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
2020년 1월 4일

VALE

쓰지 않은 산문집에 보내는 작별 인사


라틴어 “vale”는 작별의 인사말이다. 안녕히. 서한을 마무리하거나 죽은 자를 떠나보낼 때 쓴다. 숨결을 부드럽게 토해내며 발음하는 이 말을 나는 앤 카슨을 따라 카툴루스의 비가를 읽으며 알게 되었다. 시인은 머나먼 이국 땅에서 유명을 달리한 동생을 애도하며 눈물 젖은 마지막 인사를 건네었다. 다시 볼 수 없는 자를 향한다는 점에서 이 말은 결정적 고별을 수행한다. 돌이킬 수 없이 영원한 헤어짐. Farewell. Adieu. 그러므로 “vale”라 말하는 자는 사랑을 쏟았던 대상이 사라진 세계에서 그것 없는 이후의 삶을 살아야 한다.


나는 이 말을 새로 구상한 산문집의 제목으로 쓰려고 간직해두었었다. 사람이 아니라 사물을 대상으로, 한 시절에 애착하고 깊이 향유했으나, 아꼈던 마음의 흐뭇한 기억만 남긴 채, 실물의 소비는 결코 다시 하지 않을 것들을 향해 손수건을 흔드는 말을 모으려고 했다. 그것들이 마음에 들거나 기분이 좋아진다는 이유로 먹고 마시고 입고 주변에 두었지만, 그 행위의 조건과 결과는 세계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폭력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점차 인식하고부터, 이전의 생활 방식과 태도를 계속 견지할 수는 없었다. 앎은 삶을 바꾼다. 미래의 산문집은 그러므로 우리가 순진하게 사랑했던, 그러나 이제는 닿음을 스스로 금하는, 옛날의 것들에 대한 봉인, 작별, 회상, 증언의 문학이 될 터였다. 다시 저지르지 않을 폭력을 말에 닫아 멈추려 했다. 폭력을 반성하면서도 향수를 완전히 소거하지 못한 아이러니를, 그것이 위선 없는 진실임을, 고백하고 싶었다.


예를 들어 푸아 그라에 관하여. 유학생 시절에 살았던 대도시에서 크리스마스 전야는 한국에서와 달리 적요하기 짝이 없는 날이었다. 현지인들은 가족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 일찍 귀가했고, 거리는 가로수의 장식 전구만 밝혀진 채 텅 비어 고요했다. 우리도 모여서는 그 나라의 풍습을 즐기며 기분을 냈다. 겨울날 실내의 상온에서 푸아 그라가 발휘하는 짙고 그윽한 풍미, 붉은 포도주와의 경이로운 조화, 함께 장을 봐서 준비한 크리스마스 플래터, 그리고 무엇보다 따뜻하고 정겨운 얼굴들과 웃음과 말들. 그처럼 찬란한 쾌락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나. 가난한 젊은이들로서 일 년에 꼭 한 번 만끽했던 부드러운 사치의 희열을 어떻게 기억에서 떨칠 수 있을까. 인식과 반성의 과정을 거쳐서, 그 시간의 회상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울 것이라 판단되자, 지나간 벨에포크의 기념물로 푸아 그라 칼 하나를 챙겼다.


