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야 미안해 2화: 어떤 살해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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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짐승』, 에밀 졸라

주의 사항: 신간 소개를 빙자한 종이 낭비입니다. 책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기대하지 말 것!

 

00. 책소개는 귀찮으니…….

 

에밀 졸라의 『인간 짐승』이 2월 28일, 국내에 초역되었다. 출판사 공식 편집자 리뷰를 보자.

문학동네에서 국내 최초로 소개하는 에밀 졸라의 충격적 문제작『인간 짐승』(1890년 작)은 자연주의 문학의 절정을 이루는 ‘루공마카르’ 총서 스무 권 중 열일곱번째 작품이다. 루공마카르 총서는 유전(‘자연적 역사’)과 환경(‘사회적 역사’)이라는 과학적 방법론으로 제2제정기 프랑스 사회를 낱낱이 해부해 객관적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겠다는 포부로 기획되었다. 1871년부터 1893년까지 거의 매년 한 권꼴로 출간된 루공마카르 총서의 동력은 바로 “분노하며 살 것, 한 줄이라도 쓰지 않으면 하루라도 살지 말 것”을 좌우명으로 삼았던 졸라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었다.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인기 작가” “19세기 최초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미 명망을 얻은 졸라가 루공마카르 총서에 대한 열정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저술한『인간 짐승』은『테레즈 라캥』『목로주점』에 이어 다시 한번 프랑스 문단에 충격을 가했다.

제목에서부터 인간과 짐승을 대립시킨 이 소설은 ‘인간다움’과 ‘짐승스러움’이라는 두 축의 패러다임 아래 배열할 수 있는 요소들을 복잡하고 교묘하게 얽어 견고한 서사를 이루어낸다. 당시의 삶 속에 켜켜이 틀어박힌 세기말의 징후들을 ‘범죄-욕망’과 ‘철도-기계’라는 두 절단면을 통해 선명하게 보여준다. 당대의 짐승스러움에 대한 분노와 경멸을 담아낸 이 소설은 나아가 그 짐승스러움의 연원을 관찰과 해부를 통해 들춰내고 그에 근거해 인간다움의 전망을 제시한다.

–인간 짐승』 편집자 리뷰 中

 

『인간 짐승』은 죽음을 다룬 소설이다.(이것이 죽음에 대한 소설이란 뜻은 아니다.) 작 중에는 7번의 직접적·간접적 살인 행위가 나온다. 그로 인해 사망한 피해자는 25명에 이른다. 산술적 계산으로는 거의 스무 쪽당 한 명이 죽는다. 물론 이 모든 죽음이 균질한 밀도로 배열되어 책장을 넘길 때마다 꾸준하게 사람이 죽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살인과 죽음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중요한 동력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소설 속 등장하는 개별적 죽음들에 언급하는 것은 오히려 책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릴 수 있을 테니 여기까지만 하자. 이렇게 책 소개는 이번에도 날로 먹었다. 그러면 어디, 종이 낭비를 시작해볼까.

 

01. 나는 과연 이 고양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절대로 죽이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껏 세 마리의 고양이를 집에 들였다. 첫째는 하루 만에 가출했고, 셋째는 구정날 아침에 죽었다. 둘째는 베개보다도 더 큰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며 잘살고 있다. 침대에 누워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마지막 남은 둘째는 앞발을 내 팔뚝에 대고 꾹꾹 누르고 있다. 가끔은 내 볼에 자기 볼을 비비기도 하고, 담배 냄새나는 손일 텐데 혀로 할짝거리며 핥기도 한다. 마감은 이미 지났는데 고양이만 쓰다듬으며 놀고 있다. 신문사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린다. (국장은 SNS를 통해 존나존나존나거리고 있다. 저번 화에 이어 이번에도 글이 신문사 뒷담화로 흐른다.)

어찌 되었든 이 고양이가 나이가 들고 병이 들어 병원에서 안락사를 권한다면 난 커다란 가마솥을 준비할 테다, 아주 커다란. 거기에 고양이를 넣고 푹 고아 삶아 먹을 테다. 하지만 솥이 너무 크고 무거워. 가스레인지만 박살 나버리겠지. 그럼 난 솥에서 고양이를 꺼내 심장을 포(脯) 떠먹을 거야. 이건 토테미즘일까, 아니면 카니발리즘일까. 그런데 문제는,

 

옆에 누워 기분 좋다고 골골거리는 진동을 내고 있는 고양이를 볼 때면, 종종,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는 거다. 바로, 지금처럼.

 

미안해, 당신이 점심시간 식당에 들어가다 신문을 집어 들었다면. 이 글 때문에 비위가 상해, 기껏 받아 든 식판을 퇴식구에 그대로 버리진 않기를. 변명하자면, 나도 뉴스에 나오는 동물학대범은 아니라고 스스로 믿어. 그 녀석을 병원에 데리고 갈 때마다 한 마리 삵 같은 육중한 몸매에 의사가 아무리 놀래도, 혹여 녀석 입맛 떨어질까 봐 싸구려 사료는 살 생각도 못 해. 하루면 망가지는 장난감을 갖다 바치느라 틈날 때마다 인터넷 쇼핑몰을 검색해. 아니, 너무 물질적인 것으로만 말하나.

