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
2019년 10월 17일

2010년대의 풍경(2) 유튜브 웜홀

<끝없는>(Endless, 2016), <대단한 젊음>(Colossal Youth, 1980).


나와 나의 친구는 의심한 적 있었다. 나와 나의 친구가 다니는 병원에서 모든 환자를 조울증으로 진단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의 친구는 의사에게 그런 소문이 돈다고 전했다. 이에 의사는 당당하게 답했다. 자신이 그러는 경향도 있지만, 실제로 조울증 환자만 오는 것도 사실이라고. 다른 병원에 문의한 나의 친구의 친구도 유사한 답을 들었다고 한다. 이 의사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도 될지 모르겠지만, 시대별 신경증(과 신경증의 진단)의 양상만큼 ‘문화의 암류’를 파악하기 쉬운 지표도 없다. 그렇기에 정신의학에 무지한 신경증 환자로서 할 일은 여기서 역산(逆算)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런 시도가 뜬금없게 느껴진다면 (여인석 교수가 우아하게 번역한) 조르주 캉길렘의 저서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의철학을 공부하거나 캉길렘의 제자인 미셸 푸코와 푸코의 제자들과 그들의 제자들의 제자들의 책을 읽으면 될 것이다. 아니면 영국의 문화비평가 마크 피셔의 책 『내 삶의 유령들』을 누군가 번역해주기를 기다리면 될 것이다. 그래도 뜬금없게 느껴진다면, 그냥 내가 다른 병원을 찾아다닐 힘도 남지 않았다고 이해하면 된다. 별 대단한 일을 하기에 힘이 없는 건 아니다. 그냥 “유튜브 웜홀”에 갇힌 채, 소진되고 있을 뿐이다. 


“유튜브 웜홀”이란 무엇인가? 유튜브에서 동영상 하나만 볼 생각이었는데, 유튜브의 빅데이터가 제안하는 동영상들이나 자동재생으로 넘어간 동영상을 쳐다보다가 아침이 밝는 것을 뜻한다. 내게 이 표현을 알려준 사람은 미국의 가수 프랭크 오션(Frank Ocean)이다. 1990~2000년대에 태어난 이들에게 오션은 몇 안 되는 제의적(devotional) 스타 가운데 하나다. 오션이 ‘애플뮤직’에만 공개한 뮤직비디오 <Nikes>(2016)를 보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얀색 제복을 입고는, 얼굴 반쪽에는 글리터를 바른 미남이 “너희들에게 예언을 전하겠다 / 우리는 먼저 미래를 볼 것이다”라고 노래하는 광경을 떠올려보라.


그를 잊은지 오래였는데, 여느 날처럼 유튜브 웜홀에 갇혀 있던 어느 날, 유튜브가 영상 하나를 추천했다. “Frank Ocean feat. Brad Pitt ‘Close To You’ Live – FYF Fest 2017”라는 영상이었다. 오션은 다음처럼 말한다. “내가 기억하기로 꽤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었는데, (…) 나는 호텔 방에 있었고, 유튜브 웜홀에 있었고, 거기서 스티비(Stevie Wonder)가 카펜터스(Carpenters)의 노래 “Close to You”를 부르고 있었어요. 나는 그 노래를 불러야만 했어요”. 콘서트장의 스크린에는 브래드 피트가 전화를 거는 클립이 등장하고, 한 사람은 “나도 브래드 피트 티셔츠 있어!”라고 소리 지른다. 아무튼, 그런 영상이었다.


웜홀 속에서, ‘부를 수밖에 없는 노래’를 접해본 적 있을 것이다. 화장실에 급하게 가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벗어날 수 없었던 웜홀, 그곳에서 빠져나와 부를 수밖에 없는 노래를 불러본 적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날 밤, 방에서, 어느새 다시 갇혔다는 걸 깨달은 적도 있을 것이다. 다만 조금 다른 점이 있다. 전날 밤에 자신이 부를 수밖에 없는 노래와 마주했다는 기억이 오늘까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딱히 나아진 건 없다. 오히려 상황은 나빠졌다. 웜홀은 이제 웜홀이 아니다. 이제 그곳은 잃어버린 기억을 좇는 발굴지로 다가온다. 그리고 우리는 발굴을 하러 가던 길에서 무언가 소중한 것을 (다시) 잃어버릴 것이다. 그리하여 ‘24시간 칠 웨이브'(24 hour chill wave)에 소비한 시간, 이런 시간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유튜브 웜홀에 갇힌 자는 디거(digger)나 애호가가 아니라, 말하자면, 미아 같은 것이다.


24시간에 24시간, 다시 24시간에 24시간이 더해지면, 자신이 잃어버렸기에 되찾으려고 한 것이, 자신이 사랑한 것이었는지 단순히 나에게 상처 같은 것이었는지 구별되지도 않는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다. 그러고는 다시 만날 수도 있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그렇기에 이제 나만이 사랑할 수 있는 어떤 노래나 영화, 인터뷰 같은 것을. 그런데도 이 모든 과정은 다시 반복된다. 불러야 하는 노래, 글을 쓰거나 SNS에 공유해야만 하는 영화 같은 것, 한 마디로 취향은 오늘날 더이상 무용하다. 이곳이 웜홀이고,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던 가운데 갑자기 울컥하는 영상, 예컨대 “Young Marble Giants- Wurlitzer Jukebox”와 접하게 된다. 2013년에 업로드된 영상으로, 이 영상을 처음 본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 영상 안팎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갑자기 너무 완벽하게 다가온다. “나는 그에게 질문한다 / 그는 듣지 않는다 / 월리처 주크 박스”. 그러고는 다시 모든 과정이 반복된다. 그 사이에 나는 유튜브에 업로드된 <사랑과 전쟁>이나 <연애의 참견>의 에피소드를 전부 보았고, 유튜브는 이 영상들을 다시 추천하고 있다.


허애리

evermore99@kart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