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마녀들>: 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

1951년, 유서를 쓰고 사지로 향한 21명의 여성들

1951년 5월 15일, 21명의 여성들은 한 호텔방에 모여 유서를 썼다. 그들은 출신지도, 직업도 다양했다. 이들은 북한의 전쟁 피해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꾸려진 ‘국제민주여성연맹(이하 국제여맹) 한국전쟁 조사위원회’였다. 다음날, 초면의 이방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 ‘초토화작전’이 개시된 직후의 북한으로 함께 떠났다. 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학과 교수인 역사학자 김태우의 저서 <냉전의 마녀들>은 그간 ‘소련과 북한 측의 정치선전물’로 평가절하 받았던 국제여맹의 보고서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이 책은 각종 사료를 바탕으로, 런던에서부터 시작된 영국 조사위원 모니카 펠턴(Monica Felton)의 여정을 뒤따라간다.

<냉전의 마녀들>은 소설적인 글쓰기 방식을 취한다. 1장의 첫 번째 문장, ‘이번 기회를 놓쳤다면 펠턴은 예방주사도 맞지 못하고 아시아의 전쟁터로 들어갈 뻔했다’를 읽자마자 독자들은 모니카 펠턴의 발자취를 좇으며 1951년의 역사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된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미국의 중국사 연구자 레이 황(Ray Huang)과 조너선 스펜스(Jonathan D. Spence)의 역사서와 같은 문학적 형식에 기초하고 있다. 조사위원들의 여정과 내적 감정의 변화를 보다 깊게 전달하기 위해 택한 서술방식이다. 이에 저자는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묘사와 대화가 철저하게 1차 자료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국제여맹은 1945년 12월 1일 조직된 “진보적 ‘좌파 여성주의’ 국제 우산조직”이다. 그들은 성평등뿐만 아니라 반파시즘, 반식민주의, 반인종주의 등을 주장했는데, 당시 여성운동사에서는 생소한 내용들이었다. 여성의 권리, 반파시즘, 평화를 핵심적으로 내세운 국제여맹에서는 제3세계 출신 여성들에게도 동등한 발언권과 지위가 부여되었는데, 이는 그 이전 유럽 여성주의 운동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국제여맹은 세계 최대 규모의 여성 단체였으나, 한국전쟁 조사위원회가 작성한 보고서를 토대로 펴낸 소책자 <우리는 고발한다(We Accuse)>를 발간한 뒤 유엔 내 공식 지위를 완전히 박탈당했다. 보고서에 미국에 대한 극렬한 비판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매카시즘에 장악되어있던 1951년, <우리는 고발한다>는 ‘소련과 공산당의 선전 팸플릿’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역사의 뒤안길에서, 유의미한 분석 대상으로 평가받지 못한 채 묻혀 있었다.

국제여맹에 대한 연구는 2010년 이후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프란시스카 더한(Franciscaa de Haan)을 비롯하여, 해외 여성학계에서 폭발적인 수준의 역사학적 연구가 이루어졌다. 여태껏 낙인 찍혀온 것과 달리 국제여맹은 결코 소련 혹은 국제공산당의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자드위가 E. 피퍼 무니(Jadwiga E. Pieper Mooney)에 따르면 국제여맹의 캠페인은 여성 인권 운동에서부터 반파시즘, 반식민주의 투쟁에까지 이어져왔다.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도 식민지 상황에 처해 있었던 국가들, 그리고 그들과 연대하려한 서구 여성들의 존재는 냉전 패러다임에 갇혀 쉽게 흐려지고 말았다. 

저자는 서장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현재의 나보다 스무살 이상 어린 꾸바 대부호 집안 출신의 여성 변호사는 왜 지구 반대편의 전쟁터에 자발적으로 들어가고자 했을까? 매우 소박한 평화 운동 경력과 사회민주주의적 소신을 지녔던 서독의 평범한 주부는 어떻게 해당 지역을 대표하여 북한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제국 프랑스와 그의 식민지인 알제리, 튀니지 출신의 세 여성들은 아시아의 전쟁터에서 어떤 감정을 공유했을까? 조사위원회에 참가한 여러 여성들은 귀국 후 거센 사회적 비난과 고난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무도 보고서의 내용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을까?” 이에 영국 조사위원 펠턴은 북한으로 떠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한가지 목표만을 갖고 있었다. 그 유일한 목표는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었고, 진실을 발견할 경우 그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다.” 냉대받고 망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51년, 죽음을 무릅쓰고 사지로 향한 여성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냉전의 마녀들>은 그 처절한 기록을 2021년의 한국 독자들에게 심도 있게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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