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2020년 1월 4일

대안공간에서 신생공간으로


대안공간의 아주 짧은 역사

80년대, 우리나라 작가들은 민중미술의 등장을 기점으로 현실과 호흡하며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목소리의 구심점이 시대적 상황에 있었기에, 미술계는 여전히 경직되었고 기존의 형식을 따를 뿐이었다. 그러나 87년 6월 항쟁 이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우리나라는 전근대적 잔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변화가 진행되었다. 자연스럽게 새로운 표현과 형식을 요구하는 예술적 욕망이 점차 커져갔다. 이러한 상황에 발맞춰 1999년, 1세대 대안공간으로 일컬어지는 <대안공간 루프>, <대안공간 풀>,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이 등장했다. 대안공간은 경직된 주류 예술에 맞서 실험적 양식과 진보적인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이때 진보적인 내용이란, 과거에 어쩌면 지금까지 사회에 의해 억압받았고 감추어야 했던 주제들의 들춤이다) 또한 구조적인 측면에서 대안공간의 목표는 제도권 바깥에서 형성된 신진작가와 실험적 작품을 지원하는 것이다. 이는 제도권 안의 주류 양식을 수용하여 기성작가의 작품을 판매하는 상업갤러리의 목표와 상이하다. (한편 대안공간이라는 범주 안에 다양한 비영리 전시 공간을 집어넣는 것에는 어폐가 있다)


대안공간은 주로 국가나 기업의 지원과 기금으로 운영되었다. 2000년, 1세대 대안공간들이 설립된 이래로, 대안공간을 비롯한 비영리 전시 공간과 예술가들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이 증대되었다. 하지만 <인사미술공간> 같은 국가 주도 대안공간이 등장하고, 상업 갤러리에서 신진 작가들을 발굴하기 시작하는 등 기존의 대안공간이 담당하던 기능이 여러 기관과 공간으로 흡수되었다. 또한 대안공간의 수는 늘어났지만, 지원금은 그대로였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대안공간뿐만 아니라 상업 갤러리와 사립 미술관마저 위축되었다. 이에 대안공간은 여러 방면으로 수익 모델을 고안하였으나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다른 한편 수익 모델 고안이 과연 대안공간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가 하는 비판 역시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대안공간의 기능과 역할은 약화하거나 변화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문화재단이나 지자체의 사업 위탁소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신생공간의 등장

1세대 대안공간이 붕괴 후 기존 대안공간의 또 다른 대안으로서 신생공간이 등장했다. 신생공간은 1.5세대 혹은 2세대 대안공간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앞서 대안공간이라는 이름이 모든 비영리 전시 공간의 성격이나 사업 목적을 포괄하지 못했듯이, 신생공간이라는 이름도 그 범주가 불분명하다. 2010년대의 물리적 전시 공간으로도, 기득권층에 반하는 일련의 예술적 실천을 행하는 곳으로도, 프로젝트 성의 단발적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생공간’만큼 포괄적이고 어디에 가져다 붙여도 접착되는 이름은 없기에 2010년대의 비영리/영리 전시 공간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신생공간이 대안공간과 차별되는 점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신생공간 설립과 운영의 주체는 젊은 미술 생산자들이다. 이들 대다수는 1980년대 초중반생으로, 10대에 IMF를 겪고 대학을 졸업한 뒤 사회에 진출할 무렵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서울 시내에서 적은 임대료를 내고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선호하여 대체로 소규모를 지향한다. 이는 스마트폰의 등장 이래로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도 쉽게 방문할 수 있는 시대적 상황에 부합한다. 임대 형태 역시 가족이나 지인의 공간을 무상으로 사용하거나, 가능한 적은 임대료를 지불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공간 운영 비용 역시 대부분 운영자가 스스로 부담한다. 이는 이전의 대안공간이 대체로 국가나 기업, 혹은 기성 작가 및 기획자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과 상반된다. 다시 말해 신생공간은 국가나 기업의 지원 없이는 예술을 할 수 없는 기존의 상황에 젊은 작가들이 대항하여 독립적으로 기회를 창출하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추구하는 방향 역시 기존의 대안공간과 차이가 있다. ‘기대감소 세대’라고 일컬어지는 젊은 작가들은 제도가 아닌 동료의 승인에 만족하며, 큰 성공보다 자기충족을 지향한다. 따라서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만 진행하며, 우정이라는 이름의 착취가 일상적이었던 대안공간과 달리 적은 금액이라도 지불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러한 신생공간의 입장은 미술시장에 대한 회의와 맞닿아 있다. 이들은 미술 시장의 구조적 문제가 소비자들에 대한 진지한 고찰의 부재에서 온다고 느꼈다. 이는 미술을 어려워하는 사람에게 미술을 알리는 것부터, 관람을 구매로 연결하는 방식을 고민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고민이 반영된 것은 2015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굿-즈>> 였다. 이 행사는 ‘반드시 기존의 예술작품 형태가 아니라 가벼운 형태의 소품이나 작업 과정 중의 파생물을 판매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닷새 동안 6,000명에 가까운 관객이 다녀갔고, 1억 3000여만 원의 수익이 발생했다. 준비 기간과 작가들의 수를 고려하면 실질적인 수익이 났다고 하기 어렵지만, 현대미술과 관련한 판매 형태의 가능성을 시사해주었다. 또한 생산과 소비가 보다 넓은 범위에서 이루어지고 삶과 미술이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구조를 위한 의미 있는 시도였다.


그러나 대안공간이 그러했듯 신생공간 역시 제도권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2016년 서울시립미술관은 <<서울 바벨>> 을 통해 신생공간들을 끌어모아 젊은 작가들을 조명하려 하였다.  하지만 기획은 허술했고, 참여작가들에 대한 대우 역시 소홀했다. 그렇다면 수많은 신생공간이 이 전시에 참여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서울시립미술관이라는 이름이 주는 권위 때문이었으리라. 한 참여작가의 인터뷰에 따르면 사비를 들여서라도 이 전시에 참여하면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작가라는 이력을 얻게 된다고 말했다. 이들에게 신생공간이란 그저 제도권에 안착하기 위한 발판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다. 신생공간의 이유이자 목적이었던 자족, 자립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신생공간의 등장은 경직된 미술계에 대한 청년들의 조용하고도 거친 반항처럼 보였다. 하지만 대안공간이 그러했듯 신생공간 역시 미술 시장, 나아가 미술계의 구조적 문제 때문에 그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2020년대에는 흔들리지 않을 조금 더 적극적인 저항이 등장하기를 기대한다.


오전석 기자

jeonseoko@kart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