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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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볕이 따뜻하게 들던 점심시간에 우연히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중, A가 문득 각자 ‘어느 정도까지의 야망’을 갖고 있는지 물었다. 이 ‘야망’의 기준은 구체적이고 세속적(?)이어야 한단다. 나의 차례가 되자, 나는 최근에 본 작품을 예로들며, 그 작품을 만든 작가처럼 아주 잘 팔리는 작품을 만들지 않아도 어떤 식으로든 자유롭게 작품을 만들도록 돕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내 꿈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런 ‘꿈’을 갖고 있다. 현재 나는 예술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다. 그러나 얼마 후엔 졸업을 할테고 ‘예술학교’라는 소속 없이 공중에 뜨고 나선 어디로 가게될지, 기존 형태의 ‘예술’이란 것에 계속 발 붙이고 살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개인적인 자신감이나 신념을 떠나, 구조적인 차원에서 말이다.
아마 한달 전 쯤에 교내에서 ‘아트스타 코리아’라는 검은 바탕에 노란 영문 글씨가 씌어진 포스터가 붙여진 걸 본 것 같다. ‘슈퍼스타 케이’, ‘케이팝 스타’와 같은 신인가수 발굴 오디션 프로그램의 열기가 줄어간 이 분위기에서, 새로운 ‘아티스트’를 찾아 육성한다는 ‘예술’ 오디션 프로그램이 생긴다는 소식이었다. 지난 2010년 6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방영된 미국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 ‘워크 오브 아트(Work of Art: The Next Great Artist)’는 신인 패션 디자이너 서바이벌 프로그램 ‘프로젝트 런웨이’와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 ‘탑 쉐프’를 만든 프리티 매치스 프로덕션(Pretty Matches Productions)과 매지컬 엘브스 프로덕션(Magical Elves Productions)의 합작이었다.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형식의 ‘작가’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슈퍼스타 케이’를 만든 씨제이 이앤엠(CJ E&M)의 계열사 스토리온이 가나아트센터와 손을 잡고 시작했다. 왜 안하나 싶었다. 대중매체와 돈, 그 중에서도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란 것이 이제 예술계에까지 파고든 건 그다지 경악할 만한 일이 아니다.
3월 30일부터 방영되는 ‘아트스타 코리아’는 최종선발된 15명의 ‘아티스트’가 “회별 주어지는 다양한 미션을 통해 아티스트의 재능과 개성, 그리고 작업 프로세스와 작품을 보여주는 서바이벌 방식의 프로그램”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이 프로그램의 공식 홈페이지에선 ‘아티스트’ 15인을 소개하는 글과 영상을 볼 수 있다. 각 사람마다 ‘낭만 아웃사이더’, ‘최연소 반전 브레인’, ‘심의 브레이커’, ‘순수와 열정의 보헤미안’ 등의 캐릭터를 나타내는 (거의 대부분 외래어를 포함하는)타이틀이 붙여져있고, 카메라 앞에 선 ‘아티스트’들은 주어진 캐릭터를 연기 하듯이 자신을 소개한다. 몇 사람의 소개영상을 본 나는 조금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이것을 보고 역겹다고 생각하는 무리가 있을 것이고, 출연자들을 멋있다고 생각하며 선망하는 수요도 어딘가엔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저 마음이 답답했다. 어떤 식으로 이미지가 소비되는 걸 택하고서라도 ‘작업’을 하겠다는 출연자들을 재단하거나 동정하는 차원을 넘어, 창작과 예술을 하고 싶어하는 우리가, 우리 세대가, 당장 내가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싶어서 혼란스러웠다.
