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
2019년 11월 9일

2010년대의 풍경(3) ye 2018-2019


지난 글(참고기사 제 316호 “2010년대의 풍경(2): 유튜브 웜홀”)에서는 유튜브 웜홀과 조울증을 이야기했다. 결론 없이 본론만 늘어놓았다. 결론을 떠올릴 수 있었다면 본론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비슷한 주제에 대해 작년부터 서론이나 본론 없이 결론만, 논거 없이 주장만 펼치는 사람을 본 적 있다. 칸예 웨스트라는 래퍼다.


나는 칸예를 21세기의 조울증 아티스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칸예의 여덟 번째 정규 앨범 <ye>(2018)를 듣고 난 뒤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칸예에 대해 골몰한 적 없다. “Power”(2010)가 다음처럼 전개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ye>를 듣고난 뒤의 일이다. “Power”는 훵크(funk) 뮤지션 ‘컨티넌트 넘버 식스'(Continent n° 6)의 곡 “Afromerica”(1978)에서 샘플링한 박수 소리와 “나는 21세기에 살고 있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그러다가 박수 소리가 사라지고, ‘콜드 그릿츠'(Cold Girts)의 곡 “It’s Your Thing”(1969)에서 샘플링한 드럼 소리가 사라지고, 아래 가사를 반복하는 칸예의 목소리와 함께 트랙은 끝난다. “이것은 아름다운 죽음이 될 것이다 /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진다 /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나는 <ye>를 (지난 글에도 등장한) 나의 친구와 함께 들었다. 들었다기보다는 시청했다는 말이 적합할 것이다. 칸예의 공식 유튜브 계정에는 <ye>의 모든 트랙이 올라와있으며, 앨범 수록곡인 “All Mine”과 “Violent Crimes”의 리릭스 비디오(Lyrics Video)도 같이 볼 수 있다. <ye>의 앨범아트에는 칸예 자신이 찍은 산지대 사진과 “나는 싫어 / 조울증인 게 / 그건 끝내주거든”이라는 문구가 담긴다. 나는 <ye>의 여섯 번째 트랙 “Ghost Town (feat. PARTYNEXTDOOR)”를 시청하면서 펑펑 울었다. 나의 친구는 <ye>의 일곱 번째 트랙이자 마지막 트랙인 “Violent Crimes”를 시청하면서 펑펑 울었다. 


가사를 인용할 마음은 들지 않는다. 정말 근사한 영화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대사를 인용할 마음이 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사나 가사처럼 명백하게 실체를 갖는 요소들로는 나의 경험이 설명되지 않고, 그게 싫기 때문이다. 어디에 칸예의 의도가 담겨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도 이유다. 빈곤과 과잉이 동시에 존재한다. 가령 칸예는 다른 사람들이 구해온 샘플로 음악을 만든다. 그렇게 음악을 만드는 것도 칸예 혼자가 아니라 다수의 프로듀서다. 칸예 고유의 창작으로는 보컬 믹싱이 덜 된 듯한, 쇳소리나는 칸예의 목소리, 그리고 이런저런 선택들 정도가 전부다.


그러한 선택으로는 정지되어 있던 광대한 산지, 그 산지를 천천히 올려다보는 시선, 멀리서 초점을 맞추다가 산지 위에 떠있는 달을 올려다보는 시선이 있다. 남는 것은, 목소리만 들리는, 시선을 던지는 사람과 자연의 풍경이다. 머지 않아 칸예는 ‘키드 쿠디’(Kid Cudi)와 협업하여 앨범 <아이들은 유령을 본다>(KIDS SEE GHOST, 2018)를 공개한다. 마지막 트랙 “Cudi Montage”에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커트 코베인의 미공개곡 “Burn The Rain”의 기타 샘플이 담긴다. (이론과 학부생은 프로이트가 말한 ‘애도’를 언급할 것이다) 지난 10월 25일 공개된 <예수는 왕이다>(Jesus Is King)에는 예수와 칸예, 그리고 칸예가 구축한 가스펠 프로젝트 ‘선데이 서비스’가 남는다. 인간-자연, 인간-유령, 인간-신. 그런데 이러한 궤적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가? 


하지만 이 질문 자체가 동어반복적인 질문이라고 한다. 행복한 삶이란 그 자체 정당화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매우 심오하게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한다. 가톨릭 수도원에서 일하려고 시도하다 뜻대로 안 되자 그곳의 정원사 조수로 일한 비트겐슈타인이 그랬다. 이해하기 어렵다. 나는 칸예의 결론도 이해하기 어렵다.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동의하거나 거부할 수도 없다. 확실한 것은, 요즘 내가 비트겐슈타인의 글과 그에 대한 연구 논문과 칸예의 앨범만 소비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죄책감이나 절망감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허애리 기자

evermore99@kart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