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와 함께 미술을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아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정동 광화문국밥 앞. 필리포가 손을 흔들며 고든을 맞이한다)

필리포: 어이 고든, 방학 잘 보냈나?
고든: 그냥 본가에서 유배 생활 하듯이 지내고 있네. 부모님께서 내가 가만히 있는 걸 가만두지 않으시거든….
필리포: 그 마음 내가 잘 아네. 자고로 본가란 사흘 이상 머물면 귀에 진물이 생기는 법이지.
고든: 자네도 참…. 일단 들어가세 필리포.

(필리포와 고든은 식당 안쪽 자리에 앉는다)

고든: 그나저나 자네, 왜 광화문 국밥에서 보자고 한 건가?
필리포: 그야 물론 나는 냉면을 좋아하지만, 자네는 좋아하지 않고, 또 나는 국밥을 좋아하지 않지만, 자네는 국밥 없이 살 수 없는 존재 아닌가? 그래서 국밥도 맛있고, 냉면도 맛있는 이곳으로 자네를 불렀지.
고든: 그것참 사려 깊은 선택이군. 고맙네! 친구. 새삼스러운 소리지만, 우리 이제 한국인이 다 된 것 같아. 껄껄.
필리포: 하하. 주문 먼저 하지. 저기요 여기 국밥 특이랑 냉면, 그리고 수육 한 접시 주십시오.

(주문을 받고 유유히 사라지는 종업원. 고든과 필리포는 잠시 말이 없다가 말을 다시 이어간다)

필리포: 아니, 그나저나 최근에 아주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를 보았네.
고든: 어떤…?
필리포: 소셜미디어가 우리의 심리적 취약점을 공략하여, 어떻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였지. 계정 태그나 말줄임표, 보기 좋은 디자인, 고도화된 알고리즘 등 각종 요소를 통해 우리를 소셜 미디어에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고 하더군. 사용자로 하여금 인터넷으로부터 손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사용자를 광고를 위한 숙주로 전락시키는 전략인 것이지. 인스타 중독인 자네도, 나도 결국 숙주라는 이야기네! 아무튼, 이러한 소셜 미디어의 전략이 현실 세계에 어떤 폐해를 낳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며 다큐멘터리는 마무리되었네. 상대방이 타이핑할 때 말줄임표를 띄워놓음으로써 내가 그 소셜 미디어를 떠나지 못하게 하고, 이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요소들이 모여 문제적 사건이 발생한다니. 논리적 비약처럼 보이지만, 참으로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네. 새삼 놀랍지 않은가?


고든: 나도 놀랍긴 하네. 하지만 소셜 미디어는 자리를 마련해줄 뿐, 콘텐츠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자는 모두 사용자 아닌가. 자유로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야기한 문제에 대한 책임을 소셜 미디어에 돌리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네.
필리포: 좋은 지적이네. 하지만, 소셜 미디어가 우리의 취향과 성향, 상황 등에 맞는 광고나 피드를 제시해주는 것이 아닌, 광고나 피드를 통해 우리의 취향과 성향, 상황을 규정하고 통제한다면 어떤가. 결국 우리가 사용하는 소셜 미디어는 개인의 정보라는 상품을 광고주에게 판매하는 곳이니, 더 많은 광고를 따내기에 유리한 방식으로 사용자를 유인하는 것은 기업의 입장에서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 아닌가. 이러한 이윤 극대화의 전략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는 발판이 되네. 소셜 미디어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다면, 법적 규제를 강화하면서 충분히 책임을 물을 수 있네. 담배나 주류 산업처럼 많은 세금을 부과할 수도 있고, 사용자 정보 수집을 제한하는 규제를 만들어 낼 수도 있지.
고든: 대부분의 기업이 이윤 극대화를 추구한다는 사실에서, 또 그것이 기업 성장을 위한 의무라는 사실에서 사용자를 유인한다는 유추가 납득이 되네. 나도 소셜 미디어 기업들이 사용자를 더욱 정교하고 치밀하게, 또 영악하게 분석한다는 사실을 꾸준히 들었던 기억이 있지. 하지만 우리의 성향과 취향은 소셜 미디어가 아니더라도 쉽게 변하지 않던가.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주체가 신문이나 책, 텔레비전 등에서 소셜 미디어로 바뀌었을 뿐이야. 개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 역시, 소셜 미디어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대가라고 생각하네. 기업은 자선단체가 아니지 않은가. 기업에 대한 규제보다 분별력 있는 소셜 미디어 사용을 위한 교육이 선행되어야 하네.
필리포: 자네 말이 맞네. 하지만 소셜 미디어는 사용자를 분석하고, 분석에 따른 콘텐츠를 제공하는 알고리즘을 통해 듣고 싶고, 또 보고 싶은 것만을 제시하네. 인간의 심리적 취약점을 활용해서 말이지. 이렇게 고도화된 기업의 전략에 개인이 효과적으로 맞서기가 절대 쉽지 않네. 또한 ….