‘아시아투데이’의 정지희 기자는 지난 1월 29일, “‘아트스타 코리아’를 위한 쓴소리”라는 제목으로 이 프로그램에 대한 우려의 글을 게재했다. 정 기자는 “무엇보다도 ‘아티스트 코리아’는 거대 자본과 미디어 노출을 크게 중요시하는 미술계의 상업적 측면을 부각시키리라는 점에서 우려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숭고한 예술 정신보다는 미술계의 스타 탄생에만 치중하는 프로그램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돈이 작품을 만들어주는 건 아니지만 작품을 만들려면 자본이 필요하다. 전시를 하려면 돈과 공간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전시를 하고 싶지만 돈은 없는 사람들의 수는 매우 많다. 이들이 택하는 길은 특정 기관이나 회사가 후원 및 주도하는 단체전시에 참가하거나 포트폴리오를 제출해서 지원금을 타내는 식이다. 신기하게도, 크고 작은 레지던시나 공공지원사업 프로그램은 예전에 비해 점점 많이 생겨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지원을 받아 작업을 하고 전시를 하고 싶은 사람들은 각종 공모에 지원을 한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제출하고 선정된 사람들은 기관이나 회사가 주는 ‘기회’를 얻어 전시를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작품을 만들고 전시를 하는 사람들은 ‘작가’로 불리기 시작한다. 이렇듯, 기관이 진행하는 전시는 점점 많아지고 ‘작가님’들의 수도 점점 늘어난다. 하지만 기관이나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회사는 돈을 주는 입장이기 때문에 ‘갑’의 위치에 어쩔 수 없이 자리한다. 그러니까 여러 ‘작가님’들은 지속적으로 작업을 하고 전시를 하기 위해 이런저런 지원금을 받는 것을 택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각종 입주작가 프로그램 등의 수명이 얼마나 갈지 모른다는 것이며 어떤 경로로든지 양산된 ‘작가님’들이 가야할 곳, 혹은 갈 수 있는 곳이 어디가 될지는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가 어떤 식일지는 ‘21세기 한국 현대미술의 질적인 발전을 위한 청년작가육성 및 발굴과 미술대학간의 대화의 창구를 열고자’하는 취지로 1999년에 창립되어 올해까지 총 4회 개최된 ‘공장미술제’가 어느 정도 보여준 바 있다.
지난 1월 10일에 문화역서울284(구 서울역사)에서 열린 국내외 미술대학 및 대학원생의 단체전시 《공장미술제_생산적인 너무나 생산적인(이하 ‘공장미술제’)는 미술제에 참여한 젊은 미술가 90여명에게 지원금을 전혀 지급하지 않아 논란에 휩싸였다. 공장미술제의 홍보물에 씌어 있는 안내문은 ‘“자연스럽게 축적되는 젊은 작가들의 아트 아카이브 데이터는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저장”되고 “이는 향후 미술계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고 가늠하게 하는 도구로 활용될 것”이며 “또한 전시에 참여하는 국내/외 유수의 예술교육기관들 간의 콜로키움 형성을 유도하여 21세기적 대안 예술교육 프로그램 개발의 기반을 마련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공장미술제는 한국 미술사와 미술교육 발전에 기여함과 동시에 청년 작가의 등용문이 됨은 물론이고, 실험성과 동시에 독창성을 필두에 둔 젊은 예술을 상징하는 신개념 무경계 예술 페스티벌로 발전하게 될 것”이란다. 내세우는 목표가 너무나 거창해서 가슴이 뜨거워지기보단 외려 민망해진다. 이런 거창한 목표가 있었음에도 공장미술제는 어째서 우리의 친구들인 어린 학생작가들에게 한 푼도 주지 않고 미술제에 참여하도록 했을까.
이에 대해 미술가 겸 전시기획자 홍태림 씨는 지난 14일 자신이 운여하는 웹저널 《크리틱-칼》에 ‘제4회 공장미술제의 심각한 문제점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을 게시했다. 홍 씨는 “단지 전시행정(展示行政)에 학생 작가들이 무더기로 동원 되었을 뿐인 것”이며 “작가가 전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별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겠으나 이것들이 모여 기형적인 문화를 만들어 낸다”고 주장했다. 또, “이번 공장미술제에 참여하는 학생 작가들은 주최 측에서 사례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물론 자신의 작품을 외부에 노출할 기회가 많지 않은 학생 작가들에게 학교를 벗어나 외부에서 전시를 하는 경험은 값진 경험이다. 그러나 일부 기성세대들이 학생 작가들이 열망을 악용해 전시에 대거 동원한 것은 윤리적 의식이 결여된 태도”라고 덧붙였다.
