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오루크 – 기능? (II)

▲Jim O’Rourke Ⓒ DANGEROUS MINDS

§2 절단이라는 방법론 

보편성만큼 기이한 것은 없다. 어떤 특수성보다도 기이한 형질을 갖고 있는 보편성은 과거와 미래의 끝단을 우로보로스의 모양으로 잇는 한편 사유의 범위를 지리-철학적으로 대폭 확장한다. 그 같은 보편성의 내부에 격렬한 폭발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리스트 작성이라는 행위는 잔혹성을 담보로 두고 있으므로 결코 안온한 상상을 할 수 없다. 역사에 매어 있는 작품을 보편성으로 끌고 온다는 것은 특수성에 대한 위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서로 다른 음악을, 동일한 반열에 놓고 비교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음악을 특수성이 규정한 규칙에서 해방시킨다. 이와 같은 보편으로의 도약은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짐 오루크라는 절충주의자에게서 제일 뚜렷이 나타난다. 짐 오루크로 대표되는 인디록의 젠체하기에 대해 격분하는 누군가가 손사래 치며 부정한다 한들, 짐 오루크는 인디록의 가장 중요한 이름으로 기억될 것이다. 오루크는 지금은 다소 낡게 들리는 포스트-록의 주형틀을 고안해낸 인물 중 하나지만, 포스트 록에 한정하기에는 그의 음악적 성격은 변화무쌍했다. 즉흥 음악부터 아메리칸 프리미티브, 블루스, 라가에 이르기까지 그가 걸어온 음악적 여정은 음악을 장르나 역사 같은 특수성에 매몰시키지 않은 채로, 오직 ‘나 자신’의 보편성으로 향하는 절충주의적 노선을 따른다. 

▲<Bad Timing> Ⓒ Jim O’Rourke

오루크가 보인 절충주의적 노선을 명료히 드러내는 음반은 니콜라스 뢰그가 만든 동명의 영화에서 제목을 따온 <Bad timing>이다. 청취자는 <Bad timing>에서 보편성(이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니, 보편성이라는 기이한 마술에 홀리고 만다. 한때 짐 오루크와 으르렁거리던 사이에 놓여 있던 『피치포크』(Pitchfork)였지만, 20년이 지나 그의 음반을 재평가하는 평문에서 짐 오루크의 절충주의적 노선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되물으며 오루크 음악의 보편성을 탐구한다. <Bad timing>의 보편성을 지탱하는 장소란 바로 미국이다. <Bad timing>은 오루크 전체 경력을 통틀어서 미국의 곁에 가장 긴밀히 놓여 있는 시기다. 그곳에서 짐 오루크는 찰스 아이브스, 반 다이크 팍스, 존 파헤이를 오가며 그들의 음악에 구멍을 뚫고, 그들이 냉전 시대의 스파이인 것처럼 밀고하고 또 내통하게끔 부추긴다. 각각의 음악은 짐 오루크의 음악 안에서 불협화음을 일으키기도 하며, 화해에 이르기도 하지만, 종국에는 유류품만을 남기고 음악의 메타-유토피아로 실종하고 만다. 

리뷰어인 마크 리처드슨은 <Bad timing>이 존 파헤이의 음악에서 출발하면서도, 점차 파헤이의 영향에서 탈선하여 다른 곳을 향한다고 정확히 지적한다. 리처드슨이 인용한 인터뷰에서 오루크는 이렇게 말한다. “내 머릿속의 가장 큰 부분은 아메리카나입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아메리카나란 반 다이크 팍스, 존 파헤이, 찰스 아이브스의 음악을 듣는 데서 옵니다. 아메리카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나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했었습니다. 아메리카나가 아무것도 아니고, 그저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점을 언급해야 합니다.” 오루크는 미국이라는 보편성은 단일한 실체로 존재하지 않고, 특수성들이 벌이는 복마전을 통해 구성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오루크는 자신의 음악 안에서 미국사의 성립 과정을 보편성의 토픽으로 그려낸다. 즉 오루크에게 미국이라는 보편성은 복합적으로 얽힌 특수성들이 합성된 결과에 다름 아니다. 

미국을 유토피아적으로 상상하는 <Bad timing>에서 돋보이는 사운드적 방법론은 (오루크가 제 취향의 전체를 이루는 부분으로 참조하는) 음악에 대한 절단이다. 절단은 중단되지 않는다. 오루크는 반 다이크 팍스에게서 하모니를, 존 파헤이에게서 미국적 영성과 원시성을, 아이브스에게선 토속성과 전위적 불협화음의 갈등 관계를 빌려와 제 음악의 원천으로 삼는다. 바르트가 단언한 대로 취향은 다양한 작품을 비교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들의 만남과 충돌을 시뮬레이션한 끝에 발현되는 예술작품을 예지하는 기능을 지닌다. 그러나 이는 잠재적으로 감춰져 있을 뿐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제 형태를 기대 지평 너머에 숨기고 있던 취향이 하나의 작품으로 오롯이 나타날 때, 이것은 작품을 비교하는 것을 넘어 음악의 내핵을 완전히 도려내는 절단으로 이어진다. 작품을 도려내는 아파르트헤이트는 걸작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다. <Bad timing> 내부의 존 파헤이는 저자라는 통합적 인격을 지닌 존 파헤이가 아니라, 반 다이크 팍스와 연결되며 저자로서의 인격이 찢겨나간 존 파헤이다. 짐 오루크는 저자로서 음악가를 살해하고, 저자라는 현대적 인격의 주검을 러브크래프트적인 상상력으로 되살린다(크툴루의 부름을 듣는 오루크?). 

위와 같은 맥락에서 90년대와 00년대를 수놓았던, 샘플링이라는 대중음악 방법론을 다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등장한 샘플링에 대한 담론은 그저 음악과 음악을 섞는 데만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한 음악에서 어떤 부분을, 어떤 말단을, 어떤 가능성을 절단하느냐다. 샘플링을 혼종모방 혹은 포스트모던에 기대어 판단하던 이들은, 샘플링을 착취수단으로만 간주하거나 혹은 즐거운 유희의 수단으로만 간주하는 평면적인 해석을 고수했다. 하지만 샘플링의 폭력은 이와는 다른 방향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는 음악에 가하는 폭력이 자신에게로 전해진다는, 일종의 동종요법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샘플링으로 인해 착취당하는 것처럼 보이던 음악은 역설적으로 샘플링의 폭력을 통해 자신의 영혼이 진정 무엇인지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폭력으로 인해 자신을 끌어당기던 중력의 정체를 더 명료히 인식하는 마술이 일어나는 것이다. 한 작품을 자율적으로 움직이게끔 하는 모더니즘은 특수성에서 작품을 자유롭게 해방시킴으로써, 그 작품을 훼손시킬 가능성을 부여한다. ‘훼손된 나’와 ‘훼손된 작품’의 관계는 모더니즘의 폭력에 의해서만, 비로소 거울상이 될 수 있다.

오루크의 사이비-삼단 논법 

나는 그것을 본다, 그것이 나를 본다. 

상처를 낸다, 상처를 받는다. 

상처는 당신을 찌른 그 창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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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Jim O’Rourke: Bad Timing” 『Pitchfork』, 2017. 02. 12. https://pitchfork.com/reviews/albums/22870-bad-ti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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