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트 크렌이 오스트리아에서 왔다네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2020 쿠르트 크렌 상영 프로그램 

지난 8월 10일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EXiS2020)에서 쿠르트 크렌(Kurt Kren)의 영화 열여섯 편이 온라인 상영되었다. 각 영화가 크렌의 필모그래피상 몇 번째 영화인지는 제목 앞에 삽입된 <n1/n2>에서 n1을 통해 알 수 있고 제작연도는 n2를 통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3/60 가을 나무>(3/60 Bäume im Herbst, 1960)는 크렌의 필모그래피상 세 번째 영화이며 1960년에 제작되었다. <3/60 가을 나무>를 비롯한 크렌의 영화 몇 편은 현재 유튜브에 게시되어 있기도 하다. 

▴<23/69 Underground Explosion> ©EXiS

펑크와 행동주의

지금은 “쿠르트 크렌에게 부치는 송시”(Ode to Kurt Kren)를 부르며 그를 소개하겠다.

“프레임에서 셀룰로이드 위의 프레임으로. 쿠르트 크렌이 오스트리아에서 왔다네.” 

80년대 텍사스 뮤직 씬의 언더그라운드 펑크 밴드 ‘리얼리 레드'(Really Red)가 쓴 가사다. 리얼리 레드와 쿠르트 크렌은 ‘쿠르트 크렌 구호 공연'(The Kurt Kren Relief Concert)에서 인연을 맺었다. 공연은 찢어지는 밴드 사운드와 <3/60 가을 나무> 필름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6/64 맘&대드(오토 뮐의 해프닝)>(6/64 Mama und Papa, 1964)나 <10/65 자해>(10/65 Selbstverstümmelung, 1965)를 비롯한 ‘행동주의 영화’(Aktion film) 상영과 리얼리 레드의 즉흥 연주로 이어졌다. 

크렌은 오토 뮐(Otto Muehl)이나 권터 브루스(Günter Brus)처럼 ‘빈 행동주의’를 대표하는 이들과 협업하여 자신만의 행동주의 영화를 내놓은 바 있다. 빈 행동주의는 조형 예술과 개념 예술이 제의와 수행적, 연극적 뿌리로 회귀할 것을 강조한 60년대의 예술 운동이다. 뮐과 브루스는 크렌에게 자신들의 퍼포먼스를 기록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크렌은 지금껏 영화로 돈을 만져본 적 없다며 “망할 영화!”라고 응수했고, 뮐과 부르스가 여러 차례 설득한 끝에서야 수락했다. 

▴<10/65 자해> ©sixpackfilm

<6/64 맘&대드(오토 뮐의 해프닝)>에서 뮐은 벌거벗은 몸에 핏빛 페인트, 밀가루, 흙, 계란을 뿌린다. <10/65 자해>에서 브루스는 영화의 제목 그대로 자해한다. 이처럼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퍼포먼스에 크렌이 매혹을 느낀 것은 분명하다. 다만 결정적으로 크렌이 두 행동주의자에게 배운 것은 행동주의적 자유주의가 아니다. 대신 자신의 두 손과 카메라만 있다면 한 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구조영화와 두 손

크렌은 또 다른 오스트리아 태생 영화감독(이자 ‘오스트리아 필름 뮤지엄’의 창시자) 피터 쿠벨카(Peter Kubelka)와 더불어 다른 무엇보다 ‘구조영화’(structural film)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그런데도 크렌과 쿠벨카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크렌은 “망할 영화!”라는 부르짖음과 그 부정적인 함의까지 고수하기 때문이다. 핵심은 크렌의 두 손이다.

가령 크렌의 공식적인 두 번째 영화 <2/60 손디 테스트를 위한 48장의 얼굴들>(2/60 48 Köpfe aus dem Szondi-Test, 1960)은 지금도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본래 손디 테스트란 여러 사진을 보여주고 그 반응으로 성격과 충동 병리 등을 분석하는 심리학 검사다. 그런데 크렌은 <2/60 손디 테스트를 위한 48장의 얼굴들>에서 손디 테스트를 위한 48장의 얼굴 사진을 일련의 패턴에 따라 제시한다. 패턴의 단위는 프레임이다. 우선 4개의 프레임이 하나의 프레임으로 축소된 다음 4개의 프레임으로 다시 늘어난다. 4, 3, 2, 1, 2, 3, 4.  이 패턴은 역전(1, 2, 3, 4, 3, 2, 1)되기도 하며 클로즈업되는 얼굴의 부분에 따라 변형(8, 7, 6, 5, 4, 3, 2, 1, 2, 3, 4, 5, 6, 7, 8)되기도 한다. 단순한 패턴이다.

▴<2/60 손디 테스트를 위한 48장의 얼굴들> 프레임 플랜 ©Kurt Kren

다만 이 패턴을 실시간으로 일일이 세는 것은 귀찮고 고된 일이고, <2/60 손디 테스트를 위한 48장의 얼굴들>의 시각적 경험에 따라 그 패턴은 움직이는 물질적 대상으로 변이한다. 이에 킹스턴 대학의 영화학자 플레처(Abbe Fletcher)는 다음처럼 덧붙인다. 

