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학습 비용 손실, ‘측정’될 수 없다.

새 학기를 맞이하는 3월 초,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새롭게 수정한 등교 지침을 발표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의 등교 규모를 최대한 확대하겠다는 지침이었다. 향후 거리두기 조정 여부에 따라 수정이 가해질 수 있는 사항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이와 같은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것이 교육부의 주장이다. 조희연 교육감 개인의 단독적인 결정만은 아니다. 최근 교육청이 서울시 거주 학부모와 교사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도, 거리두기 3단계 전까지는 전교생의 3분의 2를 등교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설문자의 70%를 상회하는 지지를 얻었다. 코로나19 확진자 수 감소를 위해 등교 제한을 우선시했던 지난해 3월과는 상반되는 여론이다.

물론 확진자 수와 방역 비용의 증가를 우려해 등교에 반대하는 여론이 완전히 사그라든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학년 학생의 등교 규모를 확충해야 한다는 학부모와 전문가 집단의 견해는 상당 부분 수긍할만한 지점이 있다. 큰 틀에서 볼 때, 이를 두 가지 논점으로 나눠 이야기할 수 있다.

첫 번째 논점은 명확한 과학적 근거를 갖추고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전세계에서 수집된 실증적 연구 자료들은 학교가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감염 안전성을 보장하는 공간이라는 점을 지목한다. 오스트레일리아 머독 어린이연구소, 독일 로베르트 코흐 연구소가 발표한 연구 결과들은 성인에서 고학년으로, 고학년에서 저학년으로 갈수록 코로나19로 인한 청소년들의 치사율과 감염률, 2차 감염률이 급격하게 저하되었다고 말한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명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유력한 가설들이 있다. 바이러스가 폐의 상피세포를 침범하는데 필요한 효소의 수치가 낮다거나, 아이들의 작은 폐가 성인보다 감염성 에어로졸을 배출할 가능성이 적다는 점 등이다.

두 번째 논점은 비대면 학습으로 대체될 수 없는 교육 공간의 소중함에 호소한다. 원격 교육으로 수축된 육체적 활동을 보충할 필요성 등이 이 소중함의 한 예시로 거론된다.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점은 따로 있다. 학교가 타인과 부대끼며 사회적 경험을 획득하는 장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첫 번째 논점과 달리 이 논의를 주장하는 일은 껄끄러운 난관에 부딪힌다. 청소년들의 감염률이 낮다는 점은 데이터를 통해 직관적으로 확인되지만, 교육의 중요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위협하는 바이러스를 저지할 방역선에 누수가 생길 가능성을 감수할 정도로 교육의 가치는 중요한가. 이 질문에 확답을 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매일 아침 열 시마다 보도되는 확진자 수는 거리두기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마련하지만, 교육의 효과는 즉각적으로 수치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한 해 동안 등교 봉쇄가 전세계적 합의를 형성할 수 있었던 상황의 배경에는 이런 딜레마가 자리하고 있었다.

루스벨트 이후 현대의 복지 국가는 국민들의 보편적 권리를 보장할 책임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그에 따라 어떤 시민적 권리를 보장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의 필요성도 동시적으로 부상되었다. 문제는 이것이다. 명확하게 계량할 수 있는 항목을 기반으로 설계되는 국가의 관료적 행정은, 수치화할 수 없는 사회적 권리의 중요성을 헤아릴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한다는 과제의 근본적인 난해함 앞에 지난 세기의 정치는 종종 무릎을 꿇어왔다.

물론 학생들의 등교 방지는 방역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제 국가는 이 불가피한 선택으로 외면받았던 가치들을 못 본 체할 수 없게 됐다. 측량할 수 없는 가치의 위기 또한 확연하게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OECD와 각종 선진국의 교육 전문가들은 원격 교육을 강제한 지난 한 해 동안 저학년 학생들의 사회성 감소, 교육 불평등, 게임 중독, 학력 저하가 심각한 수준으로 불거졌다고 말한다. 원격 교육에 따른 학부모들의 사회적 부담 증가도 간과할 수 없는 사안이다.

교육적 의의를 측정할 수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논증할 수도 있다. 일본의 학자 우치다 타츠루는 교육의 효과를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이유를 교육적 경험의 시간적 성격에서 찾는다. 그에 의하면 교육이란 언제나 사후적으로만 체감되는 시간적 사건이다. 학생은 지금 당장 아는 것이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학생은 교육자와 관계를 맺는다. 지금까지 알 수 없었던 지식을 습득한다. 이러한 경험은 모두 시간이 흐른 후에야 추인된다. 그 가치는 쇼핑몰에 진열된 상품의 가격, 혹은 일간지 언론이 쏟아내는 일일 코로나 확진자 수처럼, ‘지금’ 당장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수학적 지표로 환원될 수 없다. 그래서 우치다 타츠루는 단언한다. “배움이란 자기가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모르고, 그것이 어떤 가치와 의미와 유용성을 갖는지도 말할 수 없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1)

더 커다란 사회적 단위에 입장해, 주체의 지식과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타인의 현존을 깨닫는 것이 교육의 목적일 것이다. 이것은 타자에 대한 앎의 불가능성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윤리적 소명과도 맞닿는다. 그렇다면 손실된 학습 비용을 명쾌하게 셈한다는 것은 끝내 불가능한 정책적 기획이다. 코로나19는 우리 사회가 이 불가능성을 감수할 용기가 있는지 시험에 들게 했다.

교육의 경험, 얼굴을 마주보는 일상, 사랑의 감정…… 수치로 환산할 수 없음에도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불가결한 요소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바로 계량할 수 없다는 그 점으로 인해 소비주의적이고 행정적인 율법에 따라 작동하는 이 세계의 질서에서 외면당한다. 저학년 학생들의 등교 비중을 늘리겠다는 교육부의 결정은 지난 한 해 동안 이 사회가 방역을 위해 포기했던 가치들을 도외시하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할 것이다. 가시적인 데이터로 증명할 수 없는 가치들을 외면한다면, 그 가치의 상실은 증명할 수 없음에도 명백하게 체감되는 후과를 통해 엄습할 것이다. 프랑스의 작가 미셸 우엘벡은 말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이후, “세상은 전과 같을 것이다. 다만 좀 더 나빠진 채로.”(2)


(1) 우치다 타츠루, 『하류지향』, 김경옥 역, 민들레, 2013.
(2) Fiachra Gibbons, World Will Be Same But Worse After ‘Banal’ Virus, says Houellebecq, barrons.com, 2020. 05. 04.

김신 기자
sans_soleil@kart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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