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운트 이어리 청취에 관해

앨범 <Lost Wisdom, Pt. 2 (feat. Julie Doiron)>(2019)

A는 B에게 C가 죽었다는 것을 노래한다. 이때 B는 A가 자신에게 C가 죽었다고 노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B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작년 가을 발매된 ‘마운트 이어리’(참고 기사 제294호 “마운트 이어리(Mount Eerie) 앨범 리뷰”)의 새로운 앨범 <Lost Wisdom, Pt. 2 (feat. Julie Doiron)>(이하: <L.W.2>)을 듣던 장유비 기자가 떠올린 의문이다. 며칠 뒤 허애리 기자는 『피치포크』(pitchfork)와 마운트 이어리의 필(Phil Elverum)의 인터뷰를 우연히 접했다. 그리고 우리는 인터뷰의 아래 대목에 의문을 해소할 방법이 담긴다고 봤다.

잃은 지혜(Lost Wisdom). 불확실성의 공포에서 편안함을 찾고 그것과 함께 지내는 것에 대한 앨범이다. 모두의 문제, 모두 당면하는 문제다. 앨범을 듣게 될 사람들을 위해 이 경험으로부터 뭔가를 얻고 싶었다. 분명 뭔가 얻게 될 것이 있지 않았을까?

필은 죽음을 노래한다. 이에 B는 필에 관한 글이나 인터뷰를 읽을 수 있다. 그러고는 죽음이 진짜라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계속해서 더 읽을 수 있다. 가령 <The Crow Looked At Me>(2017) 앨범아트에 담긴 사물들은 모두 죽은 사람의 소유물이다. B가 읽을 수 있는 것들은 서로서로 핍진성을 담보한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이 정작 노래와 어떤 관계에 놓이는지 또한 그런 관계가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사실들을 쓰고, 읽고, 말하는 일과 사실들을 노래하는 일 각각의 위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차이는 이런 것이다. 물론 A가 C의 죽음을 노래할 때 언제든 스마트폰으로 검색하여 C가 죽었다는 것을 읽을 수는 있다. 다만 A가 C의 죽음을 노래한다는 것은 알 수 없다. A는 어떤 사건이나 명제나 진술에 관해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어떤 노래를 노래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B는 A의 목적을 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A조차 자신의 목적을 가정할 수 없다. 이에 필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인터뷰에서 필은 죽음에 관한 노래를 부를 때면 그에게 다가와 눈물을 흘리며 깊은 친밀감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는 사후 아홉 달 정도였다. 나는 조금 나아진 상태였고 내 얼굴은 달라 보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폭발 지대에서 쓰인 앨범을 듣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나갈 때면 나는 이전으로 돌아가서 그 시간에 다시 거주해야 했다. (…) 내 책임이라고 느꼈다. 그것과 함께하도록 최대한 노력했다.

필은 기계가 아니다. 그렇기에 “그것과 함께하도록 최대한 노력했다”라는 말은 필이 죽음이라는 주제를 노래했거나 노래하지 않았다는 말, 노래할 수 있었거나 노래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필에게 “정말 죽음에 대해 노래했나요?”라고 물어봐도 필이 알거나 답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B에게 가능한 일은, “불확실성의 공포”라는 표현에서 사용된 관념인 불확실성을 고찰하는 것이다.

확실한 것들을 찾으면 찾을수록 경계는 정교해지고 점차 불확실성의 윤곽이 잡힐 수 있다. 우선 이 계획에서 가사는 무용하다. 가사와 노래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노래는 노래와 관계 맺을 수 있다. 가령 <L.W.2>의 오프닝 트랙 “Belief (feat. Julie Dorion)”에는 필이 2005년에 발표한 곡(“Let’s Get Out of the Romance”)이 반복된다. 그리고 이 반복을 매개하는 것은 <L.W>의 다섯 번째 트랙 “Flaming Home”(불타는 집)이다. 이렇게 발견된 “불타는 집”에는 회의의 여지가 없다. “불타는 집”이란 우선 하나의 노래이며 B에게 “불타는 집”이란 A의 다른 노래들과 위상을 나눌 수 있는 하나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이처럼 “불타는 집”이라는 노래가 “불타는 집”이라는 대상으로 인식될 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특정 노래가 특정 대상으로 인식된다는 것은 다른 노래들 역시 어떤 대상들로 인식된다는 것을 함의한다. 또한 대상으로 인식된 노래와 여타 대상을 B가 구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이 경우 B는 A에 관한 대상이면 전부 연결 지으면서 끝없는 연상에 빠져들 수 있다. 가령 “불타는 집”이란 “Love Without Possession (with Julie Doiron)”(2019) 뮤직비디오에서 지시되는 불타는 나무와 교환될 수 있는 나무 덩어리에 그치지 않는가? 나무란 무엇인가? 고대 철학자 김 씨는 이렇게 말했군. 등등. B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L.W.2>를 발매한, 2019년의 필과 줄리라는 두 사람으로 A를 한정할 필요가 있다. 그럴 경우 B의 “불타는 집”에 대한 연상은 2019년의 두 사람에 대한 다른 연상들로 인해 가로막힌다. 가령 “Love Without Possession (with Julie Doiron)” 뮤직비디오에 불타는 나무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연기와 구름과 석양도 나온다. 이를 떠올리면 B는 다음처럼 재고할 수 있다. 불타는 나무-집 같은 것들을 통해 불확실성의 윤곽을 드러내려는 계획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대신 불타는 나무-집 같은 것들은 불확실성의 조건일 따름이다. 비유를 덧붙이면 그것은 연기나 구름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일 수 있다. 여기서 연상은 끝난다. ​ 

구름에서 비라도 내리면 문제는 이미 해소되었을 것이다. A가 2019년의 두 사람인 경우에 한해서 B는 이런 가능성을 얻을 수 있다. 이 가능성에는 어떤 구속이 따른다. 우선 B가 2019년의 두 사람에게서 무엇이라도 얻고자 한다면 지혜를 버리지 않아선 안 된다. 사실에 대한 의지를 잃고는 다소 무기력한 비유와 함께 연상을 끝내고 가능성에 기대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기에 B는 편하지 않을 것이다. B의 기분과 무관하게 이런 가능성에 안주하지 않아선 안 된다. 미적 경험에 사로잡히더라도 B는 그 경험을 해명하거나 해결할 수 없다. 오로지 편안해야 한다.

허애리 기자

장유비 기자

evermore99@kart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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