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론으로서의 불화 : 박지하, 김선익, 버드 뵈티커,

혹자는 내용과 형식은 한 몸이며 분리될 수 없는 것이고, 이를 따로 보는 이들은 어리석음의 전형이라며 빈정대곤 한다. 그러나 혹자의 말마따나 작품 안에서 요소들은 결코 유기적 전체 안으로 통합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부분들 간의 갈등, 불화, 대결들이야말로 전체를 이루는 윤곽을 제시하는데, 이는 ‘전체’라는 단위에 담겨 있는 함정에 대한 탈출구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주장처럼 부분들은 전체로 결코 통합되지 않으며 각자의 목소리를 내며, 서로 간의 불화를 조장하고, ‘전체’를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수많은 이들의 빈정거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형식과 내용을 분리해보기를, 또 전체를 여타의 요소들을 나누어보는 편을 선호한다. 내가 장르, 규준과 가이드라인이 더욱 분명히 제시되는 영화라는 매체를 익숙하기 때문에 이런 분리를 선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한국의 문화연구에 만연한 그람시주의의 영향을 아직도 벗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혹자는 내가 온전히 나의 지식으로 판단하지 못했다는 점을 맹공격할 것이다. 때로 나는 힐난을 견디지 못한다. 내가 논리적이고 명료한 판단에 근거해 형식과 내용의 분리를 선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 나는 편견과 아집에 휩싸여 있다. 나는 학교에서 수학한 특정이론의 영향에 휘둘리고 있다. 그럼에도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완고히 내 선택을 유지한다. 형식과 내용을 분리하는 것은 방법론으로서 불화를 더 잘 응시할 수 있는 비평적 관점이기 때문이다.

불화에 관한 케이스 스터디 1

박지하는 홍보 문구를 조잡하게 만들어 공치사를 보내는 것이 하나의 관행이 된 한국의 음악계에서, 오직 결과물로만 제 목소리를 내고 있는 몇 안 되는 음악가일 것이다(이것도 공치사일지 모른다. 그러나 음악에 문외한이며 나는 뒷광고를 받지 않았다는 것! 믿어주시길).

박지하의 음악을 처음 들었던 17년 때부터 줄곧 그녀의 성취를 지켜보고 있었다. 작년에 나온 <Philos>는 각종 해외 매체에서 찬사를 받았다. 박지하는 해외의 찬사 덕택에 오히려 한국으로 역수입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번 앨범에서 박지하가 국악(에스닉한 음악)으로 탐구할 수 있는 영역을 내버린 채로, 안전한 템플릿의 영역에 자신을 매어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한 친구는 내게 박지하의 음악이 요한 요한슨 같은 뉴에이지와 몸을 섞은 미니멀리즘의 에스닉한 변종으로 나아가 실망을 거듭해주시고 있다는 말씀을 해주신 적 있다. 박지하가 수행하는 소리에 대한 탐구가 라운드 뮤직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지는, 서정성을 띈 현대음악에 그친다면 결국 우리는 재료(매터리얼)와 템플릿의 안정적인 조화를 추구하는 박지하를 사운드적인 실험을 방기하는 그저 그런 음악가 중 하나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단지 박지하가 서정성을 버려한다는 단언은 아니다. 오히려 현재 자명하게 받아들여지고 해석되는 서정성을 국악의 소리로 어떻게 오염시킬 것인지 고민해야 미적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방법론으로서의 불화는 서정성을 오염시킬 수 있다. 이를테면 리 스크래치 페리가 에스닉한 ‘자마이카적인 것’을 오염시키는 방식이나, 알렌 투상이 록큰롤을 오염시키는 방식을 떠올려 보자. 박지하 또한 퓨전 국악과 국악이 유통되는 방식 그 자체를 오염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서구가 승인하는 오리엔탈리즘적인 위치로, 혹은 일반인들이 애호하는 라운지 음악의 선입견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안전함 속에 틀어박힌 박지하가 그 속에서 빠져나오려면, 형식과 내용을 충돌시켜 이들을 분리시키고, 또 그 경계를 뒤섞는 합성적 방법론을 취할 필요가 있다.

