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노력이 이루어낸 지평

왜 우리가 학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활동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가? 어떤 사람들은 이 명제를 그다지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혹은,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어머니 아버지 같아서’ 지지한다거나 ‘안쓰러워서’ 지지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학교신문’에 노동 관련 기사가 너무 자주 실리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었다. 물론 이는 다양한 기획을 충분히 마련하지 못한 우리의 잘못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학내 노동 문제에 대한 관심은 앞으로도 놓기 어려울 것 같다.

학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안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 예컨대 간접고용, 열악한 노동환경, 낮은 임금을 비롯한 여러 노동 현안은 곧 우리 사회가 해결해나가야 할 문제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학교 안에서 신문을 만드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이 곧 학내 언론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사회적 책무라고 느껴진다. 노동은 어떤 뉴스 기사 속이나, 정리해고의 부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타워크레인이나 철탑에 올라간 사람들한테만 존재하는 것
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니고 있는 지금 이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눈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노동이란 단어는 생각보다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가 그들을 지지해야 한다는 명제는 어떤 타자화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비정규직 노동자, 최소한 노동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이런 반론이 따라 나올 수 있다. “나는 예술가로 살아갈 것이므로, 또는 예술 전공 학생이므로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진 않을 것이다” 같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재고의 여지가 있다. 아마 이런 견해가 상정하는 상황은 말 그대로 어떤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삶일 것인데, 정말 그들은 노동자가 아닌가? 예컨대 지휘자라는 직업을 떠올릴 수 있다. 흔히 생각하는 노동자의 이미지와 지휘자라는 직업은 얼핏 연관되진 않는다. 그러나 지휘자가 어떤 악단에 소속되어 일하는 순간, 그는 계약서를 작성한다. 악단과 계약을 체결한 그는, 자신의 (예술적) 노동을 통해 서비스를 제공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활동이 ‘노동자’처럼 보이진 않을지라도, 그의 작업에는 노동으로서 속성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일은, 진정한 의미의 법치주의를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 다름 아니기도 하다. 노동이란 단어만 나오면 자동적으로 좌파니 불법이니 딱지를 붙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 그런지 따져보자. 사람들이 하도 파업이란 단어에 불법을 붙이다 보니 어느새 ‘파업’이란 말보다 ‘불법파업’이란 말이 입에 더 잘 붙게 되었다. 이러다 파업=불법이란 등식이 성립할까 걱정된다.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파업은 명백한 노동자의 권리 가운데 하나이다. 노동관계조정법에 명시된 파업 절차를 지키면 합법적으로 파업할 수 있다. 이러한 권리는 대한민국 헌법에 규정된 노동3권, 즉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에서 나온다. 단결권은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다는 권리이고, 단체교섭권은 노조를 결성하면 노조가 사용자와 대등하게 협상할 수 있다는 의미이며, 단체행동권은 파업권을 말한다.

다른 사안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이 사회에서 근로기준법만 제대로 지켜질 수 있다면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근로기준법은 최소한의 노동조건을 규정하고 있는데, 야간에 일한다면 야간노동에 따른 수당을 줘야 하고, 규정된 노동시간을 넘기면 초과근무수당을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해고는 반드시 서면으로 통지해야 한다는 규정도 있다. 1970년대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제 몸을 불사른 지 사십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근로기준법 하나 제대로 지키지 않아 생기는 문제들이 튀어나온다. 더 낮은 곳에 있는 노동일수록 가장 기본적인 법 규정조차 지켜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노동자들의 파업이 있을 때마다 툭하면 법치주의 운운하는 것은 일종의 기만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사용자들을 향해 법을 지켜달라고 투쟁하는 것일 뿐이다. 대부분 이러한 법적 규정들을 회피하기 위해 간접고용을 도입하는데, 우리 학교 또한 각종 업무를 하청업체에 위탁하고 있으며 이러한 방식은 사회 전체에 암세포처럼 퍼져나간 지 오래다.

또한 위에서 노동자에 대한 지지가 어떤 타자화에서 도출되어선 안된다고 말한 이유는, 그러한 생각 속에 일정 부분 ‘나는 노동자가 되진 않을 것이지만 최소한의 양심을 위해 노동자들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라는 속내가 깔릴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과도한 일반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이러한 속내는 결국 노동운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미 노동자를 위해 싸운다고 말했던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 결말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들은 결국 금뱃지 하나를 달기 위해 철새 정치인이 되거나, 그 이후에는 노동자의 현실을 외면하거나, ‘현실적 이유’를 들며 등을 돌리곤 했다. 노동운동의 발전은 좌파정당의 성장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러한 사실은 민주당계 정당이 집권했을 때 정말로 한국의 노동현실이 개선됐는지 생각해 본다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의 활동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다른 이유는 그들이 노동의 최전선, 또는 최저선에 놓여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청소노동이나 경비노동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열악한 노동환경을 지닌 직종 가운데 하나다. 노조 하나 만들기도 쉽지 않고,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월급을 받거나 최저임금을 겨우 넘기는 돈을 받으며 일해야 한다. 이것들은 이미 우리가 지난 일이 년간 학교에서 봐온 것들이다. 그들이 처음 노조를 만들기로 결의했을 때 학교 당국이 얼마나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는지 떠올려 보라. 박종원 전 총장은 재임 시절 노조를 만들고 총장실을 방문하려는 노동자들을 피하기 위해 본관 엘리베이터를 정지시키고는 관용차를 타고 학교를 빠져나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노력 덕분에 최소한 지금 학교 당국은 미흡하게나마 노조의 존재를 인정하고 대화 주체로서 이들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들의 노력은 훗날 이 사회에서 노동의 최저선을 끌어올린 투쟁으로 기록될 것이다.

모든 사회문제가 그렇진 않겠지만, 적어도 노동문제에선 어떤 이들의 투쟁이 전체 사회적 조건의 최저선을 견인한다. 전태일이 분신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투쟁을 벌이지 않았더라면, 김진숙 씨가 한진중공업 타워크레인에 올라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정리해고가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간접고용 문제의
심각성이나 비정규직 문제를 굳이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그들의 노력이 이루어낸 지평 위에 서 있다.

 

 

(선승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