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학술·비평
2019년 10월 17일

키치는 인간을 모욕하지 않는다

<안은미래>, 무대를 완전히 뒤집어 놓으셨다


서울시립미술관이 6월 26일부터 9월 29일까지 <안은미래> 전시를 개최했다. 이 문장을 쓰기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브로슈어를 들춰봤다. 나는 안은미를 모르고, 어쩌면 그의 작업에 큰 관심조차 없다. 유명하다는 그를 전시로 처음 알았을뿐더러 무용은 난해해서 흥미가 사그라진다. 나는 무당의 난도질과 여령의 검무를 구별할 줄 모른다. 안은미를 안다는 이들 역시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안은미를 모른 채 <안은미래>를 쓰려면, 달리는 말에서 산을 보려면 고삐를 놓고 고개를 돌릴 줄 알아야 한다. 말(言)이 산으로 가면 산은 더 잘 보인다. 그래서 미리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나는 아직도 어디까지가 작업인지 모르고, 작업에 이름이 있는 줄도 모른다. 그런데 무대 장치에 이름을 붙이고 작업이라 하지는 않지 않는가? 다만 그에 대해 쓰는 건 그가 미술관을 제사상에서 춤판으로 탁월하게 바꿔내기 때문이다.

‘목을 매단 옷’ ©서울시립미술관

‘삐까뻔쩍한 무당’ ©서울시립미술관

<안은미래>는 옷이 목을 매단 데서 시작한다. 시체가 장막처럼 드리운다. 나는 깜짝 놀라 충실한 관객이 되어 옷에 고개를 숙이고 굴복했다. 머리 조아려 바닥을 보며 나는 미술관의 엄숙함을 느꼈고, 나도 모르게 뒤이어 등장할 작품을 숭배할 채비를 갖췄다. 고개를 들자 삐까뻔쩍한 무당이 서 있었다. 그는 수미단에 올라 청동거울을 들고 머리에 세발향로를 썼다. 지금 막 금박공양을 마친 듯 온몸은 금빛이 나고 거울처럼 빛나는 광배를 두르고 있다. 내가 유불의 집합체를 무당이라 여긴 까닭은 양옆에 무당집에나 등장할 법한 발이 쳐져 있고, 뒤에 무속 신을 모신 듯 거대한 장벽화가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이 엄숙한 제사상은 대형마트 놀이방 고무공을 만나며 엎어진다. 나는 비치볼에 대한 경험이 하나 밖에 없어서 쭈뼛거린다. ‘아, 저건 가지고 노는 건데.’ 아직은 참을만하다. 거대한 그림이 차마 눈에 걸린다. 그림은 안은미의 일명 평생도이다. 안은미가 태어나 지금까지 겪은 일을 한 데 그렸다. 그림의 표현은 대체로 궁중회화(장식화), 불화(에서도 괘불),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무대 미술을 맡은 이는 과거 평생도의 형식을 아예 모르거나 철저히 의식했다. 그는 평생도를 폭으로 나누지 않고, 로젠퀴스트의 <F-111>처럼 팝의 이미지로 다뤘다. 일례로 ‘카네기홀과 같은 공연장’에 등장한 안은미의 모습은 과시적이고 우화적이다. 하나 고백하자면 나는 그림 아래 기록을 하나도 읽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비치볼을 튕기면서 글을 읽으라니, 글을 읽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안은미로 가득한 지표’ ©서울시립미술관

고개만 돌리면 인쇄된 안은미로 가득한 세상이다. 지표는 안은미가 프린트된 비치볼이 뒤덮었고, 지표를 뚫은 분화구는 안은미의 공연 영상을 분출한다. 미디어는 원본을 복제하여 오히려 안은미의 팝한 아우라를 강화한다. 그러나 제의니 전시니 하는 것들은 대형마트 놀이방에 감히 끼어들지 못한다. 안은미가 직접 광장에 나서 현존에 관한 모든 고민을 놀이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광장은 더욱이 우리가 익히 아는 광장이다. 해치 두 마리가 서 있는 광장의 주인은 다름 아닌 우리다. 내가 주인인 광장에서, 적어도 모두가 평등한 광장에서 안은미는 친절할 수밖에 없다.


친절은 또한 놀이공간의 법칙이다. 신나고 재미있는 게임의 절대율은 튜토리얼이 있다는 것이다. 튜토리얼은 (굳이 말하자면) 큐레토리얼과 다르다. 튜토리얼은 나와 평등한 누군가가 나와 함께 놀자며 양보해주는 것이다. 미술관은 어떠한가? 큐레토리얼은 어쩌면 나보다 많이 아는 누군가가 나를 가르쳐준다며 제도를 수단 삼아 모욕하는지도 모른다. 안은미는 (삭발하고 있는 자극적인 브로슈어가 암시하듯) 자신을 모욕하고 키치로 전락시키지만, 제의공간을 만들어 관객에게 상징폭력을 가하지는 않는다. 제사상을 차릴 줄 알지만, 뒤엎고 춤판을 벌일 줄도 아는 것이다.

‘조롱’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의 끝에 놓인 한 권의 책은 이 폭력에 대한 통쾌한 조롱이다. 숭배 따위는 죽은 책에나 하라는 것일까. 나는 기관으로서의 미술관이 어떻게 그 조롱을 용인하였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민중미술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전시를 열며 죽음을 선언했듯, 안은미의 키치도 제도가 스며들어 타살당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사상을 차려두시고 춤판을 벌이시다니. 무대를 완전히 뒤집어 놓으셨다. 전복된 무대에서 권위는 추락하고 키치는 뛰어논다. 그러나 키치는 적어도 관객을 모욕하지 않는다.


최민기 기자

fuwuyuan@kart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