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 Ⓒ이모션 북스, 골든트리

1985년, (영화-철학의 기념비적 저술로 꼽히는) 『시네마』 출간 기념 강연회가 열린다. 저자 들뢰즈(Gilles Deleuze)는 “영화와 사유 간의 관계라는 질문에 진지하게 부닥친 책” 두 권을 언급한다. 다네(Serge Daney)의 『비탈길: 까이에 비평 1970-1982』(La Rampe: Cahier Critique 1970-1982, 1983)와 셰페르(Jean-Louis Schefer)의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L’homme Ordinaire du Cinéma, 1980).

다네의 글은 여기저기서 접할 수 있었다. 『영화가 보낸 그림엽서』가 국역되기도 했고, 「카포의 트래블링」 같은 글이 (얼마나 정확하게 수입되었는지는 차치하고) 국내 영화비평계에서 열렬히 환영받기도 했고, 영화-음향학자 시옹(Michel Chion)의 『영화의 목소리』에 「파이프 오르간과 진공청소기」가 부록으로 첨부되기도 했고, 영상 비평지 『오큘로』 웹페이지에 「고다르의 패러독스」가 게시되기도 했고, 비평 공유 플랫폼 『콜리그』에서 「영화 비평: 이전과 이후」를 번역하기도 했다.

한편 셰페르의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는 올여름에야 초역되었다.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가 영역된 것 또한 2016년이라는 꽤 늦은 시기였다. 셰페르의 글쓰기가 다네의 글쓰기에 비하면 기행적인 탓일까? 분명 술술 읽히는 글은 아니다. 그렇다면 셰페르의 문장들은 (들뢰즈) 연구자나 현대영화이론의 쟁점에 관심을 두는 이들만이 참고할 수 있는 비의적인 문헌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다. 들뢰즈가 셰페르에게 빚진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셰페르의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는 들뢰즈가 빌려 간 개념과 단초들을 초과한다. 요컨대 “이 세계는 대칭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투명한 것이다”라는 셰페르의 문장은 단지 시적 표현이 아니라 일종의 정언명령이다. 왜냐하면…

부식토와 도덕

셰페르는 자신이 “노예”이자 “판정자”라고 확언한다. 그는 어떻게든 수동적이다. 수동적인 인물로서 셰페르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수동적인 것, “습관”에 관해 쓴다. 정확히 어디에 수동적이냐면, 세계와 장소에 수동적이다. 여기서 (모든 뜻이 담긴) 세계와 (지금 내가 거주하는) 장소는 이미지들의 가능 조건이다. 어린 시절의 셰페르는, 또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를 쓸 적의 셰페르는 이처럼 확언이 연쇄되는 과정에서 “특수한 앎”을 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가 “괴물들”과 “신들”(이라고 비유되는 셰페르의 어떤 경험들)이다. 이들은 이야기라는 의미작용체계에서 객관적 공간을 차지하는 뿔 달린 괴물들이나 하늘에서 내려온 신들이 아니다. 대신 우리 자신이 앉아있는 바로 그 물질적인 장소를, 물질적인 감정을 점유하는 것들이다. 점유의 과정에는 “부식토”가 남는다. 다만 괴물들과 신들이 이야기라는 의미작용체계를 초월했기에, 우리로서는 이 경험에 대한 증언을 요구받을 적에 더듬거릴 수밖에 없다. 셰페르는 이와 같은 필연성을 “실어증”이라고 표현한다.

셰페르의 표현을 빌리면, “하지만 이 ‘앎’은 나의 것이며 그리하여 영화를 보는 어린 나, 나의 삶에 있었던 것 이외의 것으로 말할 방법은 없다.” 그리고 나의 것만큼 평범한 것, 일상적인 것(l’ordinaire)은 있을 수 없다. 또 나의 것만큼, 나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만큼 불결하고 더러운 것은 있을 수 없다. 또 불결하고 더러운 만큼 나의 것은 근본적이다. 가령 프렌치(Patrick Ffrench)는 「산 적 없는 몸에 대한 기억」(Memories of the Unlived Body: Jean-Louis Schefer, Georges Bataille and Gilles Deleuze, 2017)에서 아래처럼 쓴다.

평범성(ordinaire)은, 셰페르의 이미지 접근 방식 과정 속 “모든 이름 붙일 수 있는 객체들이 가상적인 방식을 통해 이름 모를 배설물적 질료로” 바뀌는 경향을, 오물/더러움/불결(filth), 배설물(ordure)로 이어지는 평범성의 라틴어와 고대 프랑스어 어원을 따른다. (…) “평범성”은 어쩌면 우리 몸, 지각, 그리고 주체성의 (되풀이되는 셰페르적 용어인) “부식토”(humus), 그리고 (…) “기저의”(basal)라는 단어에 담긴 근본적이라는 뜻과 상통할 것이다.

셰페르는 쓴다. “따라서 나는 결코 제대로 된 관객이라고 할 수 없다.” 이처럼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에서 평범성은 보편성과 교환될 수 없는 관념이다. 그런데도, “결코 제대로 된 관객이라고 할 수 없다”는 셰페르의 진술과 앞서 언급한 ‘필연적인 실어증’은, (영화에 관한) 경험을 나눌 수 없다는 핑계로 쓰일 수 없다. “부식토”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나의 것에서 평범성으로, 다시 평범성에서 부식토로 역산할 수 있는 존재자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역산의 가능성은 “이 세계는 대칭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투명한 것이다”라는 문장이 단지 시적 표현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또 셰페르가 영화 경험에 고유한 희열을 설명할 적에 말하는 “도덕적인 존재의 희열”에서 “도덕적인 존재”가 단지 시적 표현에 그치지 않는다는 방증이다. 그리고 셰페르의 이와 같은 도덕률에는 “새로운 휴머니티”, “실험적/경험적 인간의 발명”에 대한 간청이 따른다. 셰페르의 간청과 공명하여, 만약 “나의 세계 자체를 잃어버리기 위해서 그 밤의 세계로“ 가는 길에 “이미지들 속에서 쇠약”해졌다면,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는 한 권의 실용적인 지침서로 다가올 것이다.

고유재 기자

evermore99@kart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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