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영역: 눈 뜬 자는 어떻게 맹인이 되는가?

지난 세기는 알튀세르주의가 영화 담론을 쥐고 흔들었던 시대였다. 까이에 뒤 시네마에 대문자 이론의 영향이 가장 짙게 드리우던 시대(붉은 표지의 까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은 영화를 이데올로기 장치의 일환으로 간주하고 극장을 플라톤의 동굴로 비유함으로써, 관객 연구를 자본주의 소비자 연구로 둔갑시키는 데 성공했다. 영화 이론에 대면하는 영화 평론가의 태도는 이론으로부터 수사를 받아들이되 이론에 전적으로 영화의 해석을 맡기지 않는 경향과 이론을 철저히 무시하는 저널리즘적 경향으로 나뉜다. 2000년대 후반부터 몰아닥친 문화 연구는 기호학의 틀에 맞춰 영화를 문화적 기호로 잘게 조각내기 일쑤였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문화 비평가 혹은 문학 평론가인 이택광과 신형철, 문강형준 등은 시네필 이너서클에서 폐기처분당해야 할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그렇다고 영화학계가 새로운 이론을 제시한 것도 아니었다. 아카데미에서 탈식민주의와 문화연구는 이종교배를 반복하며 영화를 텍스트라는 미명 하에 난도질하는 데 일조했다.

영화 이론의 황혼기라고 할 수 있는 시대에 다시 영화 이론, 특히 맑시즘에 기댄 영화 이론을 꺼내 드는 건 미친 짓에 가까울 것이다. 영화에 대한 시각을 쇄신하지 못한다면, 맑시즘 영화 이론은 훈계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알튀세르주의가 불러일으킨 논쟁이 여전히 영화 보기의 방식을 새롭게 해석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그것은 영화를 보는 관객과 스크린과의 관계를 하나의 문제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이 스크린과 대면하면서 발생하는 사건은 무엇인가? 오늘날 영화를 비롯한 시각 문화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중의 하나인 이 질문을 정식화한다면 아래처럼 말할 수 있을 게다.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질문이 있다.

관객은 어떻게 주체가 되는가?

호러 무비로서 이데올로기론

맨 처음 떠올려야 하는 이름은 길베르토 페레즈의 <물질적 유령 material ghost>다. 95년도에 출간된 이 책의 서문은 영화 비평/이론의 백가쟁명과 페레즈의 개인사와 절묘하게 엮고 있다. 페레즈가 MIT에서 물리학 박사 과정을 밟은 후에 영화 비평을 다시 공부한 영화학자에다가 그가 몸담은 영미 아카데미의 경향이 실증주의인 만큼, 프랑스 이론에 대한 거부감을 <물질적 유령>의 서문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지젝이 대표하는 라캉주의 영화학계와 데이빗 보드웰로 대표되는 포스트-이론의 대결이 남긴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라캉주의 영화 이론은 전기와 후기로 분기하는데, 전기는 관객이 스크린와의 대면을 통해 주체로 형성되는 과정을 다뤘다면 후기는 영화 텍스트(혹은 스크린)가 관객을 응시함으로써 발생하는 주체의 파열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선 실재 개념과 응시 개념이 중핵이 되는 후기 라캉보다는, 관객과 스크린의 관계를 성찰하는 라캉에 치중하고 싶다. 앞서 말했듯 관객에서 주체로의 이행은 그렇게 쉬이 해명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장 루이 보드리에 따르면 관객은 스크린을 바라봄으로써 이데올로기의 장 안으로 진입한다. 이에 데이빗 보드웰은 만약 관객이 극장 안에서 주체로 호명 당한다면 다른 관객과 마찬가지로 극장에 입장하여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상태인 이론가는, 어떻게 이러한 호명상태를 분석하는 글을 쓸 수 있는지 반문한다. 보드리의 주장대로라면 이론가 역시 플라톤의 동굴에서 그림자를 보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관객이 자신을 주체로 인식하는 순간이 존재하지 않다는 지점을 염두에 둔 지적이다. 그리하여 관객이 주체로의 이행을 인지하고 있는지 혹은 관객은 극장에 들어선 순간에야 주체가 되는지가 논쟁의 쟁점이 된다. 논쟁을 시작하려던 찰나에 지젝을 읽은 이는 모범답안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펼쳐 들기 전에 데이빗 로버트 미첼의 <팔로우>를 주체의 동역학에 대한 우화로 간주하여 공포 영화의 내재적 문법과 주체 이론의 상동성을 살펴보자. 공포 영화의 문법을 주체 이론에 비교하는 건 억지 비유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공포 영화에서 언제나 보는 이와 대상의 관계가 서사를 조직하는 내재적 원리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이를테면 메타-호러 무비인 <팔로우>의 스토리는 떠올려 보라. <팔로우>의 원제는 <It follows>이다. 영화는 원제대로 그것(It)이 따라오는(Follows) 이야기다. 물론 <팔로우>는 공포 영화답게 교외에 거주하는 백인 금발 여성이 주인공이고 그녀가 중심인 틴에이지 멜로드라마이기도 하다. <팔로우>를 공포 영화의 역사나 미국 중산층에 관한 서브 텍스트에 비끄러매는 것은 영화를 매혹적이고 풍부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팔로우>의 공포는 앙상한 구조에서 나온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그것(It)은 다양한 모습으로 육화되어 주인공을 따라온다. 공포는 그것(It)이 어떤 모습으로 프레임의 어느 위치에서 다가올지 모른다는 데서 발생한다. 주인공은 저 멀리서 보이는 사람이 그것(It)인지를 알아야만 하는데, 관객도 이 시선의 게임에서 예외일 순 없다. 주인공은 관객과 함께 그녀의 친구들이 보지 못하는 그것(It)을 본다. 눈이 밝은 관객은 주인공보다 더 먼저 그것(It)을 볼 수 있으며, 둔감한 이는 바로 앞까지 다가오는 그것(It)을 놓치기도 한다. 흐릿한 형태의 그것(It)이 다가오는 광경을 주인공보다 빨리 발견했을 때, 천천히 움직이는 형상이 그것(It)임을 별안간 알아차렸을 때, 시선이 가닿는 곳에서 주인공의 인지와 관객의 인지가 어긋나는 순간을 <팔로우>는 놓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팔로우>는 주인공이 자신을 따라오는 그것(It)을 발견하고 이에 도망치는 연쇄 과정에 관한 이야기다.

