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오루크-기능? (I)

§1.1 이름들

“제게 중요한 사람들을 나열해 볼게요

반 다이크 팍스, 스콧 워커, 루이스 부뉴엘, 모턴 펠드먼, 뤽 페라리, 토니 콘래드, 데렉 베일리, 세실 테일러, 두산 마카에프, 니콜라스 뢰그, AMM, 마이클 스노우”

-짐 오루크- 

짐 오루크가 언급한 이 모든 고유명사들이 연쇄될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무엇인가? 각 예술가들이 위치한 시공간은 상이할뿐더러 그들의 음악이 속한 장르조차 동일하지 않은 계열에 놓여 있으므로 이들이 한 문단 안에 연쇄된다는 사실 자체가 예술적 추문을 일으킨다. 인간과 바퀴벌레가 같은 공간에 있을지라도 서로 다른 생태적 환경을 요하듯, 음악이 생존하기 위해, 또 세대를 거듭해 역사로 전승되기 위해 필요한 생태는 각 음악의 성격에 따라 완전히 다를 수 있다. 이처럼 하나의 고유명사에서 또 다른 고유명사로 이행하는 일은 고유명사와 고유명사 사이를 갈라놓는 심연을 오가는 것이다. 양서류와 파충류가 섭생부터 환경에 적응하는 방법까지 다를 수밖에 없듯, 각각의 음악이 세계에 존재하는 방법은 장르와 규범이 제공하는 환경에 따라 상이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데렉 베일리의 옆에 반 다이크 팍스를 배치한다는 것은 실험음악과 팝음악 사이에 펼쳐진 심연을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넘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심연은 단지 음악 양식, 질감, 장르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정말 무시무시한 심연은 ‘시간과 공간’이다. 펠라 쿠티의 아프로 비트를 뉴욕에서 발흥한 노웨이브와 1대1 축적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서구가 제3세계에 저지른 폭력, 무수한 시체와 죽음을 가볍게 도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을 넘는 일은 이보다 더 폭력적인 형태의 이행을 함축한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은 나치의 V-2처럼 모든 사물을 폭격해 산산조각내고, 인간을 운명의 회로로 밀어 넣는다.

음악작품이 놓인 역사적 맥락(이는 다시 말해 음악의 외부를 가리킨다)과 음악을 분리해야지만, 이러한 이행이 가능할 수 있다. 음악을 그것이 거주하던 세계에서 분리해서 다른 세계에 존재하던 음악과 충돌시키는 것은 오로지 ‘짐 오루크’라는 음악가의 이름이 아니면 불가능할 것이다. 짐 오루크의 취향과 그의 음악이 고유 명사들이 이루는 네트워크를 성립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아직은 짐 오루크-기능을 따져 물을 때는 아니다. 먼저, 음악을 분리하고 다시 종합하는 청취의 작동 양식이 무엇인지, 그 전모를 파악할 때다.

§1.2 아파르트헤이트

고유명사 사이의 틈 속, 깊숙이 파묻혀 있는 시공간을 건널 수 있게 만든 철학자는 칸트다. 영국의 철학자 닉 랜드는 고유명사 간의 도약을 가능케 하는 토대로 칸트를 그려냄으로써, 칸트를 억압과 착취, 인종차별을 선동한 철학자로 재조명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랜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발생한 아파르트헤이트의 책임은 칸트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아파르트헤이트, 흑백 인종 분리는 칸트철학이 근대 철학사 내에서 수행하는 경험주의와 합리주의 간의 분리-종합을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칸트, 근친상간 금지, 자본”이라는 글에서 랜드는, 칸트가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를 분할하는 동시에 양자를 종합하여 형성한 ‘지식의 교환 양식’으로부터, 제국주의가 건립한 시장 교환 양식을 추론해낸다.(주1) 자본은 제1세계와 제3세계를 분리함으로써 제품을 수출할 시장을 창출하고, 생산 과정에 투입할 노동력을 얻는다. 이 같은 종합 과정은 근대성의 두 얼굴인 자본과 학문에 공히 공통적인 과정이다. 이는 음악을 원래 위치했던 시공간에서 분리시켜 소비자가 형성하는 취향의 계열에 귀속시키게 해주는 단초를 마련한다. 음악이라는 분과를 형성하고, 음악 분과 내부를 분리해 또 다른 계열들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로써 한때 이름 없는 (외부로부터) 소리로 인식되던 음악들은 아프로 비트, 스피리츄얼 재즈, 즉흥 음악이라는 분과로 편입되게 된다. 모더니즘은 각 분과를 형성하고, 이를 제 영역에 한정하여 고립시킴으로써, 고유명사 사이에 잠복한 역사성의 위험을 돌파한다. 음악의 외부는 무던히도 손을 뻗어 음악을 사회와 역사의 흐름으로 하강시키려 애쓰지만 모더니즘은 역사가 위태롭게 뻗는 손을 잘라버린다(반-역사주의). 지금의 청취문화는 이러한 보편의 권능으로만 성립할 수 있다.