(이야기를 나누던 중 국밥과 냉면, 수육이 함께 나온다. 잠시 조용해진 뒤 마스크를 벗는 고든과 필리포. 둘은 서양인답게 먹으면서 이야기한다)


고든: 그나저나 이 집 국밥은 국물이 참 맑아서 차를 마시는 듯한 느낌을 주네. 밥을 한술 떠서 고기를 올리고, 오징어 젓갈까지 얹어서 먹으면 아주 행복해지는 맛이지. 개인적으로 이 집 냉면보다는 이 집 국밥이 한 수 위라고 생각하네.
필리포: 그런가? 나는 국을 원래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야. 뜨거워서 조금 식혀서 먹어야 하고, 여차하면 혓바닥이 데기도 하지. 또 국밥은 먹고 난 뒤에 입에서 나는 냄새를 처리하기 곤란하지. 식당의 공간 자체가 습해서 안으로 들어갈 때 안경에 김이 끼면서 기분이 썩 상쾌하지 않다는 것도 국밥집을 선호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라네. 반면 냉면은 차가운 육수가 입안에 들어가면 온도가 올라가면서 향이 점진적으로 퍼지지. 그리고 그사이에 비집고 들어오는 메밀의 향이란! 냉면이란 참 아름다운 음식이 아닐까 생각하네
고든: 자자 필리포, 진정하게. 자네는 참 까다로운 사람이군. 뭐든 토론하려 들지 말고 가볍게 이야기하자고.
필리포: 내가 잠시 흥분을 했나 보군. 사과하네. 그나저나 아까 하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고.

(필리포가 물을 한 잔 마신다.)