더불어 <팔로우>를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 중의 하나는 섹스가 그것(It)이 따라오게 만드는 까닭이라는 것이다. 섹스를 하면 그것(It)은 가시화되고 주인공은 그것(It)에서 도망쳐야 하는데, 여기서 섹스는 마치 ‘호명’처럼 작용한다. 공포 영화의 내재적 문법이란 비가시적이고 비존재적인 대상이 가시화되면서 초현실적 존재로 등장하여, 주인공과 대면하면서 발생하는 사건을 다루는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비가시적인 대상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은 주인공을 죽음에 대면하게 한다. 이것은 마치 관객이 주체가 되는 과정을 연상케 한다. 관객은 스크린에서 무언가를 보는데, 그것은 남성적 시선을 체현한 서사의 인물일 수도 있고 자본주의로의 예속화를 구현한 형상일 수도 있다. 새하얀 스크린에 비치는 형상은 관객을 완전히 사로잡으면서 극장을 플라톤의 동굴로 만든다. 과장을 보탠다면 모든 공포 영화는 실상 알튀세르주의 영화 이론의 원리를 이미지와 서사로 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포 영화와 주체 이론의 관계가 유비적이라면, 지젝의 ‘이미 알고 있는 주체’에 걸맞은 우화도 있을 테다. 그에 대한 예시로 구로사와 기요시의 <절규>를 들고 싶다. <절규>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큐어>의 정련함과는 다른 길을 선택한 작품이다. <절규>의 내러티브는 기이한 모습으로 뒤엉켜 있다. 영화는 한 남자가 물웅덩이에 붉은 옷을 입은 여자의 얼굴을 처박아 숨지게 하는 걸로 시작한다. 물웅덩이에 얼굴을 처박아 숨지게 하는 이 살해 방법은 다른 이들에게 전염되어, 마치 연쇄 살인처럼 희생자를 낳는다. 일련의 연쇄 살인을 추적하는 형사 요시오카는 첫 번째 살인을 조사하다, 점차 본인을 범인으로 특정하게 되는 증거를 발견한다. 요시오카는 붉은 옷의 여자를 만난 기억도 당일에 그 장소에 있던 기억도 없지만 본인이 범인이라는 증거가 속출하자 불안에 떨게 된다. 요시오카가 이제 붉은 옷을 입은 여자에 관한 꿈을 꾸고 환영을 본다. 요시오카가 범인인지 아닌지는 영화의 맥거핀이다. 요시오카는 무의식중이라도 범죄를 저질렀을까, 아니면 그는 단지 환상에 시달릴 뿐일까? 

<절규>의 맥거핀에서 즉각적으로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냉소적 주체가 떠올랐다. 한국 인문학계에 10년을 사로잡았으며 영화 비평의 한순간을 장식했던 대목을 인용하자면,

이데올로기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정의는 아마도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아주 유명한 문장일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행하고 있다.”(61)

냉소적인 주체는 이데올로기적인 가면과 사회현실 사이의 거리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면을 고집한다. 따라서 슬로텔디즈크가 제시한 공식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을 하고 있다.” 냉소적인 이성은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 그것은 계몽된 허위의식의 역설이다.(62)

데이빗 보드웰이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영화론을 논박할 때 그는 이데올로기=허위의식이라는 개념을 논리의 핵심으로 삼는다. 하지만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은 이데올로기=허위의식의 맹점을 공략한다. 이를 영화 이론에 적용하자면, 관객은 스크린에 등장하는 형상을 봄으로 인해 이데올로기적 주체가 된다고 할 수 없다. 그는 이미 이데올로기적 주체이며 언제나 이데올로기적 주체이다. 영화를 보는 행위는 사후적으로 이데올로기를 재확인하는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연속 선상에서 말하자면, <절규>의 요시오카는 처음부터 본인이 살인자임을 알고 있었고, 이를 유령이라는 매개를 통해 확인하는 것일 뿐이다.

즉 스크린은 이데올로기의 근원이 아니라 매개이다. 전통적인 이데올로기 비판의 효력이 끝난 오늘날에, 단순히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는 관객성의 일부를 말소시키는 행위와 동일하다. 누군가는 라캉을 참조한 영화 이론의 주체와 스크린의 관계를 70년대 반공 영화와 관객의 관계로 격하한다. 마치 관객은 자본주의의 교묘한 간계에 속는 멍청이 혹은 엄숙한 훈시를 듣는 따분한 학생인 것처럼 보이기 일쑤다. 하지만 관객을 상식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일반인으로 상정해보자. 포스트-이론의 논자가 으레 생각하듯 일반인A는 무지의 상태로 극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는 여타 이데올로기 장치를 경험하고 이를 기억하는 주체A이며 스크린은 그의 기억을 재확인하는 장소에 불과할 뿐이다. 마치 요시오카가 본인의 기억(혹은 일본이라는 국가의 기억)을 유령을 통해 확인하는 것처럼. 만약 영화를 이데올로기 장치로 간주한다면, 극장 안에 있는 관객은 언제나 이데올로기를 추체험하는 주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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