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학술·비평
2019년 10월 17일

아니, 그 일요일은 끔찍했어

구로사와 아키라의 ‘졸작’ <어느 멋진 일요일>(1947) 다시 보기


<라쇼몽>, <7인의 사무라이>로 유명한 구로사와 아키라(이하 AK)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어느 멋진 일요일>은 특이한 작품이다. <어느 멋진 일요일>은 AK가 유일하게 각본에 참여하지 않은 영화다. 또한 유일하게 ‘제4의 벽’을 깨뜨리는 장면이 등장하는 영화다. 그렇다면 세계적인 거장 AK의 다분히 ‘이질적인’ 영화 <멋진 일요일>은 여태껏 얼마나, 어떻게 언급되어 왔을까. AK를 중점적으로 연구한 ‘AK 전문가’(도날드 리치, 요시모토 미츠히로, 스티븐 프린스, 피터 코위, 스튜어트 갈브레이스 등)들은 <어느 멋진 일요일>을 이렇게 평가했다. ‘밝고 감상적인 코메디’. ‘전후 사회를 바라보는 지나치게 달콤한 시선’. ‘유쾌하고 단순한 이야기’. 뭔가 이상하다. <어느 멋진 일요일>은 전혀 그런 영화가 아니다.


또한 ‘AK 전문가’들은 이 영화를 납득하거나 긍정하기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미츠히로는 <어느 멋진 일요일>에 대해 “이 영화는 극적 긴장감을 강조하려는 구로사와의 감독적 성향, 강한 의지를 가진 인물들, 그리고 우에쿠사의 음울한 시적 서정성(이 담긴 각본) 간의 괴리 속에서 고통 받고 있다”고 언급했고, 프린스 역시 급진적인 형식 실험 없이 잔잔한 표면뿐인 영화라고 비판한 바 있다. 리치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마사코가 제4의 벽을 부수고 관객을 향해 말을 거는 장면을 서술하며 “영화와 전혀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영화 전체를 망치기에도 충분하다”라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어느 멋진 일요일>의 서사는 단순하다. 전후 일본, 재회한 남녀가 있다. 일하느라 바쁜 두 사람이 데이트할 수 있는 날은 일요일 뿐이다. 어느 멋진 일요일에 그 둘은 여느 때처럼 만났다. 그런데 돈이 없다. 단 35엔뿐이다. 둘은 돈을 최소한으로 아껴가며 데이트를 한다. 어느새 일요일이 다 지났다. ‘다시, 다음 일요일에.’ 둘은 헤어진다. 이런 요약을 들으면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힘든 와중에도 삶의 희망을 잃지 않는 연인의 이야기가 아닌가? AK의 휴머니즘과 유머, 전후 일본의 근대적 남성성을 응원하는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영화가 아닌가? 영화의 첫 1분과 마지막 1분만 보았다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이 영화를 10분 이상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든다면 그 생각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본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저 둘은 다음 주 일요일에 다시 만날 거야.’ 혹은, ‘저 둘은 이제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거야.’

