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세계를 넘어 우리 곁에 온 여자들

지난 3월 정세랑 작가는 주간 문학동네에서 소설 『시선으로부터,』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연재는 지난 5월 25일에 끝났고, 『시선으로부터,』는 출간을 앞두고 있다. 인스타그램 피드에 예약 판매 인증 사진이 종종 보였다. 웹사이트에서 유명작가의 소설 연재를 무료로 읽는 건 처음이었다. 김세효 기자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고, 매회를 읽을 때마다 김 기자에게 격한 감사를 변주하며 전하곤 했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 시점의 사랑”, 『시선으로부터,』에는 정세랑 가족의 농담 하나, 비극 하나가 담긴다. 정세랑 작가의 엄마의 형제들이 북미나 중남미에 있다고 한다. “하와이에서 만나 제사를 지내야 해”라는 엄마의 농담을 빌렸고 한국전쟁 중에 국군의 손에 돌아가신 작은할아버지의 비극도 빌렸더랬다. 

심시선 전집 출간을 마음 깊이 바랍니다

소설의 새로운 장마다 시선이 남겨둔 책 일부분이 인용된다. 『시선으로부터,』라는 제목에서 추론하면, 심시선이 일생에 걸쳐 써둔 책들은 자식들과 손자들에게 전하는 편지로 여겨진다. 시대와 사회에 상처받으며 자라는 후손들에게 남긴, 시선으로부터의 편지. 그 시선의 글을 쓴 사람도 당연히 정세랑 작가다. 인용 단락 끝마다 (가상의) 단행본 제목이 쓰여있는 걸 보며, 시선의 글도, 현재의 인물들을 서술하는 소설도 같은 작가 한 명이 썼다는 것을 종종 까먹는다. 독특한 문체는 물론이거니와 두 번의 인생을 살아야만 알 수 있을 것 같은 지혜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정세랑 작가는 옛 지식인, 특히 외국에서 오래 지내다가 온 지식인의 말투를 조립하고 한 일가의 정신적 지주가 될 만큼의 지혜를 가진 사람을 창조해냈다. 이에 알라딘은 작가 목록에 심시선을 등록했을 만큼 정세랑 작가의 세계관에 충실히 몰입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해보지 않은 것들에 대한 섬세한 상상력

정세랑 작가는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은 물론 이야기에 핍진성을 부여할 세세한 디테일도 놓치지 않았다. 이 이야기에는 아주 많은 등장인물이 나온다. 심시선 일가의 구성원들이 모두 동원되기 때문이다. 각 인물의 심리 묘사에 대한 탁월함도 주목해 마땅하지만, 이번엔 다른 것을 말해보고 싶다. 시선의 자식들인 명혜, 명은, 명준, 경아는 모두 직업과 관심사가 다르다. 그들의 자식들인 화수, 지수, 우윤, 규림, 해림도 마찬가지다. 나이와 상관없이 이들 모두 자신의 분야에 대한 전문성이 상당히 높다. ‘회사 경영, 그림 복원, 고고학, 디제잉, 컨셉 아티스트(몬스터 아티스트)’ 등의 직업 묘사부터 ‘커피, 서핑, 새’처럼 취미라고 말하기 망설여지는, 탐구에 가까운 활동들의 디테일이 너무나 뚜렷하다. 

정세랑 작가는 이 소설을 위해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인터뷰했다고, 그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연재를 마치며’라는 글에 담았다. 그렇지만 인터뷰만으로 알 수 있나 싶은 것들이 많았다. 각 직업 특성상 직접 해봐야만 느끼는, 업무 관련자들과의 미묘한 긴장이나 자신의 연구와 성취에 대한 오래된 고민 같은 것들 말이다. 특히 우윤의 일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그 힘이 폭발했다. 컨셉 아티스트 우윤이 프로젝트를 앞두고 괴물의 기괴함과 공포스러움을 극대화하기 위해 혼자 이런 저런 상상을 한다. 아마 정세랑 작가가 오랜 시간 SF 소설을 써오며 쌓아왔던 괴물의 아이디어가 펼쳐진 게 아닌가 싶다. 우윤의 독백이었지만 어쩐지 그 부분에서만큼은 책읽아웃 팟캐스트에서 들었던 정세랑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어

2주 전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린 베니스 비엔날레 귀국전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전을 보았다. 제인 진 카이젠 작가의 <이별의 공동체>라는 작품은 바리설화를 기반으로 여성들의 타자화와 민족 상실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제주도의 무속인 고순안 씨의 무속의식과 굿노래가 작품 안에서 리듬을 가지는 형태로 배치된다. 고순안 씨는 굿노래를 하며 울컥 솟아오르는 눈물을 참지 않는다. 기묘하게 노래의 박자와 맞아떨어지는 울먹거림이 인상 깊다. 역사 속에서 여자들은 버려지고 홀대받았지만, 상처를 딛고 일어섰다. 결국엔 다른 이들을 치유하기까지에 이르는 수많은 여자들을 보며 나는 다시 다짐했다. 울음 섞인 노래를 통해서라도 지나간 아픈 역사를 계속해서 되짚고 지금 함께 살아가는 여자들을 위로해야겠다고. 

『시선으로부터,』의 한 문장처럼, ‘세계가 나에게 암시를 준다’고 느꼈다. 지금을 살아가는 나와 내 주변 여자들의 이야기에만 골몰하지 말고, 역사가 망친 과거의 여자들과 먼나라의 여자들의 이야기도 힘써서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의 계보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는 정세랑 작가의 말처럼, 보이지 않는 연결로 이어진 수많은 여자들을 생각한다. ‘나의 삶을 구원한 페미니즘’은 일종의 관용구가 되었다. 처음엔 그것이, 내가 살아가면서 바짝 정신 차리고 챙겨야 할 것들을 알려주었다면 이제는 점차 시공간의 지평을 넓혀 아직 소리 내 말해지지 못한 것들을 더 찾아내라고 유도한다. 

『시선으로부터,』가 그것에 힘을 실어 줄 것이다. 시선의 말, 자매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정세랑만의 풍부한 상상력과 선명한 디테일로 보여준다. 현대를 살고 있는 여자들이라면 숱하게 봐왔을, 채팅방 성희롱이나 염산 테러와 같은 사적인 영역에서의 차별과 혐오를 드러낸다. 뉴스에서 많이 보았지만, 그것을 소설에서 재현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더불어 시선의 일화를 통해 말을 통해 전해지는 윗세대 여자들의 차별과 고통을 상기하고, 그 역사를 겪고 후대 여자들에게 전하는 시선의 사려 깊고 재치 있는 조언을 마음에 새긴다. 시대와 세계를 넘어 끝내 우리 곁에 닿았다.

김가은 기자

gaeun0826@kart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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