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세계

페트라 코트라이트와 육 후이의 입을 빌어

허애리 기자(참고기사 제324호 “집은 상상에 적합한 곳인가?”)는 다음처럼 말한다. 실험영화를 올리는 채널 몇 개를 구독한 다음, 유튜브 알고리즘에 몸을 맡기면, 강경한 형식주의와 아마추어리즘을 구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전략은 오래 갈 수 없다. (위 에세이에서 언급된 채널 ‘Mezsondra’는 예외지만, 이를 제외하면) 허 기자가 구독할 법한 채널들은 특정 시점부터 업로드를 그만뒀기 때문이다. 넉넉하게 잡아 2010년대 중반일 것이다. 그뿐 아니다. 허 기자의 전략은 유사-베르그송적 주체론을 요구한다. 하지만 실상 유아론과 다를 바 없다. 그것도 어떤 사유의 부작용으로 따라 나오는 유아론이 아니라 유아론 자체를 위한 유아론. 

허 기자만의 문제는 아닐지도 모른다. 문제는 집이라는 장소에서 비롯한다. 집에만 지내는 것이 원흉이라는 말은 아니다. 허 기자 스스로 밝히는 것처럼 그는 원체 격리 생활과 다를 바 없이 지내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 앞에 모든 사람이 집에 박혀 지내야 하는 세상이 펼쳐졌다. 어떤 삶의 양식이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삶의 양식과 겹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를 자기 얘기나 하면서 코로나 19로 인해 집에서 소비할 수 있는 문화를 모색하는 척 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은 것이 허 기자의 실책이다.

그런데도 스트리밍이란 무엇이냐는 물음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이에 허 기자는 제58회 앤 아버 영화제의 경험을 언급한다. 실험영화제의 라이브 스트리밍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에 취한 채로. 이런 도취에 계몽의 빛을 비추는 것으로는 며칠 전에 우연히 읽은 『아트포럼』(ARTFORUM)의 아티클 하나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어느 원로 유튜브 업로더) 페트라 코트라이트(Petra Cortright)가 “타임머신에 타버려, 10년 전, 아니면 12년 전쯤으로 이송된 것 같다”라며 운을 뗀다.

“종일 컴퓨터 앞에 있는 것은 물리적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당신 자신의 얼굴을 보는 일은 더더욱. 이는 오늘날 많은 사람이 줌(Zoom)이나 페이스타임(FaceTime)에서 하는 일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을 본다는 것. 이것은 사람들을 약간 조증 환자나 멍청이로 만든다. 만화가 되기 십상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엔터테인먼트를 보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찍은 상품을 보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이미지가 자유롭게 순환하는 것을 보는 데는 익숙하지 않다. 또 대부분, 카메라 앞에 놓인 사람이 되는 일에 들어가는 노력과 촬영을 담당하는 사람이 되는 일에 들어가는 노력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마이스페이스 각도”나 “셀카 각도” 따위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혼자 있을 수 있는 물리적 템플릿이다. 당신이 괜찮게 보인다는 보증이다. 

(…) 웹캠을 이용해 나 자신에 관한 영상들을 만들 적에, 나는 언제나 최대한의 통제를 원했다. 하지만 이 같은 통제란 혼자 있을 적에는 굉장히 성취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업로드하거나 공개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든 작업에 행사한 나의 통제를 항상 과소평가했다. 나는 이런 질문을 받곤 했다. “오 세상에, 당신의 이미지를 세상에 쏴대는 거, 꺼림칙하지 않아요?” 아니,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들을 철저하게 관리하니까. 그리고 어떤 면에서 보면, 그 작업은 실상 나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어떤 종류의 중립성을 유지하는 것에 관한 작업이었다. 또, 어떤 의미에서든 이 자아에 커스터마이제이션이 효과를 미치도록 내버려 두는 것에 관한 작업이었다. 사람들이 내 웹캠 비디오에 대해 말할 때 이걸 얼마나 무시했는지, 꽤 웃기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영상을 덜 만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내가 더는 그만큼 외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만큼 외롭지 않았다. 회화를 통해, 나는 세계-만들기/세계관에 관심이 생겼다. 내가 외롭지 않을 적에는, 그게 더 쉬운 일이다. 도주에 훨씬 가까운 일이기도 하다. 나의 많은 그림들은 풍경화다. 좀 더 차분하고, 당신이 진입할 수 있는 다른 세계다. 그래서 사람들이 <동물의 숲> 같은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좀 더 온화한, 세계-만들기/세계관의 마음가짐으로. 지금 집에 있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다른 길이 주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른 세계로 갈 수도 있고, 정신 나간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만들 수도 있다. 나는 둘 다 해봤다.”