“심지어 테스트 카드의 가장자리가 보이고 하얗게 칠해진 테이블이 프레임의 절반을 채우는 쇼트도 하나 있다. 일련의 이미지와 규정된 지침으로 구성된 테스트와 대조적으로, 이 단 한 번의 ‘실수’는 테스트의 촬영, 편집 및 재구성 과정에서 나타나는 전환을 상기시킨다. <2/60 손디 테스트를 위한 48장의 얼굴들>은 또한 크렌의 오류 가능성/불완전성(fallibility)을 보여주며, 그의 프레임 플랜이 그의 작업을 예시하는 것처럼, 그의 영화가 프레임과 프레임 그리고 크렌의 두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패턴과 망할 영화

프레임과 프레임, 그리고 그것의 패턴만큼 크렌의 두 손이 핵심이다. 패턴과 체계가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 크렌의 영화 <15/67 TV>에 대한 분석을 통해 크렌의 두 손에 더욱 압력을 가해보자. 앞서 <2/60 손디 테스트를 위한 48장의 얼굴들>에서 패턴이란 리듬과 교환될 수 있는 수준의 관념이었지만 <15/67 TV>는 노골적으로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성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추상화와 개념화가 일련의 시적 과정으로 변질된다면, 크렌의 두 손, “나는 손 뗐다. 망할 영화!”라는 부르짖음, 영원한 아마추어리즘을 가리키게 될 크렌의 부르짖음이 그 패턴으로부터 새어 나올 것이다. 

<15/67 TV>는 8 프레임 길이의 다섯 쇼트로 구성된다. 다섯 쇼트는 모두 같은 카메라 위치에서 촬영되었고, 매번 상이한 패턴에 따라 단일의 장면으로 구성된다. 킹스 칼리지 런던의 영화학자 최진희 씨는 각 1, 2, 3, 4, 5 번 쇼트가 하나의 장면에서 배열되는 패턴을 다음처럼 첨예하게 분석했다. 

1234511345224513351244513553135513354321
1114522251333124443555513
11141222523331344434
2242244144
2322245555

그런데도 최 씨는 각 프레임에 사진적으로 담긴 내용의 시적 성격에 주목하며 다음처럼 덧붙인다. 

“크렌의 영화는 순수한 체계적 구조보다는 명백한 수학적 구조와 시적 이미지, 이미지로 표현된 무드 사이의 관계에 더 관심을 갖는다(<15/67 TV>가 진짜 수학적 공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크렌의 <15/67 TV>는 순열의 논리를 예측시키고자 시청자를 끌어 들인다. 하지만 그 공식을 붙잡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거스른다.  크렌의 영화는 또한 추상 표현주의와 구조주의 -핫 VS 쿨- 사이의 구분을 거부한다. (…) 크렌의 영화는 구조주의적 이상에 부합하지도 않고 그 이상을 배반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또 다른 철학적 주장을 내놓는다. 즉, 쇼트의 사진적인 내용은 이미지 전체의 수학적 구조에 위배될 수 있다.”

지하실과 아마추어리즘

이어 이번 페스티벌에서 마지막으로 상영된 크렌의 영화 <49/95 천년의 영화>(49/95 tausendjahrekino, 1995)를 예로 들겠다. <49/95 천년의 영화>는 크렌의 영화 가운데 드물게 오디오트랙이 삽입된 영화다. 빈의 성 슈테판 성당을 둘러싼 관광객들이 사진이나 영상을 기록하는 모습이 펼쳐지고, 피터 로레(Peter Lorre)의 영화 <실종자>(Der Verlorene, 1950)의 대사가 들려온다. 

▴<49/95 천년의 영화> ©sixpackfilm

“불 좀 줄래요? 당신 알아요.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당신을 알아요. 당신은 저 알아요? 가까이 와요, 불 안으로.”

“저 남자 그만 괴롭혀요. 당신 모른다잖아요.”

“물론 저를 모르겠죠. 저는 그냥 작은 남자니까. 누구도 작은 남자를 몰라요. 하지만 저는 당신을 알아요. 당신은 저를 알아요? 당신은 저를 몰라요. 당신은 저를 몰라요. 당신은 저를 몰라요. 그리고 당신은 저를 몰라요. 아무도 저를 몰라요.” 

실로 아무도 그를 모른다. 그러다 공습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드디어! 사이렌이다.”

“공습 사이렌이다! 영웅들을 위해 모두 지하실로 들어가라.”

왜 지하실로 들어가는가? 오스트리아 출신의 아마추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언젠가 자신의 일기에 다음처럼 쓴 적 있다.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들은 멀리 여행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뒤뜰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 아무도 나를 모르더라도 지하실로 들어가라는 뜻이다. 또는 아무도 나를 모르기에 지하실로 들어가라는 뜻이다. 두 손과 지하실만 있어도 무엇이든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장유비 기자

evermore99@karts.ac.kr

참고문헌

Peter Tscherkassky, 『Film Unframed: A history of Austrian Avant-Garde Cinema』(sixpackfilm, 2012)

Nicky Hamlyn, Simon Payne, A. L. Rees, 『Kurt Kren: Structural Films』(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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