<어느 멋진 일요일>  ©도호 주식회사

<어느 멋진 일요일>은 반복적으로 그들이 울다가, 더이상 울고 싶지 않아서 웃다가, 그래서 다시 우는 장면을 보여준다. 여자는 눈물이 나올 때면 몸을 돌리고 가만히 숨는다. 남자는 그런 여자 옆에 가만히 서 있다. 그런 그들이 서로를 부여잡고 펑펑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나온다. 예산 내에서 가능한 마지막 이벤트인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연주회에 입장하지 못한 뒤다. 바로 앞에서 저렴한 표가 매진된 것을 본 둘은 멍하니 멈춰있다가, 곧 남자의 하숙집으로 간다. 남자는 망가지고(죽고) 싶다고 말하며 울고, 여자는 바닥을 멍하니 보다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남자를 달랜다. (이러한 장면 역시 조울증 연인의 전형으로 읽힌다.) 남자는 섹스를 시도하고, 여자는 도망친다. ‘이렇게 끝인가.’ 남자는 중얼거린 뒤 좁은 방안을 거닐다가 창문 밖을 본다. 지붕이 보인다. 이후 여자가 천천히, 조용히 들어온다. 여자는 뒤돌아서 겉옷을 벗으려다 발작적으로 울음을 터뜨린다. 남자는 여자가 울자 따라서 운다. 이때 남자가 우는 이유는 여자한테 미안해서, 혹은 스스로가 불쌍해서라기보다는, 단순히 ‘여자가 우니까’에 가까워 보인다. 둘은 서로 껴안고 훌쩍거린다. 문제는 다음 장면이다. 카페에 앉아 있는 둘은 생글생글 웃는다. 남자는 여자에게 화났느냐고 묻는다. 여자는 대답한다. 아니, 행복해.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희망적인 이야기, 그리고 전형적인 AK 서사로 읽힐 수 없는 이유는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하기도 한, 위에 언급된 바로 그 ‘제4의 벽’ 장면이다. 슈베르트 연주회에 갈 수 없게 된 둘은 텅 빈 야외 음악당에서 둘만의 가짜 연주회를 연다. 남자는 지휘자, 여자는 관객, 오케스트라는 투명 인간이다. 하지만 몇 번이나 시도를 해봐도, 남자에게는 ‘미완성 교향곡’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여자는 자꾸만 좌절하는 남자에게 큰소리로 박수를 치며 다시 시도하라고 부추긴다. 해 봐, 응? 해 봐, 해 봐. 그래도 남자가 일어나지 않자, 여자는 갑자기 카메라를 바라보며 관객에게 부탁한다. 박수를 쳐달라고. 우리 같은 가난한 연인을 응원해달라고. 둘은 마치 누군가의 박수 소리를 정말로 들은 것처럼 표정이 밝아진다. 그리고 음악은 들린다.


여기서 끝났다면 정말이지 희망적인 이야기였을 것이다. 둘은 잠시 동안 웃으며 연주회를 연다. 하지만 자꾸 클로즈업되는 여자의 표정은 굳어만 간다. 음악은 실제로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데도, 여자의 미소는 사라진 지 오래다. 그리고 눈물이 흐른다. 남자 역시 아주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웃는 얼굴 같기도, 우는 얼굴 같기도, 단순히 지친 것 같기도 한 그 얼굴로 남자는 미친 사람처럼 팔을 허우적댄다. 여자는 남자를, 남자는 카메라를 향해 몸을 돌리고 있다. 따라서 그 표정을 온전히 받아내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결국 둘은 도망치듯 음악당을 떠난다. 바로 이어지는 것이 마지막 장면이다. 얼굴이 눈물 자국으로 범벅이 된 두 사람은 아무 표정 없이 버스를 기다리다가, 갑자기 환하게 웃는다. 여자가 말한다. ‘다시, 다음 일요일에.’ 여자가 버스를 타고 떠나고, 남자는 웃으며 기지개를 켠다. 영화는 끝이 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느 멋진 일요일>을 ‘밝고 희망적인’ 영화로 평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솔직히 말하자면, 잘 모르겠다. 영화 관람 내내 도저히 그런 방식의 독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절대적인 이유는 이 영화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아시아 최고의 영화감독’이라 손꼽히는 그의 작품 대다수는 휴머니즘의 맥락에서 읽히며 전후 일본 사회의 남성성, 메시지를 명백하게 제시한다. 그의 대표작인 <7인의 사무라이>, <살아라>, <란>이 전형적으로 그렇다. 그렇기에 같은 관점에서 <어느 멋진 일요일> 같은 영화를 독해한다면 당연하게도 오류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AK의 여타 영화와 다르기 때문이며, 어찌보면 가장 AK스럽지 않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어느 멋진 일요일>을 분석한 ‘AK 전문가’들은 이 영화를 ‘AK 영화’로 읽었고, 일반 관객들 역시 마찬가지다. 비평가들의 글은 정전처럼 공유되고 결과적으로 모순적인 결론이 도출된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덧붙이고자 한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람 경험 그 자체이다.

<어느 멋진 일요일>  ©도호 주식회사


최미리 기자

horoyoi@kart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