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억하는 한 거인의 발자취

고 이강숙 총장님을 기억하며 

‘한국 음악학계의 초석’,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대 총장’, ‘KBS 교향악단 초대 총감독’, ‘소설가’, ‘음악 교육자’, ‘합창단 음악이있는마을 초대 단장’… 한 거인을 우리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기억한다. 그는 바로 확고한 신념 하나로 한국 예술계의 기반을 마련하신 고 이강숙 총장님이다. 

음악학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이 학교에 입학한 필자에게 그는 학문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가 떠나신 지금까지도 그가 이 분야를 공부하는 젊은이들 곁에서 올바른 학문의 길로 인도해주심을 느낀다. 이 자리를 빌려 그의 선한 영향력이 닿은 다른 곳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한다. 각자에게 스며든 그의 영향력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추억하며…

김민정 기자
kimj2000@karts.ac.kr

(기고 1)

이강숙 선생님을 보내드리며

처음 이강숙 선생님이라는 분을 알게 된 건 2000년, 그러니까 내가 13살 때 TV를 통해서였다. MBC에서 당시에 성공시대라는 프로그램이 있었고, 피아노를 너무나 좋아했던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피아노를 연습하기 위해 매우 노력했고, 이후 서울대 작곡과에 진학, 피아노로 전공을 바꾸고, 졸업 후 유학길에 올라 음악학을 공부하다 귀국하여 서울대 교수가 되었다. 안정적인 삶을 살았음에도 유학을 가지 않고도 세계적인 예술인을 길러보겠다는 사명감을 안은 채 그 좋은 자리를 버리고 고생길을 자처해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총장이 되었다. 그가 바로 이강숙 선생님이었다.

그때 당시 나는 피아노 배우기를 무지하게 싫어하다가 갑자기 신이 내린 듯이 피아노가 좋아지기 시작했던 때였기에 그 나이에 볼만한 프로그램이 아니었음에도 그 늦은 시간에 TV 앞에서 미동도 안 하고 봤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때 그 프로그램 안에서 합창단 음악이있는마을(이하 음마)도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세월이 흘러 14년 후에 여전히 인생에 대해 갈팡질팡했던 나에게 인생에 있어 큰 전환점이 되었던 합창단 음마 오디션을 보게 되었고, 합격해서 들어와서야 알았다. 이곳의 단장님이 이강숙 선생님이었다는 것을. 

원래 이곳에 처음 오면 이강숙 선생님께서 황금비율로 맞춘 득음주를 직접 주셨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 첫 뒷풀이 자리에서는 계시지 않았기에 나는 이건용 선생님께 득음주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2년여 뒤의 시간이 지나고 음마 20주년 기념으로 작곡가들이 쓴 창작곡을 연주하는 날 뒷풀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뵙게 되었다. 고령이셨음에도 당당하게 원샷하고 시작하시겠다며 소맥을 드시던 선생님의 모습은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1년 뒤 내가 30의 나이에 한예종에 입학하고 나서야 알았다. 그것이 선생님이 학교를 만드셨던 원동력 중 하나였다는 것을. 