한때(?), 환청이 심하게 들릴 때가 있었어. 의사는 입원을 권유했지. 진지하게 고민했어. 결국, 입원은 하지 않고 버텼어. 도저히 고양이들을 버려둘 수 없었어. 길에서 떠돌던 애들을 거두었으니 끝까지 책임을 져야만 했어. 단순히 책임의 문제는 아니야. 그런 날 있잖아, 아무 이유 없이 울고 싶은. 그때 체온을 가진 무언가에 얼굴을 파묻고 울어본 적이 있다면 무슨 말인지 알 거라고 믿어. 혹은 악몽을 꾸다 비명을 지르며 깼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괜찮다는 듯이 쓰다듬어 준 경험이 있다면 말이야. 그래, 고양이들이 그랬어. 이건 단순히 어떤 대상에 대한 애정의 차원이 아니야. 아무리 귀찮아도 고양이 밥을 사기 위해 일해야 했고, 아무리 죽음 충동에 시달려도 이 녀석들을 두고 갈 수가 없었지. 그러니깐 고양이는 내가 삶을 추동하는 힘이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덜미를 쓰다듬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언제나 경계해야 했다. 옆에 찰싹 달라붙어 애정을 표하는 고양이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이 욕망은 대체 뭐란 말인지(정답은, 내가 바로 이 바닥의 미친놈).

 

02. 한 살인은 다른 살인의 논리적 귀결이 아니던가

 

밤이 오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불면의 핑계가 생겼다고 좋아했다. 하릴없이 컴퓨터에 앉아 있다가 영화 『월드워 Z』를 봤다. 시체들이 걸어 다녔다. 주인공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시체들의 머리통을 하나씩 박살 냈다. 시체들의 한가운데서 악취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다. 영화를 보다 말고 내 어깨에 코를 묻고 킁킁거렸다. 무슨 냄새가 났다. 홀아비 냄새는 분명 아니다. 진작에 나를 살해했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이건 시체 썩는 냄새다.

 

생물학적 죽음을 야기하지 않는다더라도, 살인은 주변에 만연하다. ‘너’와 ‘나’의 세계가 일치한다는 믿음이 깨지는 순간, ‘나’의 내적 질서는 붕괴한다. 이것은 개인적 충격일 수도 있고, 보편적 역사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붕괴 전의 ‘나’와 붕괴 후의 ‘나’는 근본적으로 다른 법칙 속에서 움직이는 별개의 존재라는 지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가 무너지는 매 순간마다, 과거의 ‘나’는 죽었다. ‘나’의 현존을 구축하는 것은 결국 무수히 많은 살해의 추억이다.

당연하게도 ‘너’와 ‘나’는 모두 살인자다. 세계의 충돌은 언제나 상호적이므로 “하나의 살인은 다른 살인의 논리적 귀결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작품 내에서 이 문장이 쓰인 맥락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용이다.) 그리고 ‘너’의 죽음은 ‘너의 너’의 세계를 뒤흔든다. 원자력 발전이나 핵폭탄에 쓰이는 핵분열의 연쇄 반응 마냥 연쇄반응이 벌어진다. 시대정신(zeitgeist)이란 어쩌면 ‘한 시대의 문화적 소산에 공통되는 인간의 정신적 태도나 양식(樣式) 또는 이념’이라기 보단 ‘나’와 ‘너’와 ‘너의 너’로 이동하는 살해의 연쇄 파동이 아닐까.

여담이지만, 내가 너의 세상을 끝장내는 것과 네가 나의 세상을 끝장내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새로운 사랑을 찾을 수 있었다. 사실은 이 말이 하고 싶었다.

 

03. 한 번 야만적인 짐승은 여전히 야만적인 짐승일 뿐

 

소설에서, 자크는 살인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히는 순간 “머릿속은 군중의 아우성으로 가득차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귀 뒤로 뜨거운 불기운이 치고 들어와 머리를 뚫고 두 팔과 두 다리로 뻗쳐내려가더니 급기야 그의 영혼을 육신에서 몰아냈으며, 그 자리에 다른 존재가, 짐승이 저돌적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자신이 아닌 제3의 존재가, 비非인간적 존재가 불쑥 솟아나는 것이다.

블랑쇼는 “문학은 ‘나’를 말할 수 있는 힘을 앗아가는 삼인칭이 우리 내부에서 태어날 때 시작된다”고 말했다. 생물학적인 어떤 죽음에 대한 한정을 초월해서 살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살인 충동이야말로 ‘나’를 말할 수 있는 힘을 앗아가는 어떤 삼인칭의 존재에서 기원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모든 문학은 유사 살인의 행위가 아닐까. 물론 이 글은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살인과는 전혀 딴 이야기겠지만.

 

(주동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