상상의 산문집을 채우려고 다른 사물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러면서 나는 기획을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의외로, 그렇게 한때 안락한 기쁨을 선사했던 것은 더 재미있고 심지어 쓸모 있는 다른 것으로 쉽사리 대체할 수 있거나, 그것이 없는 상황에서야 비로소 이전에는 몰랐던 신선한 감각의 차원이 열린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익숙한 쾌락과 편리를 금하면서 결핍과 박탈감에 울적해지기는커녕 새롭고 진보적인 모두스 비벤디의 가능성이 생겨났다. 향수 어린 회고의 인사를 하기엔 멋쩍은 상황이었다. 예를 들어 설거지 용품이 그렇다. 나는 수세미와 세제에 애착감이 있지는 않으므로 이 물건들이 아름다운 옛날의 사물들에 봉헌하는 산문집에 포함될 리도 없지만. 그래서 이 산문집은 더욱 불가능해지지만. 어쨌든 지난 가을부터 나는 설거지에 합성섬유 수세미와 액상세제 대신 커피 자루와 삼베로 만든 수세미와 고형비누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들이 기존 제품에 비해 오염물 제거와 위생적인 관리 면에서 효과가 월등하다는 사실을 알고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미세 플라스틱을 발생시키지 않고 물을 덜 오염시키면서도 우리는 훨씬 쾌적하고 안전한 생활의 방책들을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 있나. 육류 요리를 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지만, 본래 식물 기반 식생활을 선호하므로 아무런 아쉬움이 없다. 우유는 두유로 대체했는데, 열을 가한 요리에는 우유보다 두유의 맛이 나았다. 치즈와 요거트는 너무나 좋아하여 아직 작별하지 않았지만, 그것들에 관해 예찬의 글을 쓸 만큼 지식이 깊은 것도 아니어서 미안할 따름이다. 몸에 산뜻하게 맞는 라이더 자켓이야말로 어쩌면 내가 가장 애호하는 옛날의 사물이라 할 수 있을 텐데, 나는 꽤 오래 전에 마련한 블랙과 브라운 두 벌의 가죽옷을 한반도의 날씨 탓에 일 년에 서너 번 남짓만 착용하므로, 이미 생산되어 실존하는 그것을 버려서 지구 어딘가에 쓰레기를 더하는 대신, 더욱 아끼고 오래 곁에 둘 것이다. 실크 원피스도 마찬가지다. 내 옷은 유행에 민감하지 않고, 내 체형은 그다지 변화가 없고, 나는 사물을 주의 깊게 다루는 편이므로, 내구성이 좋은 옷들을 할머니가 되어서도 입을 자신이 있다. 그러므로 잔잔한 식물 문양이 만화경처럼 시선을 간질이는 그것들에는 다행히도 안녕이라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이견이 있겠지만, 어떤 사물의 미관과 기능이 여전히 훌륭한데, 그것의 생산 과정에서 동물에게 잔혹한 폭력을 가했다는 이유로 가차없이 버린다면, 동물의 존엄과 죽음의 의미를 오히려 훼손하는 것 같다. 인식과 반성 이전부터 존재한 긴 수명의 사물은 이후로도 오래 기능하도록 조심히 다루고 아낌으로써 애도의 예를 갖추게 되는 게 아닐까.


결국, 내가 봉착한 아포리아는, 분명 윤택한 일상에 기여한 과거 문명의 산물들이 있건만, 그것이 아니어도 그것이 없어도 오늘과 내일의 삶은 전혀 나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립지 않은 것에 아름다운 발음의 고대 사어로 인사를 건넬 가치가 있을까. 그리고 내게 남은 생이 아주 길지는 않고, 나는 애착하는 것에 성실하게 애착하므로, 그렇게 애착하는 것은 아끼고 또 아껴 죽음이 가까워지는 날까지 즐기리라는 다짐이다. 그러므로 아낌으로 인해 생이 연장되는, 오래 쓰며 간직해야만 무해한, 옛날의 사물들에 나는 기필코 “vale”라 말하지 못하리라는 것. 그러니까 그 말은 사람에게만 아껴둘 것이라는 것. 그 사람(들)의 자리에 더 이상의 말이 가능하지 않을 듯한 슬픔의 심연이 열리리라는 것. 그리고 그런 안녕(들)은 어느 안녕과 대체할 수 없이 고유하리라는 것. 사랑이 그러하듯.


아, 산문집에야말로 안녕이라 인사해야 할까. 상상하자마자 불가능하여 폐기되었으니. 나는 다른 것을 상상해야 한다. 상상하기 전에 깊이 반성해야 한다. 더 길었던 봄과 가을, 더 상쾌했던 장맛비, 더 쾌적했던 오월과 유월, 더 많았던 하늘 푸른 날들, 코끝 찡하게 맑고 찬 겨울날의 공기, 나는 그것들을 기억한다. 지금보다 분명히 건강하고 아름다웠던 옛날의 날씨를 체험하지 못하는 세대의 생명체들에 내 세대와 그 이전 세대의 인간들은 크나큰 잘못이 있다. 좋았던 옛날의 것을 아예 겪은 적이 없는 세대 앞에서 그것을 누린 자가 추억하고 애도하는 이야기는 무감하고 몰염치한 폭력이다. 산문집은 더더욱 쓰면 안 되는 것이었다. 미련 없이 안녕이라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작별 인사를 보내는 사람에게로 돌아가자. 사라짐과 없음 이후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에게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나보다 젊은 사람들을 향해 우리라 말하는 게 허락된다면, 우리가 공동으로 처한 조건으로. 어떤 양식으로, 방책으로, 오늘날의 위기 속에서 우리와 우리를 넘어선 지구 전체의 삶은 다시금 새롭게 지속될 수 있을까. 삶의 양식과 방책은 어떻게 예술이 될 수 있을까. 무엇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 사라짐과 없음의 인식 이후에 그 빈 자리에서 질문들이 생성되고, 질문은 필연적으로 상상을 이끌고, 상상은 실천을 예비한다. 예술학교는 인식, 상상, 실천을 수행하는 빈 자리다. 나는 감히 그것을 같이 하고 싶다.


윤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