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매드랜드> : Homeless와 Houseless, 동의어가 되어버린 삶

지난 4월 25일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윤여정 배우의 여우조연상 소식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작품은 윤여정 배우의 <미나리>뿐이 아니다.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3관왕에 달하는 영화 <노매드랜드, Nomadland>, 남우주연상과 각색상을 수상한 앤서니 홉킨스의 <더 파더, The Father> 등 많은 작품이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오늘 이 글에서 다뤄 볼 영화는 위에서 언급한 3관왕의 영화 <노매드랜드>(이하 <노매드>)인데, 이 영화의 작품성은 차치하고서라도 2021년에 등장한 이런 영화가, 가장 메이저한 시상식 중 하나인 아카데미 어워드에서 작품상을(비롯한 많은 상을) 탄 것이 지금 이 사회의 어떤 단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노매드>는 삶과 죽음을 통해 Home에서 떠난 이들이 다시 Home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처럼 읽히지만, 실은 이런 질문에 좀 더 가깝다. Home과 House는 정말로 다른 것인가? 혹은 Homeless와 Houseless는 정말로 다른 것일 수 있는가?

영화의 시작은 이렇다. 미국 네바다 주 엠파이어 탄광 지역에서 남편 ‘보’와 살아가던 주인공 ‘펀’(프란시스 맥도먼드)은 석고보드의 수요 감소로 인해 탄광과 공장이 폐쇄되자 그 지역을 떠날 채비를 한다. 우편번호 자체가 말소된 상태이기에 펀에게는 떠나는 것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남은 작은 밴 하나를 집 삼아, 미국 곳곳을 돌며 일을 하고, ‘노매드’의 삶을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과 만나 교류를 하며 펀은 생계를 이어간다. 정착된 삶이 아니라 자동차가 곧 집인, 밴에서의 삶을 택한 사람들이 가진 각자의 사정을 보며 우리는 이 영화의 메세지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애도’에 관한 이야기다.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아들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어 노매드의 생활을 택한 사람, 금융위기로 집을 잃고 노매드가 된 사람, 항암치료 대신 전국 곳곳을 떠돌며 여행을 하기로 택한 사람, 그리고 이 영화의 주인공인 펀, 그 또한 아직 남편의 죽음에 정당한 애도의 시간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밴을 타고 돌아다니는 삶을 계속한다. 혹은 그런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통상적인 의미의 ‘노매드’를 다룬 여타의 영화와는 조금 다른 노선을 택한다. 자연에게서 받는 위로, 도시와 삶의 구속, 타인에게 묶여 사는 것이 아닌 혼자일 때 느끼는 지극한 자유로움, 다시 말해 돈, 돈을 벌어야 하는 노동의 굴레와 그 굴레 속에서 벗어난 (혹은 벗어나려는) 노매드들의 용감한 선택 등. 보통의 노매드라고 하면 응당 떠올려야 할 소로우의 <월든>과 같은 평화와 안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노매드>에서의 노매드들은 일용직을 전전하며 종일 노동을 하고, 안전하게 차 댈 곳이 없어서 도로 위를 떠돌아다니며, 아마존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택배 포장 아르바이트를 매일같이 해야 하는 삶 (심지어 이런 일용직조차 구하기 힘들 때가 많다) 속에 놓여 있다. 이 영화에는 그런 종류의 낭만이란 거의 없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노매드로서의 삶에 대한 낙관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집을 떠난 펀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던 중 <노매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꽤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데, 이제 막 밴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펀이, 우연히 마주친 예전 이웃의 딸에게 듣는 질문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홈리스인거네요?” 라는  질문. 그리고 펀은 이렇게 대답한다. “홈리스(Homeless)와 하우스리스(Houseless)는 달라, 나는 하우스가 없는 거지 홈이 없는 게 아니잖니.” 나는 이 대답이 <노매드>의 핵심이라고 느꼈다. Home과 House의 차이. 

여기서부터 추가 질문이 시작된다. 홈리스와 하우스리스는 차이가 있는가? 집을 잃는 것은 가정을 잃는 것과 차이가 있는가? 가정이라는 의미의 홈(Home)과 문자 그대로 물리적인 의미의 집인 하우스(House)는 정말로 차이가 있을까? <노매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이 영화에서 ‘노매드’란 ‘집이 없는 자’임과 동시에 ‘가정이 없는 자’라는 뜻도 된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은 집에서 떠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하우스를 되찾아야 홈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에. 

역으로 생각해보자, 펀이 집을 잃은 이유는 네바다 주의 석고보드 생산 공장이 문을 닫아서다. 그곳에서는 더이상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펀은 네바다를 떠난다. 떠나면서 자신이 집(home)이라고 부르는 승합차, 밴 하나를 갖고 나오지만 밴이라는 그 작은 집마저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돈을 벌어야만 한다. 이 영화 속에서 펀의 가족이 등장하는 유일한 순간도 밴이 고장 나 그 수리비를 빌리기 위해 동생을 찾아가는 장면, 그 한 장면이다. 펀은 하우스를 유지하기 위해 떠나왔던 홈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는 없었다. (물론 돈을 빌린 뒤 바로 떠나기는 하지만.) 그러니까 <노매드랜드>에서 홈을 떠나거나, 혹은 홈을 되찾기 위해서 떠나온 사람들은 모두 하우스를 유지해야만 한다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하우스가 없으면 홈 또한 없다는 점, 그러므로 홈과 하우스는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는 게 이 영화가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진실이다. 영화 초입에 펀은 하우스리스와 홈리스는 다르다고 했지만, 지금 우리의 시대는 이미 하우스리스와 홈리스를 분리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노매드랜드>의 진정한 시사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홈리스와 하우스리스를 구분할 수 없는 시대. 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우스를 유지해야만 하는 시대.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의 노매드란 집을 등지고 길 위에서의 삶을 찬가하는 19세기 식의 유랑자, 혹은 20세기 식의 히피가 아니라 하우스를 유지하기 위해 아마존과 같은 대기업에서 택배를 포장 해야 하고, 감자공장에서는 끊임없이 삽으로 감자를 퍼다 날라야 하며, 햄버거를 굽고 감자튀김을 만드는 일을 계속해서 해야만 하는 21세기 식의 노매드다. 바람 구두를 신고 여행을 떠났다는 랭보 식의 보헤미안이나, 숲속으로 들어가 자연을 찬미하는 <월든>의 시대는 영영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노매드’의 포착을 <노매드랜드>는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잡아낸다. 감독 클로이 자오의 전작에는 언제나 미국 하층민들의 삶이 담겨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본주의를 정확히 겨냥한 고발성 메세지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로 <노매드>를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어쨌든 <노매드>는 우리의 홈이 인간에게서 인간으로 옮겨간다는 인본주의적 태도를 앞서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펀이 죽은 남편을 이 여정을 통해 떠나보내고, 새로운 홈인 데이브의 집으로 떠났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노매드>는 하우스/홈이 없던 사람들이 서로가 다시 서로의 집이 되어주는 결말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집은 물리적인 의미의 ‘하우스’로의 여정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홈은 하우스가 없으면 유지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무서운 사실은, 이제는 우리가 이런 사실에 대해 자각하거나 지적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아도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매드>가 자본의 흐름이나 속박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는 하우스를 위해 일해야 하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리 홈리스가 아니라고 외치더라도, 하우스가 없다면 노매드도 될 수 없는 것처럼. 

박채원 기자
onewonn@kart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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