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2019년 11월 28일

음악가의 미술관

MMCA 그리고 《게으른 구름》, 《광장 3부》, 《올해의 작가상 2019》


“눈에는 눈꺼풀이 있으나 귀에는 닫개가 없다. 이 자체만으로 귀는 노출에 무방비한 수동의 기관이다. 귀는 소리를 듣는 기관이며, 따라서 소리에 무방비하다.”(1) 우리는 24시간 소리와 함께한다. 감히 소리를 선별하여 들을 수도, 차단하여 진공으로 만들 수도 없다. 그건 미술관에서도 마찬가지다. 미술이 청각을 침범한 지는 오래되었다. 작품은 소리를 뱉어내고 관람객들의 귀는 열려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작가들의 사운드를 출력할 때 스피커, 헤드폰, 사운드바 등을 사용한다. 전시공간과 작품에 맞춰 음향을 제공하지만, 그 방식이 안일하다. 문제는 한 전시장 안에 스피커를 사용하는 작품이 두 개 이상일 때 발생한다. 결이 다른 작품들의 소리가 섞여버리면 한 작품이 다른 작품을 방해하게 된다. 《광장》의 <잠>의 소리가 <막스에게 보내는 편지>를 잡아먹고, 홍영인 <새의 초상을 그리려면>의 새소리가 박혜수의 전시장 안에 울린다. 관람객들은 이를 감안하고 감상해야 한다. 비교적 영상의 크기가 작거나 소리가 중요한 작품은 헤드폰을 설치하는데, 이는 다른 작품 감상을 해치지 않으나 설치 개수가 한정되어 있다. 주말에 관람객이 몰리게 되면 다른 관람객이 다 감상하기를 기다리거나, 소리 없이 작품의 형상만 보고 넘어가야 한다. 그래서 어떤 작품들은 대안을 모색한 듯하다. 홍영인의 즉흥 연주 퍼포먼스 <하얀가면>과 김아영의 <다공성계곡> 영상들은 작은 음량의 스피커와 헤드폰이 동시에 설치되어 있다. 특히 <다공성 계곡>은 세 영상 앞에 각각 우퍼가 아래를 향한 초지향성 스피커가 달려있다. 따라서 스피커 밑 의자에 앉아야만 스피커 소리가 잘 들린다. 그러나 지금은 스피커 밑 의자에 두 개의 헤드폰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헤드폰을 쓴 채 스피커 밑 의자에 앉게 하는 모양새다. 두 명의 관람객이 사운드를 독점하게 되는 것이다.



홍영인, <하얀 가면>, 2019

작가들이 사운드를 구상하고 구사하는 것은 비디오 아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듯하다. 물론 미술관 안의 모든 비디오가 사운드를 수반하지는 않으며, 그렇기에 영상에 삽입된 사운드는 더욱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 된다. 6전시실 지하로 내려가면 김순기의 여러 영상 작업 중에서도 <바카래스 호수>의 음산한 소리가 귀를 사로잡는다. 공포물에서나 들었을 법한 사운드는 사람의 호흡을 마이크 가까이에서 녹음한 것으로 추정된다. <준비된 피아노>에서는 작가가 숲에서 업라이트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불태운다. 유럽을 배경으로 한 클래식 악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쟁의 계면 선율에 불타는 소리가 위에 얹힌다. 두 작품의 사운드는 어디인지 모르게 함양아의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1.0>과 <잠>과 닮아있다. <정의되지 않은 파노라마 1.0>은 피아노를 타악기처럼 연주한다. 저음과 불협. <잠>은 낮은 C-D를 중심으로 재난을 암시한다. 노이즈가 끊이지 않고 귀를 자극한다. 김순기와 함양아의 사운드는 영상에 부정적인 분위기를 형성하지만 단조롭고, 들어도 안 들어도 그만인 ‘조력자’ 역할에 그친다. 김희천의 <썰매>와 김아영의 <다공성 계곡 2:트릭스터 플롯>의 소리는 그나마 주체적인 기능을 한다. <썰매>는 레이싱 게임 사운드와 다큐멘터리의 나레이션이 어우러지면서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다공성 계곡 2:트릭스터 플롯>은 허구 생명체의 목소리를 화음으로 변조된 음성을 통해 표현했다. 그러나 작품 전체적으로 작가들의 음향적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작가가 원하는 감상으로 관람객들을 유도하기 위해 작가들은 추상의 사운드를 충분히 조합, 해체, 변주하며 고민해야한다.


미술관 중간중간엔 사운드 아트도 관객을 맞는다. 김순기가 꾸민 정원은 오방의 스피커가 완성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래돌/밭돌>은 돌의 노이즈에 귀를 기울이고, 김아영 <판게아 목소리>는 연두색 복도에 외계적 목소리 자체가 작품으로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단순히 미술관에 소리를 끌어왔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가? 관람객에게 작가가 선별하고 편집한 소리와 음악에 대한 진지한 감상을 유도하기보다는, 신선함 자체가 목적이 된다. 다시 말해, 전시장이라는 특수공간 밖으로 나가 진지하게 음향에 대해 고민한 결과물들과 마주해 비교하면 유치한 작업이 되어버린다. 반면 신승백 김용훈의 <마음>은 관람객들의 귀를 자극한다. 작품은 여러 개의 오션드럼이 시차를 두고 데이터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음악에서 파도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오션드럼은 많아도 3개 이상이 동시에 연주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작가는 유일하게 녹음되지 않은, 그 자리에서 연주되는 15개의 오션드럼으로 깜깜한 전시장을 바다로 만든다. ‘감상’이 가능한 것이다. 관람객은 언플러그드 라이브로 압도당한다.



김순기, <노래돌/밭돌>, 1988
김하영, <판게아 목소리>, 2019

아직은 미술관도 작가도 작품의 사운드를 다루는 데에 세심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소리는 작품 감상의 차원을 달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미술관도 작가도 더 세심해져야 한다. 관람객들의 귀는 열려있다.


김여진 기자 

yeojinkim@karts.ac.kr


(1) 파스칼 키냐르, 『음악혐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