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랜드, 가속주의의 피카레스크 1

이건 사실도, 팩션도 픽션도 아니고…

유리창으로 눈이 세차게 내리는 풍경이 보였고, 닉 랜드는 주저앉듯 휘청거렸다. 방에 있던 이들은 하나씩 자리를 떴다. 로빈 맥케이가 회고하는 CCRU의 마지막 장면은 다소 낭만적으로 윤색한 감이 없지만, 그 이후로 그들이 CCRU의 이름으로 다시 재결합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맥케이의 낭만적 윤색은 타당한 뉘앙스를 지닌다. 내가 닉 랜드의 이름을 접한 건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후보로 나와 대안 우파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릴 때였다. ‘닉 랜드’라는 평범한 이름의 소유자가 무시무시한 이름의 ‘암흑 계몽’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듣자 그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랜드는 몰드버그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는 커티스 야빈과 함께 대안 우파의 핵심인물 중에 하나였으나, IT 분야에서 사업가로 명성을 쌓은 야빈과는 달리 프랑스철학을 전공한 철학자로 대안 우파에선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내가 그의 이름을 검색하다 발견한 글이란 한 우익 사이트에서 활동하던 기이한 우파가 ‘암흑 계몽’에 대해 정리한 글이었다. 그 정도로 닉 랜드에 관한 관심은 한국에서 찾기 힘들었다(최근 출간된 <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에서 그의 이름이 간략히 언급된다). 프랑스 철학을 전공한 랜드의 우파로의 전회는 영미권 현지에서도 보기 드문 현상이었다. 

그러나 비단 랜드는 대안 우파에 한정하기에는 스펙트럼이 훨씬 더 복잡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랜드는 누구인가? 

이 글은 랜드의 프로필을 간략히 소개하는 데 방점을 둔 터라, 랜드의 이력을 잠시 훑어보려고 한다.  hermix라는 철학 팟캐스트를 운영하고 있는 메타 노마드(meta-nomad)가 수집한 닉 랜드 연보를 보면, 랜드의 전기적 사실이 스케치 되어 있다. 랜드의 초창기 이력은 불투명하다. 1992년에는 ‘절멸에 대한 갈증’이라는 제목의 바타유 연구서를 낸다(해당 저작은 단일 주제에 대한 랜드의 유일한 저작이다. <Fanged noumena>는 그의 논문과 아티클을 모은 모음집이다 ). 그는 1980년대 말 워윅 대학으로 와, 새디 플랜트와 CCRU(the Cybernetic Culture Research Institute)를 결성했다. 이때부터 랜드는 영미의 대륙철학계에 일종의 도시전설처럼 구전되는 CCRU 활동을 시작한다. CCRU에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마크 피셔, 사변적 실재론의 물결을 출범시킨 장본인 중의 한 명인 이아인 해밀턴, 마찬가지로 사변적 실재론과 가속주의에 관한 주요 저작을 출판한 어바노믹(urbanomic)의 로빈 맥케이, 오톨리스 그룹으로 터너 상을 후보에 오른 코토 에슌, 베리얼의 <Untrue>를 발매한 하이퍼덥의 코드 9  등이 속해 있었다. 그들은 철학적 개념을 픽션화한 후, 이들을 철학적 세계관 내로 증폭시켰다. 

랜드는 CCRU 그룹의 핵이었다. 특히 연인이자 동료로 같이 활동하던 새디 플랜트가 CCRU를 떠난 후에 랜드의 영향력은 더 강해졌고, 그를 중심으로 더 기괴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숫자가 오컬트적인 방식으로 자가증식하는 누모그램이나 픽션이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어서며 초과적인 마력을 발휘한다는 하이퍼스티션은 연금술적으로 증폭되기 시작한다. 한때 랜드의 학생이었던 이가 프로스펙트 매거진에 기고한 내용에 따르면 워윅 대학에서 매달 이뤄지는 컨퍼런스에서 랜드는 “쥐를 합리성에 다시 집어넣기”라는 제목의 발표를 했다고 한다. 그는 흑사병를 주제로 삼으면서, 흑사병에 의해 사망하는 인간들이 아니라 흑사병을 운반하는 쥐에 관심을 쏟았다. 인간성 바깥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 이는 랜드를 묘사하는 캐리커처로 활용되곤 한다. 대안 우파로서 활동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랜드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인간성 바깥으로 탈출을 꿈꾸고 있다.   

“인간안보시스템은 망상에 의해 구조화된다. 보호받고 있는 것은 인류라는 어떤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환상적인 정체성의 구조다. 인간은 유기체로서 로봇에게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갖는 유기체로서의 자기 이해는 주변 네트워크 지능의 특정 한계를 넘어서 유지될 수 없다.”