필리포: 원하는 것만을 제시하는 소셜 미디어의 폐해는 사용자의 생각을 한쪽으로 기울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네. 혼자만의 세계에서 스스로를 객관화시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닌가. 자기 객관화가 되지 않으면,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네. 그리고 그 정당화의 결과는 의견의 극단화로 이어진다고 믿네. 극단에는 중용이 없기 때문에, 극단이 많아질수록 대립은 커지네. 사실 중용은 크기도 끝도 없지만, 극단은 한계가 없네. 이러한 맥락에서 각종 정당이나 지역, 인종, 젠더 등에 관한 논의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극단과 대립으로 치닫게 된다고 생각하네. 물론 점점 커지는 의견의 간극이 소셜 미디어 기업에 돈이 되겠지. 사용자는 더 많은 시간을 소셜 미디어 속 ᄐ극단과 대립을 위해 사용할 것이니까.
고든: 일리가 있군. 조금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나 역시 최근 우리 사회가 분리되어 감을 실감하고 있네. 소셜 미디어를 우리의 삶 속에서 더 이상 떼어놓을 수 없게 되었다고 느끼네. 우리는 이제 소셜 미디어가 없는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겠지. 소셜 미디어가 우리가 보고 싶은 것, 우리가 보고 싶어 할 만한 것, 우리가 볼 수밖에 없는 것들을 제시하니까. 우리는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클릭하게 되지. 아니 의식해도 클릭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네.
필리포: 맞네. 이는 단순히 취향이나 성향의 차이를 넘어서는 것 같네. 청년층은 젠더 갈등을 다룬 기사나 영상을 더 자주 접하게 될 것이고, 중장년층은, 지역이나 정당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접할 것이네. 같은 세대라고 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 비슷한 것은 물론 아니겠지. 우리가 지금 당장 유튜브를 켰을 때, 같은 영상이 추천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난 종종 실시간 인기 동영상이 왜 인기가 있는지 정말 모르겠을 때가 많더라고.
고든: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국밥집으로 오는 길에 미 대사관 근처에서 캡틴 아메리카 복장을 한 한국인을 보았네.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생각나서 말이야. 하하. 그나저나 주요 언론사부터 각종 가짜 뉴스까지. 미디어가 이러한 갈등을 먹고 사는 것을 보면 자네의 말에 충분한 설득력이 있네. 그래서 결국 자네의 주장은 소셜 미디어가 사회를 분리하고 서로를 향한 대립각을 세우도록 부추긴다는 뜻인가?
필리포: 부추긴다기보다 방관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네.
고든: 하지만 과연 그 대립이 단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네.
필리포: 나 역시 대립 자체가 나쁘지 않다고 믿네. 하지만 대립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 그 대립의 의미는 없어진다는 의미이지. 의견 대립의 목적이 무엇일까, 또 그것의 순기능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세. 나는 대립의 궁극적인 목적이 화합이라고 생각하네. 하지만 대립이 극단적일수록 화합은 어려워질 뿐이지.
고든: 나도 화합을 추구하는 맥락에서, 극단적 대립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네. 우리 모두 어느 정도 아집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그 아집은 쉽게 깨지지 않네. 자기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해야하고, 인정하는 그 과정이 매우 고통스럽거든. 그러나 우리가 극단적인 주장을 들고 왔을 때, 상대방이 아집을 깰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지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하네. 수십번의 차분한 어투보다, 한 번의 진상이 더 도움이 되지 않던가. 이때 진상이라는 말은 터무니없는 주장을 개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에 한 치의 양보를 두지 않는다는 태도로 일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주게.
필리포: 그런데 강한 주장은 상대방의 마음을 굳게 닫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 주장이 강하면 강할수록, 터무니없는 주장이 될 가능성이 있네.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할 것이거든. 또 자신의 주장에 한 치의 양보를 두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닫는다는 것 아닌가. 자신은 이미 닫혀있으면서, 상대방에게 열린 마음을 기대하는 것이 합리적인지 의문이 드네.
고든: 자네의 주장에 따르면, 화합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이미 거의 화합이 이루어진 상태가 아닌가? 화합이 진정으로 필요한 사회는 대립하고 분열된 사회네. 자네 말처럼 모두를 존중하는 사회만이 화합할 수 있다면, 대립하는 사회에서 화합은 도대체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 것인가. 대립하는 사회에서는 작은 충돌이 여러 번 있는 것보다, 큰 충돌, 아주 큰 충돌이 한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네. 물론 큰 충돌이 화합으로 이어진다고 장담할 수는 없네. 하지만, 충돌이 있어야 대립하고 분열된 사회에서 화합하는 사회로 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지 않을까? 중세의 종교개혁이 그러하고, 4월과 6월, 8월의 민주화운동이 그러하고, 아메리카의 독립 전쟁이 그러하지 않은가.
필리포: 자네 말이 맞네. 화합이란 작은 갈등에서도 큰 갈등에서도 필요하고, 작은 갈등에서는 작은 충돌이, 큰 갈등에서는 큰 충돌이 필요한 것 같네. 그러나 그 갈등이 충돌로 가기 전, 우리는 대화가 필요하네. 서로의 의견을 들어보고,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는 것. 하지만 최근에는 갈등이 충돌로 가기 전까지의 과정은 오직 인터넷에서만 이루어지는 것 같네. 충돌만이 실제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갈등이 인터넷에서 곪고 곪아, 화면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네. 충돌은 화할 수 없는 경우에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고든: 이야기가 끝이 없군. 시간이 오래되었으니 우선 자리에서 일어나세.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고든과 필리포. 마스크를 쓰고 계산대로 향한다)

고든: 그러고 보면, 대화하는 시간이 예전에 비해 참 줄어들어 버린 것 같아.
필리포: 화면 속에서 대화하는 게 더 편리하기 때문이 아닐까.
고든: 그렇다면 화면 밖에서 어떻게 대화를 진행해야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을까.
필리포: 늘 그렇듯이 딱딱한 토론장이나 어려운 미술관보다는 음식과 술이 있는 식탁이 낫지 않을
까?
고든: 갑자기 미술관이라니?
필리포: 미술관은 언제나 메세지를 던지려고 하니까. 질문이든 외침이든 뭐가 되었든 간에.
고든: 오호. 미술과 음식에 대해, 미술과 식사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것도 흥미롭겠군.
필리포: 대화의 결론이 너무 뻔하지 않나? 미술과 음식이라니!
고든: 자자 이제 그만하고, 계산부터 하세.

오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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