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 학술·비평
2019년 11월 9일

청취 기록에 관한 소고

음악 감상에서의 엿듣기


0.

나는 완강하게, 깨어나지 않은 채, 단절과 적대감이라는 타고난 운명에 사로잡힌 채 문 뒤에 또다시 숨어 있었으니, 활짝 열려고 생각했대도 헛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것도. 지금도 못하고, 앞으로도 못할 것이다.(주1)


『문 뒤에서』(1964)는 이탈리아의 유대인 작가 조르조 바사니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사적인 고립감 속의 청소년 화자는 카톨리카라는 동급생에게 동경을, 루차노라는 또 다른 동급생에게는 친근감과 반감을 동시에 품고 있다. 카톨리카는 화자의 친구이길 자처했던 루차노가 실제로는 화자에 대해 어떤 험담을 하고 다니는지를 귀띔하며, 미리 자기 집으로 와 문 뒤에 숨어 루차노의 말을 들어보라고 제안한다. 화자는 그 말대로 하지만 루차노의 모욕에도 문 너머로 나서는 일 없이 집으로 돌아오고, 이후 루차노가 화자를 찾아왔을 때에도 진실을 밝히지 않기로 한다. 결국 화자는 문 뒤에 남았으며 한편 그 시절을 지나서도 계속 거기에 머물러 있다. 페라라 소설 연작 중 네 번째인 이 소설의 첫머리에서 바사니는 “그후 흐른 세월은 결국 아무 소용이 없었다”(주2)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에 대한 방증의 하나로, 연작 중 더 먼저 쓰여진 『금테 안경』(1958)에서도 ‘성장’은 여전히 격렬한 고독감으로, 유배와 망명의 이미지로, ‘자기인식’과 그 불행한 지속(에 대한 예감)으로 이야기된다. “나의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주3)이라 선언했던 이는 “나에게 주어진 망명을 나는 영광으로 받아들이노라”(주4)라는 구절을 다시 한 번 자신의 좌우명으로 받아들인다.


1.

이 글의 중점은 바사니의 소설에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문 뒤에서』로 글을 연 것은 ‘나’에게 낯설지 않은 어떤 듣기의 자세가 삶의 자세로까지 결정되어 버린 화자의 상황을 음미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문 뒤에서』를 통해 이 글이 집중하는 어떤 듣기란 바로 (음악 감상에서의) 엿듣기이며, 말을 듣는 것과 음악을 듣는 것은 물론 다른 일이지만 여기서는 비약을 감행하고자 한다.

음악 듣기에서의 엿듣기에 관해 우리는 벌써 여러 가지 경우를 상상할 수 있다. 지각해서 음악당에 들어가지 못했을 때, 한 곡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로비에 앉아있다 보면 문밖으로 작게 새어 나오는 음악을 엿들을 수 있다. 어디에나 음악이 (쏟아 부어지듯) 넘쳐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도 있는데, 매일 똑같은 재즈 플레이리스트가 반복되는 카페에 가서 굳이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을 때면, 그 음악을 엿듣듯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다 보면 거꾸로 내가 선택한 음악 너머로 카페의 배경음악을 엿듣게 되는 상황도 생기곤 한다. 내가 속한 우연들의 겹침에 의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엿듣기의 은유를 붙잡을 수 있게 만들어진 음반들도 존재한다. 교회 청소부를 위한 오르간 음악(아이네 오드와이어의 <Music For Church Cleaners>), 혹은 기억 너머의 부식된 음악(더 케어테이커의 <Selected Memories From the Haunted Ballroom> 등)을 엿들어 보라.


한편, 상황 설정을 넘어 ‘듣기’의 본질적인 단계에서부터 ‘엿듣기’에 대해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특히 철학자 장-뤽 낭시와 낭시의 영향을 크게 받은 철학자·음악학자 페테르 센디가 이러한 접근을 애호하는데(낭시는 『Listening』에서, 센디는 『All Ears: The Aesthetics of Espionage』에서 이를 언급한다), 시작은 단어의 역사를 들추는 것에서부터다. 프랑스어 동사 écouter는 “주의 깊게 듣기,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기”라는 뜻이다. 그런데 과거, 명사 écoute는 (엿)듣는 사람, 그리고 누군가가 숨어 비밀스럽게 들을 수 있는 장소를 뜻했다.(주5) 듣기는 적어도 프랑스(어)의 역사에서 처음에는 엿듣기를 의미했고, 듣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냥은 접근할 수 없는 의미에로 귀를 뻗는(stretch) 것, 증대, 염려, 호기심과 불안이다.(주6) 엿듣기와 듣기의 접촉은 그렇게 ‘듣기’의 지극한 특성을 다시 비추는 것 같다. 한편 센디는 성경을 포함한 여러 미학적 장면을 통해 듣기와 엿듣기 사이의 이러한 친연성에 접근하고, 그리하여 소리와 듣기를 예비하고 기대하며 선취하는 엿듣기를 ‘듣기’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까지 본다. (그렇지만 센디는 이후 오르페우스와 카프카를 통해 엿듣기는 듣기를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하며, 결국 엿듣기란 불가능으로서만 가능함을 주장한다. 영어 번역본의 역자가 후기에서 센디의 개념들을 번역 은유로 취했듯 벤야민의 번역론을 떠올리게도 하는 이러한 논지는 후술할 ‘청취 기록(글쓰기)의 곤란’과 묶여 읽힐 수도 있을 테다.)


2.

