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문화
2019년 11월 9일

음악대학 연합 축제 이대로 괜찮은가

대학국악축제와 대학오케스트라 축제를 중심으로


지난 19일 우리학교 전통예술원은 국립국악원에서 대학 국악 축제에 참여했다. 한편 지난 29일 음악원은 예술의전당에서 오케스트라 축제에 참여했다. 축제는 이틀에 걸쳐 진행되었다. 각 공연은 2015년과 2013년, 대학의 정기연주회를 축제 형식으로 엮어 전공자 간 상호 교류 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한다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축제의 취지는 건전해 보인다. 하지만 준비 과정부터 공연을 올리기까지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기도, 궁금증을 사기도 한 듯하다. 무엇이 그리 문제였나.


전통예술원은 “깊게 내린 뿌리, 끝없는 길 ‘Root-Route’”라는 주제로 공연을 구성했다. 이날 공연은 김성진 현 국립극장 예술감독의 국악관현악단 지휘 아래 종묘제례악 중 전폐희문을 시작으로, 우리학교 전통예술원 한국음악 작곡과 재학생 3명의 창작곡을 포함한 총 7개의 곡으로 구성되었다. 이어서 음악원은 이번 축제의 공통 주제인 ‘젊음, 클래식을 채우다!’로 축제의 첫 문을 열었다. 정치용 교수의 지휘 아래 크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멘델스존 아름다운 멜루지네 서곡을 시작으로, 김현미 교수의 브루흐 스코틀랜드 환상곡 협연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5번을 연주하였다.


공연의 구성에는 흠잡을 데가 없어 보이지만, 전통예술원과 음악원의 공연 형태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두 공연 모두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공연을 이끌어나가는 점에 의의를 두었을 텐데, 그렇다면 학생들에게 더욱더 많은 연주와 창작의 기회를 제공해야 했다고 생각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원의 창작곡 공모와 연주, 협연 등에는 그 자체로 의의가 있다. 반면 음악원의 경우는 어떠한가? 역사적으로 높게 평가받는 서양 작곡가들의 대곡으로 구성된 프로그램과 교수의 협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학생들의 축제라는 점을 잘 반영한 공연이었다면, 전통예술원의 경우처럼 학생들이 학생들의 창작곡을 직접 연주하고 협연하는 형태가 바람직하지 않았나. 


그리고 다른 학교 오케스트라축제 프로그램의 경우, 소화하기 어려운 테크닉에 열광하는 현시대의 흐름을 반영하여 연주 시간이 상당히 길고, 곡의 완성도보다도 완주 자체에 의의를 두는 곡 위주로 구성되어있다. 예를 들어 이번 축제 기간에는 3개교가 말러 교향곡을 연주한다. 소위 말하는 ‘뻔한’ 레퍼토리가 아니라 프로그램 구성에서도 다양성을 추구했다면 훨씬 다채로운 축제가 될 수 있었다는 아쉬움을 토로해 본다. 이는 예술의전당 기획 중 하나인 교향악축제에서 느낀 아쉬움과도 일맥상통한다.


또한 축제 기간과 의미, 참여 학교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게 된다. 먼저, 축제의 경우 휴일 없이 진행될 때 ‘축제’라는 단어의 의미를 잘 구현하지 않을까. 대학 국악 축제의 경우 국립국악원의 휴관 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공연을 올렸다. 반면, 예술의전당의 경우 휴관 일을 제외하고도 연속적으로 공연되지 못하는 날들이 많았다. 그 이유는 11월 클래식계의 가장 큰 이슈인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인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내한과 상당한 관련이 있는 듯 하다. 공연일의 결정권을 가진 예술의전당이 앞서 말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일 선정에 중점을 두었기에, 보다 효율적이지 못한 축제 기간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축제의 의의가 전공자 간 상호 교류의 장을 제공한다는 점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주최 측이 바라던 ‘상호 교류’적 공연은 과연 어떤 공연인가? 각 대학의 정기연주회 형식으로 끝나는 일회성 공연이 상호 교류적 공연인가? 진정 상호 교류적 축제를 제공하고자 했다면 대학들의 참가 여부도 고려했어야 할 것이다. 11개의 학교가 참가하는 대학 국악 축제와 달리 대학 오케스트라축제에 참여하는 대학 수는 7개교에 불과하다. 소위 말하는 메이저급 대학이 주를 이룬 대학 오케스트라축제는 과연 모두를 위한 축제인가, 아니면 그들만의 리그인가? 다시금 질문하게 된다. 대학에 개설된 클래식 학과에 비해 국악과의 수는 많지 않다. 하지만, 국악 전공자 상당수가 축제에 참여하여 즐기고 있지 않은가. 우리 사회가 클래식 장벽 허물기를 주장한다지만 ‘장차 우리나라 음악계를 이끌어갈 전도유망한 연주자와 음악계를 이끄는 기성 연주자’로 구성된 연주는 클래식계를 더욱더 ‘그들만의 리그’로 만드는 행위가 아니었나 질문을 던져본다.


