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우리였던 어떤 것

-이미래 개인전 《캐리어즈(Carriers)》에서의 캐리어-

코로나19의 여파로 많은 전시 공간이 문을 닫은 가운데, 종로구의 아트선재센터에서 재미있는 세 개의 개인전을 만나게 되었다. 이번 연재는 세 개의 글을 통해 세 개의 전시 각각을 살피면서 신체와 테크놀로지, 매체의 문제를 어렴풋하게나마 살피고자 한다. 첫 번째 전시는 이미래 개인전 《캐리어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장 27절)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창세기 9장 6절)

성경에 따르면 인류는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고 한다. 성경 전체에 걸쳐 산발적으로 등장하는, 인류가 신의 형상을 닮았다는 말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우리의 물질적 신체, 즉 손이 있고 발이 있는 모습, 이목구비가 갖추어진 살의 모습이 신의 ‘실제’ 형상을 닮았다는 뜻일까. 아니면 언어로 대표되는 우리의 이성이 신의 로고스와 닮았다는 뜻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동정심이나 사랑 같은, 우리의 도덕과 감정이 신의 자비를 닮았다는 뜻일까.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 창세기 9장 6절은 인간의 물질적 신체가 신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서로를 함부로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닮았다’에 대한 의문은 곧 ‘신의 형상(Imago Dei)’이라는 단어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형상이란 물질적 신체인가, 비물질적 정신인가, 그 모두를 합한 다른 어떤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기능인가. 이 논의는 현대 신학에서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창세기 9장 6절의 교훈과는 달리 우리의 물질적 신체가 신의 직접적인 형상과 닮았다는 의견은 상대적으로 그 입지가 좁아지고 있고, 우리가 신의 무엇을 닮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것이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는 듯하다. 어쨌든, 신은 당신의 형상대로 우리를 만들었다. 이는 ‘기독교의 주장이 과연 옳았다’ 같은 뜻은 당연히 아니다. 

창조설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신이 당신의 형상대로 우리를 창조한 과정은 동시대 인간의 물질적 신체에 대한 고민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신은 우리의 마음, 정신, 영혼보다 물질적 신체를 먼저 빚었다. 이 물질적 신체의 재료는 흙이다. 조각에 사용되는 재료와 똑같이 말이다. 우리의 물질적 신체는 땅의 짐승이나 공중의 새처럼, 또 미술관에 전시되는 어떤 조각처럼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신체에 불어넣어진 ‘생기’가 떠나면 흙으로 되돌아간다. 이는 생명이라고 여겨지는 것에게 고유한 것이다. 그 생기가 우리의 물질적 신체를, 우리 외에도 다른 존재들의 신체를 움직인다.

지난 9월 아트선재센터에서 개최된 이미래의 개인전 《캐리어즈》의 전시장에는 우리의 물질적 신체와 닮은 것 같은 몇 개의 조각들과 〈잠자는 엄마〉(2020)라는 제목의 짧은 영상 작업 하나, 그리고 몇 점의 드로잉이 함께 놓였다. 〈잠자는 엄마〉를 기점으로 할 때 전시는 두 개의 공간으로 구획되어 있었는데, 한 쪽은 공장을 연상하게 하는 두꺼운 산업 재료 벽을 배경으로 했다. 이쪽에는 〈누워있는 모양〉(2020)과 〈캐리어즈〉(2020), 〈캐리어즈를 위한 콘크리트 벤치〉(2020)가 군데군데 놓여 있었고, 벤치는 작품 감상을 위한 관객의 위치를 설정하려는 듯 보였다.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캐리어즈〉다. 이 조각은 그 밑에 하수구 뚜껑으로 덮인 배수 장치를 바닥으로 하고 천장으로부터 길게 매달려 있었는데, 기계에서 날 법한 소리를 내며 조각에서 흘러나오는 액체들이 그곳으로 빠져나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전시의 서문과 보도 자료들이 일관성 있게 묘사하는 것처럼 이 조각들은 동물의 내장 기관, 즉 앞서 여러 차례 언급한 우리 물질적 신체의 내부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한 유사성은 이 조각들이 정육점의 고기처럼 걸려 전시되었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것의 이미지가 우리의 물질적 신체와 비슷해 보여서일 수도 있고, 그것의 색상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닮음의 궁극적 요인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조각과 신체 양자 모두가 일종의 기계이며, 그렇기 때문에 다른 무엇인가를 위한 미디어라는 데에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캐리어(carrier)’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캐리어는 독립적으로는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운송, 유통의 수단을 가리키며, 그러한 점에서 우리가 통상 ‘미디어(media)’ 혹은 ‘매체’라고 부르는 것과 닮아 있다. 전시의 서문은 캐리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캐리어(carrier)’는 사용할 수 있고 무엇인가를 담아낼 수도 있는 어떤 것이다. ‘캐리어’는 임신한 여자를 의미하기도 하고 무엇인가를 옮기는 수단을 의미하며,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사람일 수 있고, 혈관, 용기(容器), 교통수단을 지시할 수 있다. (…)”(각주1) 미디어의 어원이 ‘중간’ 혹은 ‘사이’인 것을 생각해 볼 때, 미디어는 서로 다른 두 점을 연결하고 그 사이에서 정보를 전달하는 일종의 통로이며, 다른 의미를 위해 후방으로 물러나야 하는 수단, 방법, 매체를 가리킨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의 몸 또한 일종의 미디어다. 우리의 몸은, 앞서 짚었던 것처럼, 생기를 담는 저장 매체이며 삶의 경험이 적히는 기록 매체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사회적 활동을 위한 소통 매체로 사용하는 동시에 나를 드러내기 위한 표현 매체로 사용한다. 〈캐리어즈〉가 동물의 내장 기관을 연상시킬 때, 어떤 생명체의 물질적 몸이나 그 내부를 닮았다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물론 외연(appearance)의 차원에서 그러하며, 액체의 순환으로 구성되는 생물학적 심혈관 메커니즘의 차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는 캐리어(조각)와 신체, 기계 사이에 존재하는 모종의 일치를 겨냥하는 말이다. 이들은 독립적으로는 어떤 의미를 지니지 못하거나 지니지 않기 때문에, 항상 정확히 설명될 수 없는 부분, 소거될 수 없는 부분이 내재하고 있다.

