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2020년 1월 4일

2010년대의 마귀들린 여자들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시즌 2>(2011), <바바둑>(2014), <그레이스>(2017)


다른 측면에서 보면 마귀들림 사건은 여성들의 반란이기도 하다. 이 공격적이고 도발적인 여성들은 그들에게 무척이나 도움이 된 악마의 가면을 쓰고 백주대낮에 벌어지는 구마의식에서 자신들의 욕망과 요구사항을 드러낸다. 이들은 두 명의 섭정 여왕, 여성 종교개혁가들, 신비주의적 성녀들의 시대에, 여성의 승리를 노래하고 강인한 여성들의 초상을 보여주는 여성문학의 선구자들 시대에 속한다. (주1)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시즌 2>: 마귀들린 수녀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시즌 2>를 이끌어가는 중축은 수녀인 메리 유니스와 기자인 라나 윈터스다. 두 인물은 두 가지 공통점을 공유한다. 첫째는 그들이 남성 의사와 폭력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지점이다. 이때 악마가 깃든 유니스 수녀에게는 외과의가, 출산과 임신중절 등 신체적 문제를 주로 겪는 윈터스에게는 정신과의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 또한 흥미롭다. “의사는 종교적 과학의 뒤를 잇는 세속적 지식체계의 증인으로서 신학자를 대체하게 된다.” (주2) 남성-의사는 명시적으로 권력을 상징한다. 이들의 두 번째 공통점은 이 권력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라나 윈터스가 최후까지 살아남는다면, 메리 유니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모든 것을 종결한다.


“게다가 모든 것을 말하려면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언어가 늘 약속만 하고 주지는 않는 ‘소통’을 언어 속에서 발견하려면 ‘스스로에게 정의를 실현해야[자결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주3) 자결해야 했던 유니스 수녀의 무기는 이미지다. 유니스 수녀가 처음으로 악마에게 홀리는 장면에서 벽에 걸려 있던 십자가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악마는 인물의 시선을 이용해 전이된다. 유니스 수녀가 폭풍이 치던 날 세실 B. 드밀 감독의 1932년 작 <사인 오브 더 크로스>를 즐겁게 감상하던 장면 역시 떠올려볼 수 있다.


반면 라나 윈터스는 살아남고, 살아남는 것으로 인해 여성 괴물이 된다. 이때 언론인이자 극의 궁극적인 화자로서 그녀의 무기는 언어다. 『루됭의 마귀들림』에서 미셸 드 세르토는 마귀들림의 담론이 결국 언어의 문제라고 밝힌 바 있다. “‘내면’의 이야기는 말해지고, 고백되고, 최종적으로 사회적 언어 속에 재도입되어야 한다.” (주4) 유니스 수녀의 존재가 말소된 것과 달리, 라나 윈터스의 역사는 책, 라디오, TV로 기록된다. 어쩌면 이것이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시즌 2>가 언어와 이미지를 (살해하고 자결하는) 두 여성을 통해 다루고 있는 방식일 지도 모른다.


<바바둑>: 마귀들린 과부

아멜리아가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밤을 새울 때, 그녀는 TV를 본다. (<바바둑>은 2014년에 만들어진 영화임에도) ‘TV’를 틀었을 때 나오는 것은 흑백 영화, 심지어는 조르주 멜리에스의 영화다. 뿐만 아니라 아멜리아의 아들인 새뮤얼은 영화 초반부터 그녀에게 마술을 보여주곤 한다. 제니퍼 켄트의 장편 데뷔작인 호러 영화 <바바둑>에 대해서는 그 내용과 결말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이 글에서는 이 영화가 마귀들림과 마법, 그리고 시네마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 간단히 논의해보고자 한다.


새뮤얼이 아멜리아에게 마술을 보여줄 때, 아멜리아는 새뮤얼의 신발 끈을 묶느라 그를 보지 못한다. 그러자 새뮤얼은 말한다. “날 보지 않으면 안 돼(It doesn’t work if you don’t look at me).” 마술은 그런 이유로 아이러니하다. 반드시 관객이 지켜봐야 하지만, 그런 동시에 가장 중요한 무엇인가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성립된다. 관객의 경험은 자명하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과 ‘존재하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발생한다. 이것은 영화라는 매체를 설명할 때와 유사하다.


아멜리아는 바바둑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밤새 영화를 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로 인해 바바둑에게 더 홀리게 된다. 그리고 바바둑이라는 그림 동화 속 마귀는 아멜리아에게 말 그대로 빙의possess된다. 아멜리아가 영화를 볼 때 펼쳐지는 장면들은, 영화에 홀리는 그녀를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상 자체로 관객들을 홀리고 있는 듯하다. 이는 <바바둑>이 영화 그 자체를 마귀들림의 시초로 보고 있다는 뜻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림 동화 속 존재였던 바바둑이 TV 스크린에 출현하고, 결과적으로 눈 앞에 현현하게 된다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그레이스>: 마귀들린 하녀

여성들은 마귀 들린 상태에서만 진실을 말할 수 있다. 드라마 <그레이스>에서, 그레이스는 검은 베일을 뒤집어쓰고 마치 다른 사람처럼 돌변한다. 이 최면술 장면에서부터 그녀에게 다중 자아가 있다는 사실이 암시된다. 마지막 회차에서는 그레이스의 자아들이 공생하고 있으며, 이를 본인도 긍정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레이스는 왜 마귀들림을 겪을까? 마귀를 마귀로 정의하는 것은 구마사다. 마귀 들린 여성은 구마됨으로써 교화의 증거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과의인 조던 박사는 마귀 들린 그레이스를 치료하려는 구마사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조던 박사가 그레이스를 치료, 구마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레이스라는 여성이 폭력에 시달려 결국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이야기로 <그레이스>를 독해한다면 작품의 한계는 명확해진다. 그레이스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학대를 겪다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친구인 메리는 잘못된 임신중절술로 숨을 거두게 된다. 작품 내에선 그들이 죽을 때 창문을 열어두지 않았기 때문에 영혼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했다고 언급된다. 그레이스는 메리가 ‘날 들여보내 줘’ 라고 말하는 환청을 듣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그레이스는 메리를 포함한, 자신이 보고 겪은 여성들의 죽음을 모두 수용했다. 왜 <그레이스>는 그레이스를 마귀 들린 여성으로 만들었는가. 그녀가 혼령에 빙의되었기 때문도, 극심한 트라우마로 인해 정신 질환을 앓게 되었기 때문도 아니다. 그녀가 자신과 주변의 여성들을 애도할 것을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의 마귀들림은 죽은 이들을 위한 애도다.


최미리 기자

horoyoi@karts.ac.kr

(1) 미셸 드 세르토, 『루됭의 마귀들림』, (문학동네, 2013), p.181.

(2) 위의 책, p.203.

(3) 위의 책, p.179.

(4) 위의 책, p.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