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2014년 10월 13일

나는 시네마테크의 아이들이 아니다

16면_T와_아이들
 

나는 ‘시네마테크의 아이들’이 아니었다. <서울시의 시네마테크 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 지원을 촉구하는 관객운동>을 지켜보며 든 생각이다. 내가 살던 시골에는 성인영화나 틀어주는 소극장이 하나 있을 뿐이었고 그마저도 내가 중학생이 되는 해에 없어졌다. 처음 극장에 간 건 중3 때 포항 살던 이모부를 따라서였다. <매트릭스2>였는데 맨 앞자리에 앉아서인지 어지럼을 느꼈다. 극장 이름은 시민극장. 얼마 지나지 않아 멀티플렉스가 생기며 죄다 문을 닫았다.

 

처음 가 본 예술극장은 대전의 선사아트시네마다. 스무 살 되던 해, 수능 마치고 아는 대학생 형을 따라 대전에 몇 달 지낼 때였다. 무슨 영화를 봤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상영이 끝나고 또래 몇이 모여서 영화 얘기를 나누는 게 보기 좋았다.

 

얼마 안 지나 대구 동성아트홀에 다니기 시작했다. 예술 영화나 독립영화라는 신기한 걸 틀어준다길래 호기심도 생긴데다 마침 표 값도 싸서였다. 딱히 구체적인 어떤 영화를 보고자 간 게 아니다. 이후에도 포스터를 모아가며 영화와 감독 이름을 하나둘 익혀갔지만, 나는 종종 시간표도 없이 무작정 영화관을 찾아가곤 했다. 동성아트홀릭이라는 ‘영화관 팬클럽’ 활동도 했다. 여섯 일곱 살은 많은 형 누나들과 한 달에 한 번 정모를 가져 술자리를 갖고, 가끔 주말에 노부부 사장님을 대신해 매표소나 매점 운영을 무급으로 해주는 정도의 봉사활동을 했다.

 

영상이론을 전공하려고 서울 생활을 시작하면서 동성아트홀과의 인연도 끝났다. 대신 나는 예술학교에서 새로 만난 친구들과 강의실을 빌려 매주 소소한 상영회를 열었다. 영화는 사람 만날 구실이자 술 마실 좋은 구실이 되었다. 정작 뒤풀이에서 영화 얘기가 오가는 일은 잘 없었지만 나는 우리가 봤던 영화의 이름들과 만들었던 포스터를 어렵지 않게 기억해낼 수 있으며, 상영회와 뒤풀이 풍경을 종종 회상하곤 한다. 걔 중에는 꽤 지겨운 경험도 있는데 특히 <경멸>을 볼 때 그랬다. 더운 여름이었는데 영화 상영 전부터 장비 문제로 한참 애를 먹은 데다 방은 더웠으며, 추천자 말고는 <경멸>이 뭐하는 영화인지 이해를 못 했다. 영화감독 페드로 코스타는 고다르 영화를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은 맞아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400방은 넘게 맞아야 할 거다.

 

서울아트시네마도 종종 갔다. 하지만 이상하게 낙원에서 여자친구와 영화를 보고 나오면 꼭 싸웠다. 그래서 안 가기 시작했고, 헤어지고도 잘 안 갔다. 자취 생활하는 형편에 표값이 꽤 부담되기도 했고, 왔다갔다하는 시간이 아깝기도 했기 때문이다. 돈이 없다며 담배는 잘만 사 피워댔고 시간이 없다며 딴짓은 잘만 했다. 웹하드와 토렌트로 영화를 구해보는 게 쉬웠다.

 

영화를 같이 볼 이유가 없어졌다. 아니, 같이 볼 친구들이 사라졌다고 하는 게 솔직할 거다. 상영회 모임은 책 읽기 모임으로 바뀌며 따로 영화를 보지 않게 되었다. 함께 영화를 보고 공부하던 다른 모임도 구성원들 관계가 나빠지며 산산이 부서졌다.

 

내 처지가 특수하긴 하지만, 고비들을 잘 넘겼더라도 그 공동체들의 중심에 꼭 영화관이, 공동의 영화 관람이라는 경험이 있어야 했을까? 그렇다라고 대답하더라도, 앞으로도 그럴까? 잘 모르겠다. 누군가 영화관을 서울아트시네마로 바꿔 묻는다면 나는 조금 더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을지 모르겠다. 정말, 시네마테크가 2010년대에도 이십여 년 전처럼 공동체를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을까?

 

요전에 역사학자 알라이다 아스만의 『기억의 공간』을 읽다가 밑줄을 그었다. “(저장기억은) 자연 발생적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문화적인 지식을 보존하고 비축하고 추론하고 순환시키는 제도를 통해 지원을 받아야 한다.” 우리 시네마테크가, 관객이 아닌 자들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정당성이 있다면 여기서 찾을 수 있겠다 싶다. 그런데 다른 데도 아니고 왜 ‘서울아트시네마’가 지원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나는 더 설득력 있는 대답을 내놓지 못하겠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왜 자생이 힘들어졌을까? 영화관을 떠난 관객들 탓도 있지만, 아마 영상자료원의 프로그램 변경 이후, 특히 《구로사와 아키라 회고전》 이후 재정적으로도 점점 타격을 입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누군가는 서울아트시네마를 두고 “자본에 잠식된 극장환경을 개선하고, 문화다양성과 서울시민의 영화문화 향유권을 위해 공적 성격의 시네마테크”라고 옹호하는데, 그렇다면 관이 아니라 굳이 민에서 소화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그간 다소 소홀히 다뤄진 쟁점 같다.

 

애당초 관객의 관람 수입만으로는 운영이 안 되니까 지원이 필요하다. 관객 없는 관객 운동이라는 조소를 받아들이자는 게 아니다. 어떤 점에서 관객운동이 마주한 곤란은 노동자운동이 마주한 곤란과 비슷해 보인다. 그 돌파구를 나도 못 내놔 괴롭다.

 

이번 지원 중단 사태에 대응하여 관객들은 “우리 모두는 어느 영화의 관객이었다”라는, 관객들이 낙원의 극장과 거기서 만난 영화들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 즉 아스만의 말을 따르자면 기능기억이라 할 것들의 아카이브를 만들었다. 나는 열심히 다니던 관객은 아니었으나 낙원에 대한 감상은 있다. 사천 원 하던 순대국밥을 먹고 영화관에서 졸지 않기 위해 칫솔을 물고 로비를 배회하던 기억들이나 버리지 않고 모아둔 티켓과 몇 번 쓰지 않은 관객회원 카드. 내 방에, 내 맘에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대응은 다분히 감상주의적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이 있으니까, 관객의 사랑이 남아 있으니까라는 논점이 그들에게 또한 우리에게도 얼마나 유효할까? 간혹 종교적으로까지 보이는 엄숙한 사랑이 어떻게 적대감으로 변이되는지 돌이켜보자면 나는 회의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이 신앙에 의문이라도 제기할라치면 영화의 성지에 침범한 이교도 대하듯 하는 신도가 많다. 왜, 극장에서 소리를 내는 관객들에게 성을 내는 커뮤니티의 글들 있지 않은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지만, 나는 시네마테크의 친구가 아니다. 나는 당신의 친구가 아니다. 우리의 우정이 실패로 끝난 이유가 뭘까? 더는 어리단 핑계가 통하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제기랄, 우리는 이제 아이가 아니다. (박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