90년대가 지나가면서 CCRU는 점차 허약해지기 시작한다. 맥케이의 회고에서 쇠퇴의 기미는 눈에 띄게 강조된다. 당시 실의에 빠지고 신비주의에 심취하기 시작한 랜드는 메스 암페타민을 흡입했다고 추정된다. 각성제를 복용한 철학자. 각성제의 철학이라고? 물론 그가 각성를 복용했건, 복용하지 않았건, 독자들이 그의 글에서 각성제를 떠올리는 이유는 랜드의 글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철학적 사고를 끝 간 데로 밀어부치는 사유의 속도였다. 영국의 철학자 사이먼 크리츨리는 랜드와의 만남을 아래와 같이 회고한다. 

크리츨리는 랜드를 에섹스 대학에서 하이데거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쓰던 학생으로 기억한다. 그의 눈에 비친 랜드는 비-데리다적 흐름을 이끈 인물이다. 

 “워윅 대학의 길 위에는 조르주 바타유, 필립 K. 딕,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를 한 데 뒤섞은 칵테일과 다양한 화학물질로부터 흘러나오는, 무언가가 분명히 비-데리다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 당시부터 랜드의 평가는 극과 극을 오갔는데, 크리츨리처럼 랜드에 대해 호의적인 이가 있는 반면, 존 밀뱅크(한국에도 그의 “신학과 사회이론”이 번역됐다) 같은 걸출한 신학자는 랜드(와 그가 바타유에 대해 쓴 저작)를 쥐새끼만도 못한 학자로 간주한다. 이같은 상반된 태도, 누군가는 그를 찬양하고 옹위하지만, 누군가는 그를 학술적 쓰레기, 개가 플라스틱을 먹고 토한 토사물로 취급한다. 물론 랜드는 자신에 대한 조울적인 반응을 즐겼다. 그가 아카데미에 품는 적의는 이로부터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크리츨리는 랜드의 <Fanged Noumena>를 “이를 일종의 정당한 복수”로 간주한다. 랜드는 아카데미에 기생하는 전문 철학자들에게 해고당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어제도, 오늘도 그렇듯 사유를 포기한다. 왜냐고? 그들은 팽팽하기 부풀어오른 학문적 안일함을 제 몸을 두른다. 랜드는 달랐다. 크리츨리는 “항상 절대적인 한계에 대해 사유하고 나서, 이를 얼마나 더 맹렬히 밀어붙일 수 있는지 보고 싶어 하는” 랜드의 욕망에 감탄했다고 술회한다.

기이한 이들은 아카데미에서 결코 자리 잡지 못한다. 그들은 학계에서 따가운 눈총을 받을 뿐 아니라 엄격함이라는 명목에 밀려 사라진다. 워윅 대학의 철학과는 1990년대 후반 랜드를 학계에서 밀어내기 시작한다. 엄격함은 사후경직의 아종으로서 역사적으로 유래 깊은 학문적 질병이다. 이 질병은 닉 랜드의 학문적 경력을 절벽으로 떨어트리고 만다. 그러나 랜드에게 학문적 죽음은 지하에서 그의 영향력을 더 거대하게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마크 피셔는 “닉 랜드는 지난 20년간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인가?”라는 글을 통해 자신과 랜드가 맺었던 관계를 되짚어 본다. 어쩌면 이 글은 피셔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걸출한 저서를 통해 학자로서 명성을 쌓기 시작한 이후, 자신을 구성했던 지성적 근원 중 하나를 명시적으로 소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랜드는 학계에서 성공하지 못했지만, 상아탑 맨 끝 지하에서 자신의 동료들을 산파시켰다. 

내가 랜드와의 만남을 회고하는 크리츨리의 글에서 가장 흥미롭게 생각했던 부분은 아래와 같다. 

“닉의 약점은 그의 강점이었다. 유혹. 이것은 그가 제자를 배출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말 놀라웠다. 만약 당신이 워윅에 가서 강연을 하고 나면, 닉과 비슷한 점퍼를 입고 있고, 그와 똑같이 ‘언어적인 틱’에 가까울 정도로 빠르게 토론을 이어가는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을 것이다.”

피셔는 코토 에슌의 입을 빌려 랜드를 타인들을 전염시키는 매개체로 바라본다. 모두를 제 목소리 안으로 구겨 넣으며 그들을 물들이는 악마. 특히 그들이 청년일 경우, 랜드가 발휘하는 유혹의 힘은 대단히 컸다. 맥케이나 피셔, 에슌 그들 모두가 랜드를 제 사상과 정신의 근원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랜드가 지금 대안 우파의 사상적 지주가 된 것도 그가 갖고 있는 유혹술 덕분이다. 그럼 랜드에게 유혹당한 이들은 도대체 왜 그에게 매혹당한 걸까? 

이제부터 그가 사상을 갈가리 찢고 붕괴시키며 만든 그를 신봉하는 청년들의 마음에 남긴 흔적의 정체를 살펴보자.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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