우리의 물질적 신체가 기계와 비슷하게 작동하며, 더 나아가 그것이 우리 신체나 감각의 확장이라는 것은 문장으로 옮겨 적기에도 새삼스럽다. 많은 커뮤니케이션/매체 연구가 짚어냈듯이, 테크놀로지의 응축물인 기계는 우리 신체의 기능 일부를 분리하여 외화하고 물화한 것이다.(각주2) 그래서 기계는 신체처럼, 또 매체처럼, 홀로 있을 때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어떤 의미도 지니지 않는다. 기계는 종이를 만드는 기계, 청소하는 기계 등과 같이 그것의 산출물과 맺는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얻는다. 아니, 의미를 얻는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매클루언의 적절한 지적처럼, 그와 같이 내용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매체야말로 ‘순수한 정보’다. 즉 이미래의 〈캐리어즈〉에서 미메시스 되는 것은 물질적 신체를 가리키는 유물론적 차원도, 비슷한 작동 방식이 보여 주는 기능적 차원도 아닌, 순수한 정보로 반짝거리는 우리 몸의 존재론적 차원인 것이다.

전시장의 다른 한편은 어둑한 앞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기둥에 걸린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2020)이 있고, 커미션 드로잉이자 트레이싱지에 그려진 아이반 쳉(Ivan Cheng)의 〈부자를 먹어치워라〉(2020)와 철판에 그려진 두 점의 〈부자를 먹어치워라〉(2020)가 걸려 있다. 〈여자 기둥〉(2020)은 전시의 출구 근처에 놓인다. 이쪽에서는 여러 개의 〈부자를 먹어치워라〉가 생각해 볼만한 작업이다. 철판 위에 쓰인 글씨는 그 위에 투명하면서도 불투명한 트레이싱지를 놓고 연필로 다시 쓰인다. 여기서 트레이싱지는 항상 우리의 몸을 감싸고 있는 ‘의미’라는 피부, 그리고 샤먼이 세계와의 소통을 위해 아주 얇게 저며내었다는 피부와 공명한다. 

다른 관점에서, 부를 먹어치움으로써 없애려는 공포는 우리의 외화된 신체ㅡ기계를 바라보는 공포와 연결된다. 이미래는 이를 보레어필리아(vorarephilia)로 일컫고 있는 듯하다.(각주3) 이를 경유하여 다시 〈캐리어즈〉로 돌아가 보면, 이 조각이 우리와 닮았다는 아까의 친근감은 온데간데없고, 싸늘한 소름만이 그 자리에 있다. 그것은 원래 우리였지만 우리의 몸에서 확장되어 외화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은 우리가 아닌 어떤 것이다. 이제 나는 그것이 나와의 거리를 소거하기 위해 다가오는 상상을 한다. 먹힐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러한 합치는 원래 하나였던 것의 응당한 상태이자 엑스터시다. 보어 페티시의 근원은 아마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김얼터

각주1 이미래 개인전 《캐리어즈(Carriers)》의 전시 서문, 아트선재센터 홈페이지, http://artsonje.art/carriers/ (2020년 10월 1일 검색).

각주2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의 『미디어의 이해』(허버트 마셜 매클루언 저, W.테런스 고든 편,김상호 역, 커뮤니케이션 북스, 2003) 1부 4장을 참고.

각주3 이미래 개인전 《캐리어즈(Carriers)》의 전시 서문, 아트선재센터 홈페이지,  http://artsonje.art/carriers/ (2020년 10월 1일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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