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의 풍경(7) 방문

지금까지 약 잘 챙겨 먹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면 해결되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으로 보일 수 있겠다. 그런데도 굳이 얘기한 이유는 어떤 순환 때문이다. 약 잘 챙겨 먹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려면 건강해야 하는데 건강해지려면 약 잘 챙겨 먹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 이 순환을 악순환으로 만들지 않는 방법은 순환의 과정에서 내 주변에 대한 이해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래서 2010년대의 풍경을 기술하는 방법에 매진했다. 


그 방법을 얘기하느라 정작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 있겠다. 그렇지만 이것저것 얘기하려고 했더라도 그리고 그렇게 이것저것에 관해 얘기했더라도 얘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언어와의 작별>(2014)이라는 영화를 예로 들겠다. <언어와의 작별>은 보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영화다. 사람한테 마음 같은 게 있다면 그것을 씻겨 내릴 수 있는 영화다. 영화를 연출한 감독 자신의 강아지가 천국에 도착하고는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는 영화다. 


그리고 유튜브에 “88:88”이라고 검색하면 <88:88>(2015)이라는 1시간 5분짜리 영화 하나가 나올 것이다. 행복해지고 싶을 때면 <88:88>을 재생하면서 <언어와의 작별>을 떠올리기도 한다. 행복해질 수 있는 이유는 <88:88>이나 <언어와의 작별>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와는 무관하다. 다만 2010년대가 이런 걸 보여줄 수 있고 볼 수 있는 시기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란 무(無)다. <88:88>의 감독은 「무비」(MUBI)의 한 칼럼에서 ‘88:88’이 가리키는 무를 다음처럼 설명한다.


“[88:88이라는] 제목은 청구서를 지급할 수 없을 때, 전기, 물, 난방 등이 끊어질 때 나온다. 나중에 청구서를 지급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집에 있는 디지털시계는 88:88을 비추고는 –:–, -를 비춘다. 주어진 것은 없다. 가난 속에서 “내겐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도, 명확히 말하면, 그 아무것도 없음 자체는 주어져 있지 않다. 너무 가난하여, 무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 시작할 수 있는 우리만의 이름. 그리고 그 이름이 우리에게는 88:88이었다.”


나는 천국을 돌아다니는 강아지 아니면 강아지의 움직임이 매개하는 천국을 보려는 의도로 즉 무를 만끽하려는 의도로 <언어와의 작별>을 시청한다. 한편 무는 불안에 대한 현상학적 상관 개념이며 따라서 근원적으로 불안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88:88이라는 이름을 떠올려야 하며 <언어와의 작별>에 천국을 돌아다니는 강아지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되새겨야 한다. 가령 숲길을 가로지르는 아이 두 명이 나오기도 한다. 방향 없이 천국을 돌아다니던 강아지와 다르게 아이들은 명확하게 앞으로 걷는다.

시작하는 순간이 있을 것이고 도착하려는 지점도 있을 것이다. 시작과 끝이라는 관념으로 예시되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언어와의 작별>은 두 아이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내가 아이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더 비지트>(2015)라는 영화였다. 여기서 아이들은 남매다. 베카는 남동생 타일러와 함께 다큐멘터리를 촬영한다. 베카와 타일러는 지금껏 얼굴을 본 적 없는 조부모의 집으로 떠난다. 베카는 거울을 부수고 타일러는 소리를 지른다. 비는 모든 것을 씻어내리고 1948년에 녹음된 테레민 연주가 재생된다.

정확한 요약은 아니다. “내 동생이 이 장면을 넣으라고 우겼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장면에서 타일러가 뱉는 랩에는 정확한 요약이 담긴다. “똥에서는 치킨 맛이 나지 않는다”던가. 스포일러일 수 있기에 생략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스포일러라고는 믿지 않는다. <더 비지트>라는 영화를 <더 비지트>라는 영화로 만드는 것은 앞서 쓴 것처럼 모든 것을 씻어내리는 비와 테레민 연주다. <언어와의 작별>에서 시작해 의미를 찾더라도 남는 것은 모든 것을 씻어내리는 비와 테레민 연주다. 


이것저것 얘기하려고 했더라도 그리고 그렇게 얘기를 했더라도 얘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유는 별 게 아니다. <언어와의 작별>이라는 제목에서 작별이란 언어와의 작별이 아니라 언어의 한 기능과의 만남을 뜻한다. 이 만남은 주장, 서술, 표상 같은 서술주의적 언어 기능이 차지하는 우선성과의 작별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게 만나게 되는 것이 더는 정당화될 수 없으며 선험적으로 무의미한 일상언어다. “똥에서는 치킨 맛이 나지 않는다”던가. 88:88이라는 이름이라던가. 어떤 비를 묘사할 때 그 비가 씻어내리는 것은 모든 것이라고 말할 방법이라던가.

허애리 기자

evermore99@kart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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