불화에 관한 케이스 스터디 2

근래 들었던 음악 하나도 박지하와 같은 곤궁에 놓여 있었다. 그 음악 역시나 국악의 악기를 매터리얼로, ‘장르’를 템플릿으로 삼는 음악이라는 점에서 박지하와 같이 언급하고자 한다. 김선익의 <zero chime>. 김선익의 음악엔 김석출 옹의 태평소 소리를 샘플링한(이를 주선율로 삼고 노이즈를 늘어놓는) 그라운드 제로의 컨슘 레드가 하나의 실마리가 됐을 터다. 그러나 김석출의 태평소를 샘플링해 주선율로 영리하게 이용하는 오토모 요시히데의 선택에 비해 국악기를 노이즈를 일궈내는 주재료로 삼는 김선익은 상황이 다르다.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오토모 요시히데는 국악 혹은 한국적인 것이 지닌 폭력성을 조금 더 직접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가 한국 바깥의 인물인 탓에 한국적인 것을 연료로 삼을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오토모 요시히데나 사토 유키에, 하세가와 요헤이, PSF와 같은 혹은 그들 이전에 일본의 음악 애호가들이나 음악가들이 한국의 전통 음악/대중음악/록뮤직을 어떤 경로로 수입했고, 소비하며, 해석했는지를 한국 음악가들도 받아들여야 한다. 오리엔탈리즘, 야나기 무네요시, 등등 관점은 다양하겠지만, 외부에서 한국을 바라보고 또 스테레오타입으로 형성하는 그 과정이 오히려 한국적인 것을 변용시킬 가능성을 줄 수도 있다.

김선익은 오토모 요시히데가 아니라 ‘박지하’와 마찬가지인 상황에 놓인다. 그는 템플릿과 매터리얼을 불화시키는 데 성공했는가? 템플릿이 매터리얼에 영향을 주었는지 혹은 그 역은 성립하는지? 매터리얼을 담는 데 템플릿은 어떤 상처를 입었는가? 아니, 매터리얼은 템플릿에 담기면서 어떤 상처를 입었지? 김선익의 음악은 형식과 내용 어느 쪽에도 어떤 상처도 입히지 못한다. 젊은 음악가들이 전통을 재해석할 때 그들의 발목을 절단할 위험한 함정이 이곳에 있다. 박지하와 김선익은 전통이라는 무덤에서 탈출했을까? 아직도 전통을 관짝 삼아, 민족 안에 누워있는 걸까?

불화에 관한 케이스 스터디 3

동일한 맥락에서 버드 뵈티커의 걸작 <외로이 달리다>의 성취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모두가 수긍할 수 있듯, 서부란 미국 예외주의를 위한 역사적 장소다. 주인 없는 땅을 개간함으로써 유럽의 역사와 다른 방향으로 자유주의 전통을 형성해온 미국사. 무주공산의 서부는 공동체를 형성할 예외적 상황을 초래한다. 이것이 서부의 신화(mythos)를 떠받드는 기초적인 줄거리다.버드 뵈티커는 바로 이 신화를 다시 서부의 랜드스케이프라는 추상적 풍경 안으로 쓰러트린다. 도주하는 이들 뒤로 펼쳐지는 황량하고 적막한 사막은 마을도, 인적도 거부한 채로 영화 내내 이어진다. 자연적 풍경이 갖고 있는 기호성과 그 자체의 물성이 거듭 충돌하는 곳은 바로 버드 뵈티커의 서부다. 뵈티커의 서부 안에 내재되어 있는 불화는 영화라는 매체가 필연적으로 내재할 수밖에 없는 불화이다.

영화는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이다. 이 같은 사실에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안토니오니가 죽은 시간과 시간의 죽음에 대해 논할지라도, 데드타임이라는 예외적 시간은 오직 내러티브를 소여로 삼고서 탄생한다고 할 수 있다. 내러티브가 잠깐 정지되는 그 막간, 모든 공기가 빠져나가 일종의 진공상태를 이룰 때, 우리는 영화적 순간이라고 부르는 에피파니와 마주한다. 그리하여 영화적 순간을 단순히 특권화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언제나 그같은 순간은 불화로서, 오롯이 전투와 싸움으로 인한 막간으로서 현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서부극은 내러티브와 추상성을 대별하여, 시간과 죽은 시간의 불화를 밀어붙이는 장르다. 이것이 서부극을 영화 매체를 위한 특권적 장르로 올려놓은 핵심적인 요소일 것이다. 박지하와 김선익은 서부극에게 불화를 배워야 한다.

그렇다면 더 정확히 우리가 추구해야 할 불화는 무엇일까.

우리 사회에 표준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산업화VS민주화 내러티브, 전통? 에스닉? 근대성? 모더니즘? 상관주의? 실재론?

쉿! 몽환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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