작년에 벨기에 국왕 내외가 방한했을 때 왕비가 꼭 한 번 들러보고 싶다 하여 들른 곳이 바로 한예종이다.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후원자이기도 한 왕비가 본교입상자들을 보면서 너무도 궁금하여 와 보고 싶어 했던 바로 그곳. 이러한 곳이 설치령 하나만 가지고 피아노 없이 시작했다고 하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이 믿을까? 그걸 선생님은 해내신 것이다. 장관급 인사라 했지만 예산 한 푼 없는데 직급이 무슨 소용이랴? 높은 관료들에게는 호통도 쳐가며 예산을 따내기 위해 싸우시고, 실무진 공무원에겐 머리를 숙여가며 설렁탕과 소맥을 대접해가며 진심을 담아 설득하셨다. 우수한 교수진들을 섭외하기 위해도 부단히 찾아다니시며 설득하고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셨다. 그렇게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 인고의 과정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지금쯤 여전히 직장에서 맞지 않는 조직문화에 쌓인 스트레스를 푸느라 하루하루를 술로 보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2016년 음마에서는 선생님의 강연이 열렸다. 내용은 이러했다. “민족이 기록된 역사를 믿는 순간 그것은 정통이 된다. 소역사가 모이면 대역사가 되고 큰 흐름이 된다. 음마의 연주하는 모든 것들의 기록들이 쌓이면 음마에 속한 우리가 한국합창을 대표하는 캐치프레이즈가 생기고 그것은 음악의 본고장을 한국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건 바로 우리다. 한국 창작 음악을 계속 연주해가는 전통을 이어가야 한다. 대문자의 역사는 하나의 작은 캐치프레이즈로 출발한다.” 당시에 하셨던 이러한 골자의 특강은 내 마음을 매우 강하게 울렸다. 우리 사회의 큰 어른이 자신의 평생신념으로 삼아왔던 것들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데는 거창한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았다. 단어 하나, 어조 하나하나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음마와 한예종 사이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한국어에 가장 어울리는 창작 합창을 연주하는 단체라는 것과 유학을 가지 않고 이 땅에서 세계적인 음악가를 양성해 내겠다는 목표로 세워진 학교라는 것.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강숙 선생님이 계신다. 작년에는 서초동 캠퍼스의 크누아홀이 이강숙홀로 재개장했고, 선생님이 쓰시던 명패와 책상, 첫 월급으로 구매하신 스타인웨이 피아노 등을 로비에 비치하고 재개관식에는 선생님께서 참석하셨다. 근래에 들어 학생들에게는 이분의 업적이 기억되지 않는 것이 매우 안타까웠던 참이었다. 그 업적을 기리게 되는 일환으로 재개관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선생님의 그 열정과 관심이 아니었다면 우리학교는 설치령에 불과한 조문으로만 남았을지도 모른다. 선생님의 업적은 이제 우리에게 큰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이 학교에서 배우고 자란 이들이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할수록 선생님께서 남겨주신 유산은 더욱 살아 숨 쉬며 뻗어 나가게 될 것이다. 선생님. 먼발치에서 인사만 드렸었지만, 선생님께서 남겨주신 것들을 통하여 제 인생이 바뀌었고 오늘날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셨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 저희 꼭 만들어가겠습니다. 편히 잠드세요.

진윤수

자동차를 전공하고 회사에 다니면서 합창단 음마의 테너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활동 중에 늘 가슴에 품고 있던 지휘자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더는 안 되겠다며 사표 내고 9개월간 열심히 준비하여 2017년 서른의 나이에 한예종에 입학, 제2의 인생을 시작하였다.



(기고 2)

사랑하는 이름 앞에서…

‘나는 한국예술종합학교라는 단어만 보면 눈물이 나요. 꼭 사랑하는 연인의 이름처럼 말이죠…,’ 2015년 11월 전통예술원 특강을 마치고 댁으로 모셔다드릴 때 이강숙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나는 그 말에 더 눈물이 났다. 어쩌면 저렇게 외곬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얼마나 사랑했으면 이름을 보면 눈물을 흘리시는 걸까? 나는 그럴만한 이름을 하나쯤 가지고 있나? 너무도 사랑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도 더 주지 못해 그 이름 하나로 눈물이 나는 경지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강숙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1996년 2월이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이셨던 선생님을 만났고 이후 이분에게 홀려 준비가 거의 끝난 영국 유학도 포기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발전기금 재단 사무국장으로 직장을 옮겼다. 나는 제자가 아니었음에도 그때부터 2001년까지 총장으로, 2006년까지 석좌교수로 모셨고 내가 학교를 퇴직한 이후에는 합창단 음마 단장과 지휘자로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그러고 보니 25년 동안 스승으로 함께한 분이다. 나는 총장님보다는 선생님으로 불렀다.