공연 주체 내부로 시선을 돌려봐도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먼저 공연을 올린 전통예술원의 경우 창작곡의 선정부터 그 곡을 연습해 무대에 올리기까지 많은 말이 있었다. 제아무리 공식적인 절차로 창작곡을 공모하여 뽑는다고 하더라도 선정하는 사람이 곡을 평가하는 기준과 연주자들이 받아들이는 ‘좋은’ 곡의 기준은 추구하는 바가 달랐던 모양이다. 수상경력과 실전 경력이 보다 많은 선배에 비해 그렇지않은 후배의 곡이 탐탁지만은 않았다. 물론 한 사람의 수상경력이 그 사람의 탁월한 실력을 대변하는 근거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필에 실리는 문장만으로 한 사람의 실력을 일반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학생들이 참여하고 꾸려나가는 의미가 큰 축제이므로 곡 선정 과정에서도 학생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좀 더 바람직하다.


‘서양 어법’으로 작곡되어 ‘서양의 연주 형태’인 오케스트라 형식으로 우리의 전통음악이라 불리는 ‘국악’을 연주하는 일에 대한 궁금증은 현시대 국악을 향유하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로 꼽힌다. 어렸을 때부터 누려왔던 음악적 모국어가 서양의 음악 문법이기에, 우리는 오선지가 그려진 악보로 표현되지 않는 음악에 거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국악은 평균율로 이루어진 선율 체계를 바탕으로 향유하는 음악이 아니다. 연주기법 중 하나인 농현을 예로 들면, 미분음은 정확하게 오선체계에 기보될 수 없을뿐더러 사람마다 다른 연주방식을 서양식 기보법이 모두 대변할 수 없다. 실제로 국악 작곡가들이 국악을 서양음악 어법으로 작곡하고, 서양식 음률체계로 악기를 재조율하여 그 곡을 연주하는 국악 연주자들 모두에게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그뿐 아니라 화성과 형식이 절대적으로 중요시되는 서양음악 어법을 토대로 한 전통음악 작곡이 이제는 우리 음악어법에 맞춰 변화할 때가 오지 않았나 목소리를 높여본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연주는 매우 성공적으로 끝났다. 관객과 연주자, 무대와 객석이 이분법적으로 나뉜 클래식 공연장과는 달리 연주 내내 관객들이 흥을 내어 모두가 함께 즐기는 참여형 공연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참여 형태의 공연은 특정 음악 장르를 항유하는 내부자와 그들의 음악 어법을 전혀 모르는 외부자 간의 장벽을 줄여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음악원도 평탄치만은 않았다. 앞서 언급했던 ‘뻔한’ 레퍼토리에서 벗어난 듯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부 첫 곡으로 사용된 멘델스존의 아름다운 멜루지네 서곡은 한국에서 향유하는 클래식 주요 레퍼토리가 아니어서 학생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이어지는 막스 브루흐의 스코틀랜드 환상곡과 2부의 차이콥스키 교향곡 제5번은 여전히 반복적인 레퍼토리에 대한 지루함을 일으키기도 했다. 음악원 또한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한 곡을 연주하면 이러한 지루함이 해소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또한 우리학교 음악원의 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는 늘 1부 연주와 2부의 연주의 완성도 차이가 크게 나는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이날 공연도 예외는 아니었다. 흠잡을 곳이 없던 2부와는 달리 서곡과 협주곡은 모두 정돈되지 않은 느낌을 주었다. 관객들이 연주회를 보러 갈 때 1부의 연주곡과 협연자를 기준으로 관람 여부를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날 연주에서는 완벽히 떨어지는 음정과 테크닉을 보여주지 못한 협연 무대 또한 1부에 대한 아쉬움을 남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좋은 연주를 위해 열심히 준비한 우리학교 재학생과 지도 교수님께 박수를 보내고 싶다.


김민정 기자

kimj2000@karts.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