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하기 어려운 일들에 대한 글 – 병원에 있다 보면

요즘은 병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다. 아파서는 아니다. 병원에 오랫동안 눌러앉아 있는 건 여덟 살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당시 나는 병원을 집처럼 들락거렸는데, 역시 아파서는 아니었다. 엄마의 직장에 놀러갔을 뿐이다. 엄마는 인천의 종합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다. 나는 쉬는 날마다 병원에 갔다. 노조위원들의 사무실에서 놀았다. 사무실은 병원 복도 가장 안쪽에 아지트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작고 햇빛이 잘 드는 방이었다. 나는 그 곳 소파에 앉아 내내 만화 영화를 보았다. 대부분 지브리와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었다. 엄마의 컴퓨터를 가지고 놀기도 했다. 간간히 엄마의 동료들(이른바 ‘이모들’)이 와서 초콜릿이나 과자를 주고 갔다.
이런 첫인상은 오랫동안 나의 인식을 지배했다. 병원을 생각하면 사무실 소파에서 본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또렷한 색감이나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함께 묶여 나왔다. 병원이라는 단어가 주는 질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꽤 오랜 시간 그랬다.
이 몇 주 사이, 병원에 대한 내 인상은 많이 변했다. 사무실이 아닌 병실에서 지켜본 병원은 슬픔과 우울함이 압도적인 공간이었다. 보조침대에 누워 밤을 지새우다 보면 사람들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특유의 냄새 또한 병원 곳곳에 끈끈하게 묻어 있었다. 약 냄새와 지린내, 늙어가는 사람들의 냄새였다. 집에 돌아와도 옷깃이나 손등에서 그 냄새가 났다. 쉽게 빠지지 않아서, 그대로 놔둘 수밖에 없다.
병동으로 가려면 장례식장을 지나쳐야 한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지나쳐 병동으로 들어오면 어딘가 버석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병동 옆 휴게실에 꽂힌 패션 잡지들도 기이했다. 죽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산 사람들의 지루함을 달래주기 위해 배치된 읽을거리들은 부담스러운 선물처럼 느껴졌다. 이런 생각들은 소리나 냄새와 같다. 한없이 부풀어서 바깥에 있을 때조차 끊임없이 새어나왔다. 서점에 가득 쌓인 잡지들을 볼 때, 지하철에 가득한 사람들을 뚫고 나올 때, 페이스북에서 넘실거리는 고민들을 볼 때, 자기 전 오롯이 감긴 시간에도 생각은 옷깃 속에서부터 풍겼다. 한가운데에는 늘 죽음이 있었다.
여덟 살 무렵 내 속에 있던 병원은 죽음과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오로지 치유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실패는 없었다. 퇴원은 무조건 완치를 의미했다. 퇴원한 사람들이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처럼 노래라도 하면서 뛰어다닐 줄 알았다.
죽음이란 단어 혹은 개념이 나타난 순간, 그런 이미지들은 오래된 집처럼 풀썩 주저앉았다. 병원에 있어 치유란 목적에 불과했다. 확실한 결과가 되어주지는 못했다. 병원은 오히려 죽음에 더 가까운 공간이었다. 살날과 죽을 날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사람은 모두가 다 죽는다’는 알량한 말로는 위로할 수 없는 사람들이. 나는 병원이 무서워졌다.
죽음은 언제나 두려웠다, 병원이 따뜻한 곳이었던 시절에도 그랬다. 가끔은 잠드는 것조차 무서웠다. 잠에 들었다가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이게 내 마지막 밤이면 어떡하나, 이런 생각이 찾아들면 낮에도 오금이 저렸다. 삶이 끝날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 거대하고 비참한 일로 느껴져서, 아예 외면한 채 살고 싶었다.
지난 며칠간 신음소리가 흐르는 새벽의 병실에 누운 채, 나는 죽고 싶지 않다고 되뇌었다. 병실 침대가 아닌 보조 침대에 누워 있어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한 뒤에는 어김없이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공포는 어쩔 수가 없다. 그 안에는 내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것만이 아닌, 타인을 떠나보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들어 있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타인과의 이별을 견뎌내야 할지 생각하면 끊임없이 막막해져 온다.
잠든 환자 옆에서 묘소와 영정 사진을 고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결국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사랑을 표현하라는 얘기는 추상적이고 무책임하게 느껴진다. 그저 곁에 존재하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요즈음의 나는 이런 말들에 의지해 움직이고 있다. 사실은 그것 외에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곁에서 안간힘을 다해 살아 있어야 한다. 나는 근사한 사진을 고르고 햇빛이 비치는 자리를 찾는 것 또한 표현의 하나라고 인정하기로 했다 . 아직은 그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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