설립 초기 한국예술종합학교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장동건이 다니는 학교’ 정도가 일반적인 인식이었고 학교명도 예술계 분들조차 이강숙 선생님 면전에서 한국종합예술학교로 불리도 해서 ‘여성제연구소’와 ‘문제여성연구소’는 전혀 다른 뜻이라는 선생님의 명언이 반복되기도 하였다. 그러니 장충동,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5층, 석관동, 서초동교사까지 역사는 탄생의 산고와 고비의 연속이었다. 그 전장의 맨 앞에 이강숙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은 자신을 바쳐 한국예술종합학교로 사셨다. 10여 년의 재임기간 동안 학교 건물 신축, 예산, 6개원 개원, 교수초빙, 새로운 예술교육기반을 완성하신 것이다. 장관급 국립대학 총장이었으나 학교를 위해서라면 직급이 낮은 공무원 앞에서도 머리를 조아렸고 학생들의 교육환경을 위해서라면 주무 장관과도 싸우셨다. 아마 국립대 총장의 위상을 과시하고 부여되는 권력을 탐했다면 이강숙 선생님은 그 많은 일을 이루지 못하셨을 것이다.

밥은 순대국밥, 콩나물 비빔밥, 술은 소주와 맥주를 탄 폭탄주 정도가 그분이 누리는 호사였다. 영혼은 높은 곳을 지향하셨지만, 입맛은 매우 촌스러우셨. 그러면서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으셨다. 선생님이 제조하신 폭탄주는 주당들에게는 인기가 좋아서 예술학교를 기억하는 분들에게는 예종주로, 합창단에서는 득음주로 이름을 날렸다.  

정년퇴직 후에는 총장 시절과는 다르게 사셨다. 석좌교수로 계셨지만 후임 총장에게 누가 될까봐 구석으로만 다니시고 옷도 허름하게 입고 다니셨다. 그러면서 원하시던 소설에 천작하여 <빈병교향곡>, <피아니스트의 탄생>, <젊은 음악가의 초상> 등을 발표하였다. 소설시장은 냉정했다. 음악가, 총장 출신 소설가란 호기심은 있었으되 지속적인 독자의 인기는 얻지 못했다. 그럼에도 계속 쓰셨다. 매년 겨울 강원도 원통 만해마을에서 3개월씩 칩거하며 외로움을 이겨내며 노트북 앞에서 소설을 쓰셨다. 

그 덕에 나이가 드시면서 시력이 많이 나빠지셨다. 사람 얼굴을 잘 못 알아보기도 하셨다.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작가가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도 어려웠을 터이니 어둠 속으로 잠기는 기분이셨을 것이다. 2017년 까지는 그래도 외출도 하시고 합창단 행사에 오셔서 강의의 함께 득음주를 나누기도 하셨고, 2018년 우리 부부가 퇴촌 인사를 하러 댁에 찾아갔을 때까지만 해도 걷고 대화하시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으셨다. 그러나 건강의 하향곡선은 빠르게 진행되어 2019년에 서울에 올라와 두 번 뵈었는데 몸이 많이 상하신 모습이셨다. 기어이 회복하셔서 내가 사는 고흥에 오신다 하셨고 2020 여름까지 통화를 이어가곤 했는데 9월에 책을 내며 축하의 글을 부탁하려 전화했을 때에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12월 초 출판된 책을 보내드렸고 답이 없으셨다. 불안했다. 12월 22일에 거장은 생을 마감하시고 영면에 드셨다. 

장례식장에서 참 많이 울었다. 도무지 영정사진을 바라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25년 동안의 인연을 정리하기도 불가능했다. 이후 한동안 멍 때리며 지냈다. 새해가 들어서야 정신 차리고 선생님을 추모하는 가사를 쓰고 음악원 출신 작곡자인 노선락 선생님에게 위촉하여 합창 곡 <기억 할게요>가 최근 완성되었다. 이 곡은 이강숙 생님을 기억하고 추모하려는 단체에는 조건 없이 쓸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선생님이 그리 사셨으니까…,    

선생님은 떠나셨는데 매화, 진달래, 개나리, 수선화꽃들이 어김없이 피고 있다. 어쩌나 나는  ‘이강숙’이라는 이름을 보면 눈물 날 것 같은데…,  

홍준철 

한국예술종합학교 발전기금 사무국장, 전통예술원과 공통교과 합창 강사를 하였다. 이강숙 선생님의 아호인 낙촌(樂村)을 풀어서 이름 지은 합창단 음마 22년 동안 지휘하였고 성공회대학교 대학원 대우교수로 활동하다 60세에 전남 고흥으로 퇴촌하여 밭농사와 글 농사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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