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배지근’해지게 들어본 적 있니?: 『마술 라디오』

▲『마술 라디오』 Ⓒ한겨레출판

『마술 라디오』 속 9번째 이야기에 등장하는 강장군 할머니는 말한다. 이 세상이 어떻게 이 세상이 되었는지 들을 때면 귀가 ‘배지근’해진다고. 귀가 배지근하다라는 말은 제주도 사투리로, ‘어떤 말이 아주 귀에 쏘옥 들어온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는 보고 싶은 사람을 바로 영상통화로 볼 수 있다. 한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도 궁금한 게 생기면 언제든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 이 세상이 왜 이런 모습이 되었고, 그 사람이 왜 그렇게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많아졌다. 그러나 방법이 편리해졌다고 이해가 덩달아 쉬워진 건 아닌가보다. 우리는 살면서 눈과 마음에 쏘옥 넣어 상대를 바라본 적이 얼마나 될까?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신을 잊어버리게 될 만큼 상대에게 푹 빠져버린 때가 일 년에 몇 번이나 될까? 너무 재빠른 리액션과 언제 어디서나 소통할 수 있다는 오만이 점점 눈과 귀를 굳게 했다.

그 와중에 만난 책 『마술 라디오』 속 사람들의 삶은 동화처럼 느껴졌다. 이 책의 부제는 ‘오래 걸을 때 나누고 싶은 이야기’다. 작가가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인생이라는 길을 오랫동안 걸어가는 우리에게 나누고 싶단다. 이 책의 저자이자 CBS 라디오 PD인 정혜윤은 일상 또는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의 얘기를 듣는다. 혹은 취재차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한다. 정혜윤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궁금해지는 사람이 생긴다.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신기하다고 하는 어떤 사람. 정혜윤은 그런 사람을 곧장 찾아간다. ‘더이상은 사람의 삶을 아이템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정혜윤은 좋은 이야기를 많이 가지고 있다. 우연과 인연이 만나 수집한 이야기들을 다시 자신의 친구들에게 전한다. 힘이 되는 이야기를 힘을 잃은 친구들에게.

정혜윤은 수많은 주파수를 소유하고 있는 기지국인 셈이다. 어느 채널로 돌려놓아도 어떤 이야기든 포착하고 다시 송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이 책은 정혜윤의 경험을 담았지만 정혜윤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훨씬 많이 들린다. 책 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너무나 고단한 삶을 살았다. 동화책에서는 주인공이 겪는 고통이 마술 같은 일로 결국에는 잘 해결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들이 동화처럼 다가온 이유는, 슬픔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정혜윤과 그가 만난 사람들의 얼굴이 마술 같았기 때문이다.

성남의 한 재래시장에서 야채를 파는 ‘경숙이 언니’는 우울증을 이겨낸 자신만의 세 가지 방법을 전한다. 그 중 두 번째가 동화책을 읽는 것이다.

“어려서 아이들에게 읽어주던 것들을 다시 꺼내서 읽기 시작했어요. 그러면 어린애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던 엄마의 마음이 다시 찾아와요. 동화책 읽을 때 제 자식 잘못되라고 읽어주는 사람 없잖아요. 제 자식 잘되길 바라는 사람은 자기 삶도 대충 살지 않잖아요. 내가 이러면 안 되잖아 생각하잖아요. 피곤해도 힘내잖아요. 그 마음이 살아나더라고요.” (p.293)

언젠가 나는 깨달았다. 고통 자체는 내 정체성이 될 수 없다. 사실 그게 조금은 떨떠름하기도 했다. ‘나는 그런 일까지 겪어낸 사람이야’라는 생각이 풍랑같은 삶 속에서 버팀목이 될 줄 알았다. 인생에 날벼락같은 일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자신의 정체성은, 고통 후에 어떻게 회복했는지가 말해줄지도 모른다. 많이 맞아봤다고 맷집이 생기는 게 아니다. 내가 겪은 슬픔을 달랜 후 힘을 얻을 아름다운 이야기를 찾아야 한다. 다행히 우리에겐 먼저 힘들게 살고 난 사람이 말해주는 따뜻한 이야기들이 널려있다. 이제 해야할 일은 귀가 배지근해지게 들어보는 것이다.

김가은 기자

gaeun0826@kart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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