이런 식으로 ‘예술가’들은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 즉 행복하기 위해 을의 자리에 자처해서 들어가고 그러다보면 물리적으로도 예술적 위치적으로도 어느정도 연명은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만들어진 작가의 이미지와 작품은 과연 누구의 것이며, 그 모든 끝에 그들은 행복해지는가. 공장미술제의 부제인 ‘생산적인 너무나 생산적인’이란 캐치프레이즈는 과연 무엇이 생산적이라는 얘기일까.
미술평론가 임근준은 지난 2012년 11월 12일,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를 통해 “평론을 업으로 삼는 나를 분노케 하는 미술계의 비도는, 크게 두 가지다. 만연한 비도 가운데 으뜸가는 문제는, 젊은이들을 저임금이나 무보수로 부려먹는 엉터리 인턴 프로그램이다. 버금은, 청년 작가들에게 번듯한 전시 기회는 제공하지 않으면서 끝없이 포트폴리오 발표와 작업 해설을 요구하는 사이비 신진 작가 발굴 프로그램”이라고 주장했다. 임 씨는 “한국만 해도, 전국의 미술대학 수는 135개에 이르고, 재학생은 8만여 명에 이른다. 디자인 분야는 수가 더 많아서 매해 약 3만5천 명의 디자인 전공자가 배출된다”며 “그렇다면 이 많은 미술 전문가들은 어디로 갈까? 다른 직업을 알아보는 사람도 부지기수지만, 지역마다 군소 비엔날레 등의 페스티벌과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서서 수많은 이들에게 생존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설사 재능이 없는 자라 해도 얼마든지 ‘스펙을 관리하며’ 이력서를 늘려갈 수 있다. 하지만 양질의 기회는 하늘의 별 따기다”라고 기술했다.
다시 ‘아트스타 코리아’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이 케이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참가자들은 스스로가 어떤 유명세를 위해서나 연예인과 같은 ‘아이콘’이 되고 싶어 출연을 결심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백 퍼센트 그런 마음만 품고 한 결정은 아닐테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멘트를 내뱉으며 과장된 몸짓을 선보이는 그들의 작품에 진정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닐테다. 하지만 이런 프로그램이 생겨 방영된다는 건 단순히 시청자의 입장으로서 느낄 불쾌감을 우려하는 것을 넘어, 앞으로의 우리나라 문화예술계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 이런 사조 속에서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를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생각하게 한다. 그저 방송이니 가볍게 볼 수 있을까? 이 프로그램의 존재를 통해 현재 예술계를 바라보는 건 너무 과장된 해석일까? ‘아트스타 코리아’는 텔레비전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라는 극단적인 포맷으로 여타 많은 점잖은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지원 프로그램이며 공모전 등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것만 같다.
언젠가부터 ‘대안’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단체나 기획에 대한 믿음을 잃어갔다. ‘대안’이라 이름표를 붙이고 나오는 것들이 결코 대안적이지 않다는 걸 수차례 보았기 때문이다. 공장미술제 역시 “대안 예술교육 프로그램 개발의 기반”을 마련하는 걸 목표로 삼지 않았던가. 하지만 갈수록 대안적인 무언가에 대한 필요성을 느낀다. 그냥 원래 다 이런 거라며, 마음을 넓게 가지면서 따라가기엔 못 견디는 부분이 아직 너무 많다. 우리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어필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지 않은가. “그냥 잘 살고 싶다오. 편히 잘 살고 싶다오. 있는 그대로 살고 싶다오. 그게 그리 큰 꿈이었던가”하는 무키무키 만만수의 노래 ‘투쟁과 다이어트’의 가사처럼, ‘있는 그대로 사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그러니 나중이 아닌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함께 연구하고 마음을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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