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과 착란>

지난 1월 『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이 새롭게 출간되었다. 이후 빈 작가들의 책이 매달 두 권꼴로 번역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세기말 빈은 20세기의 매력적인 시공 가운데 하나다. 최근에 <바빌론 베를린>이라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를 봤는데, 실로 <바빌론>이라는 수사에 적합한 것은 세기말 빈이라는 생각이 들어, 드라마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극 중 주인공들이 관람하는 스턴버그 영화 속 디트리히는 베를린 배우로 알려졌지만, 혹자에게는 영원히 빈 사람이다. 요컨대 스턴버그부터 빈 사람이다. <바빌론 베를린>의 숨겨진 주인공 프로이트 씨라던가, 카르납, 포퍼, 슈뢰딩거, 괴델, 쇤베르크,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과 같은 달에 번역된 『조형예술의 역사적 문법』의 저자 리글, 슈니츨러, 베른하르트, 등등. 

▲<몽상과 착란> Ⓒ읻다, Eiram

여기서 언급하려는 빈 사람은 트라클(Georg Trakl)이다. 지난 4월 ‘읻다’에서 출간한 <몽상과 착란>의 저자. 한편 구글에 따르면 트라클은 빈이 아니라 잘츠부르크 출신이다. 하지만 모두 트라클을 빈 사람이라고 부른다. 도대체 빈 사람이 누구인가? 빈 사람은 하나의 개념인가? 이에 빈 사람 칼 크라우스는 쓴다. “베를린 사람은 움직인다. 빈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서 있다.” 누가 서 있고, 그가 서 있는 곳이 빈이라면, 그는 빈 사람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트라클은 썼다. “이제 몰락의 숨결이 나를 전율시킨다.” 그런데도, 또는 그렇기에 어떤 사람들은 가만히 서 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 세기말 빈이다. 

▲Georg Trakl(1887-1914)

그런데 왜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는가? 이에 재작년 작고한 허수경 시인은 말한다. 허수경은 고고학자이기도 했는데, 언젠가 잃어버린 기억을 좇아 발굴을 하러 가는 길에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의 수첩에는 이런 기록만 남아 있었다. “살아 있을 때 트라클에게는 이 지상이 가장 낯설고 무서운 곳이었다. 그는 살기를 거부했던 시인이었다. 태어나는 것이 이토록 무섭다는 것을 전생에서 이미 습득한 것처럼 짧게 살다가 갔다.” 전생에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걸 습득한 사람은 생에서 구태여 반복의 테마를 추종하지 않는다.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서서, 보고 듣는다. 이를테면 <한해>의 끝에서 “태초의 황금색 눈동자, 최후를 기다리는 어두운 인내”는 <여름의 끝자락>에서 “그가 살았던 유령 같은 나날들의 화음을”. 이어 <비탄>이 시작하며 “수면과 죽음, 저 어두운 독수리들이 밤새도록 머리 주위를 빙빙 맴돈다.” 

그렇게 잠에 들고, 그 잠이 죽음과 유비될 적의 한 밤, 즉 독수리들이 맴돌기를 반복할 때, 왜 서 있을 수밖에 없냐는 물음은 왜 그런데도 서 있냐는 물음을 함축하게 된다. 이에 비트겐슈타인은 프로이트의 동시대인으로서 근원적 장면(Urszene)이란 개념에 대해 회고하며, 다음처럼 쓴 적 있다. “이것은 종종 사람의 삶에 있어 일종의 비극적 패턴을 부여하는 일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모두 오래전에 정착된 같은 패턴의 반복이다. 태어날 때 운명의 여신들이 자신에게 부과했던 천명을 수행하는 비극적 인물과 같이 말이다. (…) 그리고 그렇다면, 그의 삶이 차라리 비극의 패턴을 지니고 있음 – 근원적 장면에 의해 결정된 패턴의 비극적 수행과 반복 – 이 보일 수 있다면, 그것은 큰 위로일 수 있다.” 근원적 장면과 일련의 반복에서 비극이 생성된다. 비극은 주인공에게 위로를 건넨다. 트라클은 이에 반한다.

너는 계속해서 돌아오는구나 우울이여,

오 외로운 영혼의 온순함이여.

또 하루 황금빛 날의 최후의 빛을 발하는구나.

인내하는 자는 겸손히 고통에 몸을 내맡기고

어여쁜 음률을, 부드러운 광기를 신음한다.

보아라! 벌써 노을이 지고 있다.

다시 밤은 돌아와, 명멸자 하나가 탄식할 때

다른 누군가는 함께 고통을 느낀다.

가을 별들 아래에서 몸을 떠는 그는

해가 갈수록 점점 더 깊게 고개를 숙인다.

(<오래된 방명록에 쓰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고대 신화에 대해 과학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가 한 것은 “그것은 모두 오래전에 일어난 어떤 것의 결과이다”라며 시작하는 새로운 신화를 제기한 것이다. 이런 신화를 통해 혹자는 자기 자신에 관해 반성하고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신화와 반복의 테마에서 비롯하는 비극으로서의 일생이라는 관념은 위험할 정도로 편안한 것이다. 혹자는 이런 편안함에서 썩어 버린다. 그렇기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가령 위 시의 제목은 원래 <멜랑콜리에게, An die Melancholie>였다. 하지만 트라클은 <오래된 방명록에서, In ein altes Stammbuch>로 수정했다. <멜랑콜리에게>라는 제목이 횔던린적인 찬가와 비극을 (또는 ‘합스부르크적’ 양식을) 예시하기 때문이다. 반면 <오래된 방명록에서>는 “해가 갈수록 점점 더 깊게 고개를 숙인다”는 종결부를 통해, “계속해서 돌아오는 우울”과 “어여쁜 음률”이 암시하는 반복의 관념을 제한한다. 그리고 거기서 빠져나온다. 

「”윤리학과 미학은 하나다”: 비트겐슈타인과 트라클, “Ethik und Ästhetik sind Eins”: Wittgenstein and Trakl」(1990)에서 앨런 재닉은 트라클을 <장식과 범죄>의 저자 아돌프 로스와 유비한다. 그런 다음 앞서 언급한 트라클의 제한을 “비판적 모더니즘”이라고 명명한다. 또 반복의 관념에서 빠져나올 적에 트라클이 취하는 리듬에 관해 하이데거는 색채-회화를, 비트겐슈타인은 속도-음악을 포착한다. (이에 관해서는 트라클을 읽는 하이데거와 트라클을 읽는 하이데거를 읽는 데리다를 참고해도 되겠지만, 국내에도 류신 교수의 『색의 제국』 같은 걸출한 연구서적이 있다) 두 철학자의 눈과 귀에 스친 것을 느슨하게 <롱델>의 형식으로 옮긴다면

밝은 날의 황금은 다 흘러가버렸네

저녁의 갈색과 푸른 빛깔도 없네

목동의 부드러운 피리 가락은 죽었네

저녁의 갈색과 푸른 빛깔도 없네

밝은 날의 황금은 다 흘러가버렸네

장식-범죄-언어-비판-색채-회화-속도-음악. 이를 따라, 트라클은 주의사항을 덧붙인다. 공공 장소에서 자기 연민에 취하는 둥, 어떤 이유에서든, 이것들은 낭송할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묵상의 도구다. 가을은 트라클의 계절이다. 가을이 찾아올 때까지 이 도구를 쥐어, <입 닫은 자들에게> “구원의 두상을”.

고유재 기자

evermore99@kart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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