문명을 자처하는 서양인이 제3세계의 음악을 수집하여 서구라는 보편을 제외한 ‘세계 음악’이라고 명명하는 행위는 모더니즘에 의해 진행된다. 그런 탓에 월드 뮤직이라는 역겨운 명명은 비윤리적으로 보일진 모르나, 논리적으로 불가능하 진 않을 것이다. 자유무역은 근대 이전이라면 경이의 방 안에 수집되어 있어야 할 진귀한 상품을 교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역사가 완전히 소거됐으므로 AMM과 톰 조빔은 한 플레이리스트에 자연스럽게 포함될 수 있으며, 종국에 한 음악이 속했던 과거는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잔혹했느냐와 무관히) ‘이국적’인 풍경에 머무르며 플레이리스트 안으로 조화롭게 융화된다.

음악을 원래의 영역에서 추출하여 다시금 음악이라는 분과 내로 종합하는 모더니즘은 짐 오루크의 플레이리스트를 정당화하는 데 활용된다. 매체를 탐구하는 자기-비판적 예술 형식은 이질적으로 간주되는 델타 블루스와 온쿄 씬을 동일한 반열에서 비교하게끔 하는 기반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민족지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델타 블루스는 흑인 음악의 계열 아래에 속하지만 핑거 피킹이라는 기타 연주법을 통해 기타라는 악기가 발산하는 소리의 물질적 잠재성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 고유의 자기-비판에 속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더니즘, 즉 형식에 대한 탐구는 단지 한 음악이 작품으로서 존립하는 기반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양자 간의 비교와 통합을 위한 경험의 기반을 제공한다. 오늘 밤에도 한 청취자는 사치코 M과 블라인드 윌리 존슨을 뒤적거리며 자신의 리스트를 머릿속으로 상상 중이다. 음악을 음미하는, 청취자의 머릿속이야말로 바로 랜드가 칸트에 책임을 떠넘긴 아파르트헤이트가 일어나는 장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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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Nick land, 『 Fanged Noumena : Collected Writings 1987-2007』, (Urbanomic, 2011), pp.62-69.

“대신에, 친족과 교역은 조직적으로 서로 격리되었는데, 국제화된 경제는 외국인 혐오적인(민족주의적인) 친족 관습의 고착화와 결합되어 고립되었다.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권력은 지리적으로 정착된 민족-블록 내에서 집중되었다.”(p62)

“나는 가부장적 신식민지 자본 축적으로 서투르게 묘사될 수 있지만, ‘억제된 종합’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현대성의 상태를 다루고 싶다…상품을 교역하는 산업 사회의 출현을 특징짓는 ‘계몽’의 이러한 모호한 운동은 그 자신의 역설적인 성격에 의해 지적으로 자극 받는다…계몽의 역설은 타자성이 관계 내에 엄격하게 위치하는 한 더 이상 완전히 ‘타자성’이 아니므로, 근본적으로 타자성과의 안정적인 관계를 고정하려는 시도라는 점이다.”(p63~64)

“따라서 칸트의 ‘객체’는 타자에 대한 관계의 보편적인 형식으로서, 그것이 우리에게 나타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타자에게도 동일해야 한다. 이 보편적인 형식은 어떤 것이든 경험으로 ‘제공’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이는 객체가 먼저 계몽 정신에 판매될 수 있도록 만드는 ‘교환 가치’다”(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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