다보며, 심지어 자신이 그것을 왜 보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심리적 공허에 처하곤 한다. 여기서 미디어가 사용자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과정은, 그가 어떤 주체적 경험도 축적하지 못한 채 조회수를 올리는 상술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비슷한 맥락에서, 그곳에서 주어지는 정치적 주체성 또한 그것이 지속성과 보편성을 잃은 채, 그저 스크롤을 내리는 순간 망각될 임시적 이벤트로 전락하게 만드는 인터페이스의 작용과 불가분하다.

“인간 신체의 모든 발화와 우리를 둘러싼 모든 자원들이 디지털 데이터로 전환되어 자본주의적 생산의 중심 추동력이 되는”(4) 데이터 사회의 경향이 가속화한 오늘, 수동성의 지분은 능동성을 압도해 외면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두 요소가 공존한다는 모순, 그리고 이 모순이 개인의 노동과 실존적 정체성이라는 차원에까지 녹아들었다는 난감함으로 인해 많은 평자들은 미디어에 대한 총체적 비판을 포기한 채, “이럴 수도 있다, 저럴 수도 있다. 그러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는 공허한 논평을 내놓는 데 그치곤 한다. 이 점은 정부가 언론은 중재할 수 있어도 유튜버는 통제할 수 없게 만드는 이유의 하나이기도 할 것이다. 기성 언론과 정부라는 명쾌한 이분법적 구도에서는 어느 한쪽의 자율성에 책임을 물을 수 있지만, 소셜 미디어는 그 구도 자체를 붕괴시켜버리면서 규제를 가능하게 하는 인식론적 차원을 무력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처럼 융통성 없어 보이는 행동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렇게 모순을 용인한 결과일까. 근래에 신문을 펼치면 서로 상충하는 내용의 기사가 첫 술자리에서 동석한 대학 새내기들처럼 어색하게 공존하는 상황이 일상이 됐다. 한쪽에는 코로나 뉴노멀이 촉발한 디지털 기기에의 중독과 사회성 부족이 우울증 증가로 이어졌다는 내용이 있고, 바로 옆에는 활짝 웃는 개발자가 인터뷰를 통해 디지털 뉴딜이 사회를 진보시키리라 전망하는 식이다. 한국 사회를 사는 우리는 중국 공산당이 빅테크 기업을 규제하는 행보에 동조할 수 없을 테지만, 적당한 규제를 가하지 않는 이상 이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현실도 솔직하게 시인해야 할 것이다. 정작 빌 게이츠와 차마스 필리아피티아와 같은 IT기업의 거물이 스마트폰 같은 “몹쓸 기계”를 자녀에게 사용 금지했다고 토로한 소식은 이 상황을 둘러싼 고약한 아이러니다.(5)

소셜 미디어가 문명의 이기만이 아니라 실질적 문제임을 인식하는 것은 가짜뉴스나 선정적 콘텐츠를 퍼뜨리는 유저를 규제하는 데도 새로운 근거를 제공해줄 수 있다. 정치는 ‘좋아요’ 버튼을 눌러주는 손쉬운 공감의 수단이 아니라, 구체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결단의 도구다. 그러므로 문제적 유저를 표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온정적으로 용인하기만 하면, 그들이 타자에 대한 능동적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는 책임과 도덕의 차원을 논의할 수 없다. 많은 경우 객관적이고 정제된 논거가 결여된 자기중심적 논리와 허위적 수사학에 기대는 그들의 화술은, 세계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의 표명이라기보다는 그 이해의 실패가 낳은 비합리성의 표출에 가까워 보인다는 점에서 수동성의 표지다. 그 수동성은 우리가 살펴본 주의력의 결여는 물론, 여성학자 정희진이 한국 사회에서 발생하는 소통의 폐단과 사회적 갈등의 원인으로 지목한 SNS의 문해력 저하에도 뿌리를 박고 있다.(6) 재차 강조하건대, 이 사안은 개별적 유저의 언행을 넘어서는 구조적 차원에 얽혀있으므로 단순히 문제적 발언을 삭제하는 식의 피상적 조치는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문제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는 가면을 쓰고 있는 데다가, 이 기사를 쓰고 있는 기자 본인도 SNS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솔직히 말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고사하고 사회적 합의에 이르는 것조차 가능하기나 할까? 과연 이것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문제다.

1) 『시사in VOL. 731·732』, 2021.9.21/28.
2) Jonathan Crary, 『Techniques of the Observer』, The MIT Press, 1990.
3) Jonathan Crary, 『Suspensions of Perception』, The MIT Press, 1999.
4) 이광석, 『데이터 사회 미학』, 미디어 버스, 2017.
5) 프랑수아 뤼팽 외, 5G 삶의 진보인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1.2.
6) 정희진, [정희진의 융합] 문해력 ‘최하위’ 한국,  『한겨레』, 2021.5.11.

김신 기자
sans_soleil@kart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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