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학술·비평
2019년 10월 17일

불명예 복기

영화 공부와 고전 영화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이면 고전 영화를 봐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꼭 고전 영화를 보는 게 전부는 아니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 차라리 이런 반론이 낫다. ‘영화를 공부하는 일과 영화를 많이 보는 일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따라서 고전 영화를 볼 필요는 없다’. 


이러한 반론에서 흥미로운 것은, 반론의 전제보다는 이렇게 말하게 된 동기다. (부연하면 이 전제에 대해서 4년 내내 배우는 곳이 우리학교 영상이론과이기 때문이다.) 동기는 단순하다. 정말로, 영화를 ‘꼭’ 보지 않고도 영화 얘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며, 영화에 관한 이야기가 영화(를 보는 경험) 자체보다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경험) 자체가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앞지르던 시기는 분명히 실재한다. 미국의 초기 영화 저널리스트들(제임스 에이지, 로버트 와쇼, 마니 파버)은 ‘작가'(auteur)라는 개념을 적용하지 않고도 영화(를 보는 경험)의 경이를 논한 바 있다. 이들이 천착하는 주제에 관해서는 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 철학자의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겠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처럼 쓴다. “미국의 어리석고 소박한 영화는 그 모든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어리석음을 통해서, 가르침을 줄 수 있다. 얼빠진 것이면서도 허세 부리는 영국 영화는 가르침을 줄 수 없다. 나는 종종 어리석은 미국 영화로부터 교훈을 끌어내었다.”(주1)

‘멍청한 미국 영화가 똑똑한 척하는 영국 영화보다 훨씬 큰 가르침을 준다’라는 말이다. 자신의 일기장에 쓴 것이기에 근거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추정은 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에서 다음처럼 쓴다. 논리가 존재에 선행하지 못한다는 것이 요점이다. “하여튼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경이를 생각해 보라. / 이러한 경이는 질문의 형태로 표현될 수도 없고, 따라서 그것에 대한 대답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마치 말하는 것처럼 느끼는 모든 것은 경험 독립적으로(a priori)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주2)  


그렇다면 “훨씬 큰 가르침을 주는”, “하여튼 어떤 것이 존재”하는 “멍청한 미국 [고전]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의미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 앞서 언급한 영화 저널리스트들과 아네트 미켈슨의 ‘인문학적 영화 비평’을 ‘일상성'(ordinary)이라는 개념으로 가로지르는 『눈에 비친 세계』의 저자 스탠리 카벨은 그 대안으로 철학자 하이데거를 거론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논리에 선행하는 존재의 의미를 질문해야 한다. 


거창한 이야기다! 그런데도 옛날이야기다. 미국 영화가 더 이상 “멍청”하기를 그치고 “똑똑한 척”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는 딱히 고전 영화의 잘못이 아니고, 영화 평론가 앙드레 바쟁이 예언한, 고전 영화의 운명에 가깝다. 바쟁은 「비순수 영화를 위하여 – 각색의 옹호」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 영화는 영화의 수사학을 이미 완성시켰다. 따라서 이제 영화를 통해서 할 일은 이야기라는 의미체계를 건드리는 일 말고는 없다. 미국 영화는 사라지거나, 똑똑한 척을 시작해야 했다.


이어서 ‘대중’이라는 단위가 사라졌다. 한 편의 영화는 관객의 지적 수준이나 계급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영화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과학자에서 철학자, 영화 관계자에서 관객까지 “채플린의 콧수염”이라고 말할 때 그들이 지시하던 것은 정말 “채플린의 콧수염”이었는데, 이제는 이러한 공공의 언어가 사라졌다. 그러나 이게 별로 슬픈 이야기는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공부하는 일과 고전 영화를 많이 보는 일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크게 두 가지다. ‘멍청함’의 미덕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제는 사라져버린 어떤 플랫폼이 작동하던 방식과 망가진 이유를 파악할 수 있다. 오늘날의 시청각 플랫폼의 수명을 보장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다. 물론 후자보다는 전자의 이유가 더욱 구미를 당길 것으로 예상한다.

아무튼 그랬다면 다행이다. 내가 추천하는 고전 영화 ‘입문작’은 조셉 폰 스턴버그 감독의 <불명예>(Dishonored, 1931)다. 세기말 오스트리아 빈의 풍경에 관심이 많다면 파악했을 것인데, ‘조셉 폰 스턴버그’라는 이름에서 ‘폰’은 스턴버그가 멋대로 붙인 귀족 이름이다. 이름부터 무의미한 장식인 셈이다. 이름만 그런 것은 아니다. ‘장식은 죄악’이라는 명제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아돌프 로스의 저서 한 권을 인용하면, <불명예>는 “공허에 대한 외침”(Ins Leere Gesprochen)의 영화다. 


장유비 기자

evermore99@karts.ac.kr


주1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역, 『문화와 가치』, 책세상, 2006

주2

김영건,  「하이데거와 분석철학」, 『철학논집』 제 23집,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