그런데 듣기와 엿듣기가 근본적으로 친밀하다 한들, (센디의 책 한 권 분량의 연구를 들추지 않더라도) 음악을 듣는 몸짓과 (음악) 엿듣기의 몸짓은 도상적으로나 의미상으로나 결코 동일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음악을 듣는 몸짓’은 빌렘 플루서가 『몸짓들: 현상학 시론』에 포함시킨 여러 몸짓들 중 하나로, 플루서는 여기서 음악 감상을 “신체가 음악이 되고, 음악이 신체가 됨”으로 정의한다. 소리의 파장은 몸속으로 들어와 파토스를 유발하고 우리는 거기 집중한다. “음악을 들을 때 듣는 사람 스스로가 바로 그 음악이기 때문에, 음악에 적응함은 바로 스스로 음악이 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음악을 듣는 몸짓은 “음악이 구체화되는 신체의 자세”이자 “음향의 마사지에 의해 신체가 정신이 되는 몸짓”이다.


플루서가 음악을 예찬하며 드는 ‘음악을 듣는 몸짓’의 특징은 음악을 듣기 위해 라디오를 켜는 것과 같이 “완전히 세속적이고, 완전히 기술적이고, 완전히 공개적인(숨김없는)” 무엇이라는 점이다.(주7) 하지만 엿듣기에는 관심과 호기심과 불안이 수반되며, 실제로 숨어 듣든지 그게 아니면 가상의 벽 혹은 문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 음악을 엿들을 때, 우리는 현실에서든 상상에서든 어딘가를 향해 더욱 기울인 자세, 차라리 ‘글쓰기의 몸짓’처럼 “파고 들어가는 집요한” 자세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엿듣기의 몸짓은 음악 감상을 (글쓰기를 통해) 청취 기록으로 남기려 할 때, 기록을 위해 내가 들은 음악을 몸에서 다시 울리게 할 때, 내 기억 속에서 단어들을 ‘들어볼’ 때 발견되며 또한 강화된다. 말하자면, 청취 기록에서 우리는 신체의 자세인 ‘음악 듣기의 몸짓’과 파고 들어가는 ‘글쓰기의 몸짓’이 겹쳐진, 기울어진 ‘엿듣기의 몸짓’을 수행하는 것 같다. 여기 개입하는 ‘문’은 기억과 글쓰기라는 과정 자체이며 때로는 우리의 몸이다.


나는 음악당에서 내가 들은(듣는) 음악에 대해 헛되이(이 느낌이 중요하다) 메모하려 하곤 하며, 집이나 집밖에서 혼자 듣는 여러 가지 음악에 대한 인상을 단편적이나마 남겨보려 했었다. 그러나 음악의 효과인 파토스와 내가 적는 단어들은 별개이다. 단어들은 저항하며, 단어들은 “진동하는 단위들이고 자체의 삶을 갖는다. (…) 나는 내 기억 속에 있는 단어들 중에서 표출하려는 가상성에 ‘들어맞는’ 것을 임의로 선택할 수 없다. 나는 우선 그것을 들어봐야 한다.”(주8) 글쓰기와 단어의 이러한 특성에서 길어 올릴 수 있는 ‘불안’한 경험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예컨대, 나는 왜 eerie라는 단어를 근본적으로 소리와 연결해 생각하곤 할까? 왜 목소리란 들을수록 억양만이 남아 알 수 없어지며, 비유들은 쉽게 성에 차지 않을까?


3.

『문 뒤에서』는 성장기의 한 시절과 그 이후로도 지속되는 불행감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청취 기록에 존재하는 엿듣기는 바사니의 화자가 사로잡힌 단절과 적대감의 일례 혹은 기록의 불가능성이나 불완전성에 대한 핀잔이 아니라, 글쓰기 혹은 듣기의 희한한 양식인 그것에 대해 “문 뒤에서”라는 제목을 낙담 없이 말할 수 있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청취 기록, 다시 말해 음악 감상에서의 엿듣기는 결국 끊임없이 청해 듣는, 기울이고 기대하는, 무엇보다도 ‘접촉’하려는 몸짓이기 때문이다. 


플루서가 말했듯 음악 감상에서 신체가 음악이 되고 음악이 신체가 된다면, 청취 기록은 한편으로 몸에 대한 기록이다. 내 몸에의 접촉은 어떻게 가능할까? 낭시에 따르면, “내가 나를 접촉하려면, 우선 나는 바깥으로서 존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만지는 그것은 바깥의 편에 남습니다.”(주9)


“어린 시절 내가 들었던 베토벤을 재구성할 것.”(주10) 

나는 베토벤에 관한 아도르노의 단편들과 텍스트를 모아놓은 책의 첫 문장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다.


김나리


(1) 조르조 바사니, 『문 뒤에서』, 김운찬 옮김, 문학동네, 2018, 159쪽

(2) 같은 책, 7쪽

(3) 조르조 바사니, 『금테 안경』, 김운찬 옮김, 문학동네, 2016, 142쪽

(4) 조르조 바사니, 『문 뒤에서』, 15쪽

(5) Peter Szendy, All Ears: The Aesthetics of Espionage, Roland Végső 옮김, Fordham University Press, 2017, 10쪽

(6) Jean-Luc Nancy, Listening, Charlotte Mandell 옮김, Fordham University Press, 2007, 5쪽

(7) 빌렘 플루서, 『몸짓들: 현상학 시론』, 안규철 옮김, 워크룸 프레스, 2018, 161-169쪽

(8) 같은 책, 31-39쪽

(9) 장-뤽 낭시, 『코르푸스: 몸,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 김예령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 132쪽

(10) 테오도르 W. 아도르노, 『베토벤. 음악의 철학: 단편들과 텍스트』, 문병호/김방현 옮김, 세창출판사, 2014, 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