▲when you walk through the storm Ⓒ petra cortright

결정적으로 “나”는, 자동적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조작과 통제를 통해서 추론될 수 있는 가상적 대상이다. 따라서 “나”의 집은 유아론의 계기가 아니라 다른 세계의 계기다. 이 점에서 허 기자는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이 갑자기 “나”의 삶의 양식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허 기자의 경우에는 양극성 장애 환자 A로 사는 삶을 모든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나”를 얘기하는 것이 곧 모든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나”, A, 허 기자가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다른 세계의 그림뿐이다. 

그런데 다른 세계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는 철학자가 필요하다. 가령 육 후이(許煜, Yuk Hui)는 「백년의 위기, One Hundred Years of Crisis」를 다음처럼 끝맺는다.

“코로나바이러스는 결과적으로 디지털화의 과정과 데이터 경제의 포섭을 가속할 것이다. (…) 코로나바이러스는 이미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위협받은바 있는 유수의 기관들을 파괴할 것이다. 이는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감시 기술을 비롯, 면역학적 계량법의 증진을 요할 것이다. 테러리즘과 국가적 안보에 대한 위협에 대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또, 더욱 강한 디지털 연대를 요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여기서 디지털 연대란 페이스북, 트위터, 위챗을 더 사용하자는 요청이 아니다. 대신, 단선적 기술 문화의 사악한 경쟁에서 벗어나자는 것, 대안 테크놀로지와 이에 조응하는 삶의 양식, 그리고 이 코스모스, 이 행성에서 거주하는 방식의 양식들을 통해 기술적 다양성을 생산하자는 것이다. (…) 황혼이 지기 전에, 차이와 발산을 허용하는 견고한 연대야말로 정말 필요한 것이다.”

다른 세계는 디지털 연대와 불가분적이다. 다만 유의할 점이 있다. 디지털 연대라는 아이디어는 지속 가능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허 기자가 언급하는 온라인 스트리밍 사례, 이 격리 기간 동안 제 아카이브를 공개하는 기관들의 사례는 다른 세계나 디지털 연대와 무관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어떤 제스처로써 유의미할 따름이다. 이렇듯 체계와 지속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백년의 위기」와 쌍으로 읽힐 수 있을 육 후이의 글은 「아키비스트 선언, Archivist Manifesto」(2013)이다. 

“물론 오늘날 이런 기관에서 “개방 정책”이나 유사-크라우드소싱을 시행하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제 아카이브를 섬기기 위한 것에 그친다. 이는 인문학 또는 디지털 인문학이라는 명목 아래 놓인 크라우드소싱의 전략이다 (…) 유저가 아니라 아키비스트가 되어야 한다. 사적 아카이브를 창조하기 위해, 제 자신의 디지털 대상과 데이터를 관리해야 한다. (…) 기술적 휴머니즘을 상상하기 위해.”

결국 허 기자에게 제대로 된 글감을 다루라는 것이 이 글의 요지다. 페트라 코트라이트의 충고와 육 후이의 선언과 곁들여 그에게 추천하는 글감으로는 일찍이 전면 무료로 기획된 디지털 아카이브 ‘BYNWR’이 떠오른다.(이어서)

장유비 기자

evermore99@karts.ac.kr

참고문헌

“집은 상상에 적합한 곳인가?” 『한국예술종합학교신문』, 2020.05.11.

“Petra Cortright on self-isolation, Zoom mania, and her early webcam works” 『ARTFORUM』, 2020.04.20.

“One Hundred Years of Crisis” 『e-flux』, 2020.04.

“Archivist Manifesto” 『Mute Magazine』, 2013.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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