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2019년 9월 6일

예술가를 꿈꾸며 서사창작과 김연덕



긴 초들


타는 냄새.

모든 것은 빛에 대한 정보의 빈약에서 비롯된다. 각도에 따라 다르게 솟고 다르게 깎이는 얼굴처럼 

그중 몇 개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꿈 속과 꿈 밖을 오가듯 힘을 뺀다. 숨을 참는다. 다리를 뻗고 몸을 반으로 접는다. 한 시기가 지나도 끝까지 남아 커져가는 것들에 

나 자신에

대항하지 않는다. 

기대 없이 불 없이

가장자리를 지우며 다가오는 호흡이 있다. 이곳과 조금 어긋나는 속도가 있다. 뒤늦게 알게 되는 단순한 사실들은 마음에 어떤 길이로 덧붙여야 적당한 걸까. 이십 센티미터 이십이 센티미터 하얗게 끊어진 형태의 어둠을 무거운 촛대에 조심스럽게 꽂는다.

가져본 적 없던 손과 발이

뜨거워진다.


긴 초


비. 소파 곁에 놓인 어둠을 주무르다 창밖에 던져넣는 손이 있었다. 문고리를 쥔 채 노곤한 기운 속에서 한참 밖을 내다보던 손은 황금소나무 잎사귀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를 듣는다. 잎사귀와 잎사귀 공기방울과 빗방울 빛과 빛 사이사이로 자기 몸이 통과하는 소리 거칠고 작은 입자들이 살갗에 튕기는 소리 어둠의 한 귀퉁이가 찢기는 소리를 듣는다. 젖지 않고 부풀지 않는 손은 다 타버린 나무 타버린 종이의 질감을 오래 기억하지만 아직 살아 어디론가 향하는 말들, 다른 소나무와 다른 공중을 떠다니는 말들보다 조금쯤 느려 완전히 낯선 얼굴이나 완전히 익숙한 얼굴은 만나본 적 없다. 만져본 적 없다. 그렇다면 내가 만지는 것은, 내가 보고 내가 듣는 것은 어디쯤 멈춰 낡아가고 있는 것일까 혹은 어디쯤에서 태어나고 있는 것일까 손은 궁금하지만 매순간 모습을 바꾸는 물방울 속에 어지러운 잎사귀 속에 더 머물지 않고 고개를 든다. 현재라고 하는 순간 빗줄기에 조용히 달라붙는 유리를, 현재에서 먼저 벗어나는 입술을 본다. 빛. 가본 적 없는 나라의 말을 배우고 천년 전의 조각상과 눈을 맞추고 아무도 없는 복도를 끝까지 걸어보다가 비스듬한 고독 환한 의심 가운데 하나씩 타오르는 초를 그린다. 전기를 끈다. 눈이나 비에 젖지 않는 손은 잎사귀 뒤의 잎사귀가 흔들릴 때마다 갑작스런 열기가 나무를 뒤덮을 때마다 반짝이는 잎사귀와 벌레먹은 잎사귀 가지 끝에 간신히 매달린 잎사귀를 몇 장까지 셌는지 잊어버릴 때마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찢긴 소리는 여기저기서 다른 소리가 되고 누구와도 닮지 않은 몸이 되지만 자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은 너무도 희미해 물처럼 살아야 한다거나 나무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 컴퓨터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게 들렸다. 정적으로 산발적으로 들렸다. 비. 무거운 이름의 소나무가 빛난다. 벌어진 채 바깥으로 흐르던 귀퉁이가 멎는다. 뭐라도 바꾸고 싶은 것처럼, 뭐라도 바꿀 수 있는 것처럼 손을 쥐었다 펼 때, 가본 적 없는 나라의 인사말을 더듬더듬 연습할 때 어둠은 손을 사용하지 않고도 긴 초를 꽂고. 수상한 가능성과 달라지는 공기를 견딘다. 타는 냄새. 소파에 앉아 다시 찾아오는 어둠에 기대는 동안 낮에 일던 빛 낮에 일던 사랑이 몇 개의 유리창을 두드린다.



작년 12월에 대산문학상 결과가 나오고, 올해 1월에 시상식 하면서 등단하셨어요. 작년과 올해의 차이가 확연히 느껴질 것 같아요.

쓰는 마음가짐 자체가 달라졌어요. 제 시를 읽어주는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는 없어도, 어딘가에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제 시를 읽고 있다는 거 자체가 쓸 때 힘이 많이 돼요. 그리고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폭이 넓어졌어요. 다른 시인들이랑 만나서 얘기도 하고, 그런 자리가 자주 생겨서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긴 시를 선호하시는 것 같은데, 이유가 있나요?

저도 이유를 잘 모르겠는데, 예전에 시 수업에서 인상적으로 들었던 말이 있어요. 시의 적당한 길이는 무엇이냐는 학생들 질문에 강성은 선생님께서 “시 쓸 때 따로 정해져 있는 길이는 없고, 내가 할 말을 다 마쳤다고 할 때까지 쓰는 게 각 시의 적당한 길이인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그 말이 인상 깊었고, 길든 짧든 그 길이로만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하고 싶어요.


등단작 ‘재와 사랑의 미래’가 마음에 들어 연작 계획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네 쓰고 있어요. 같은 제목, 비슷한 길이지만 다른 이미지로 쓰인 시가 이미 3월에 ‘모티프’라는 잡지에 연작으로 실렸고, 지금 쓰고 있는 건 세 번째 시인데 아마 ‘릿터’ 다음 호에 실릴 것 같아요. 제가 워낙 민음사를 좋아하기도 하고, 민음사에서 처음 연락이 오면 ‘내가 제일 내 색깔대로 보여줄 수 있는 걸 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해서, 긴 길이가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일부러 연작을 쓰기 시작했어요.


등단작에서는 우주가 폭발하고 실내에 두 사람이 누워있는 이미지였다면, 모티프에 냈던 두 번째 작은 여름에 남자가 수영하는 이미지와 겨울에 여자 혼자 남자를 떠올리는 이미지로 계절 대비가 이루어져요. 그리고 지금 쓰고 있는 건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구체적으로 얘기할 순 없지만, 건축이나 설계와 사랑을 연결 지어 쓰고 싶어서 그런 내용으로 쓰고 있어요.


블로그에서 그런 말을 봤어요. “나는 이제 내 시로 사랑과 소망을 전하며 살고 싶다.” 전했고, 전달받은, 기억에 남는 사랑이 있나요?

같이 시 쓰는 친구들한테 받은 게 정말 큰 것 같아요. 3년 전 여름부터 모여서 계속 쓰고 같이 울고 웃고 했던 친구들인데 등단이 딱 됐을 때 그 친구들이 기뻐해 줘서 고마웠고 지금도 고마워요. 글 쓰는 사람들 내에서는 등단하는 게 예민한 부분이라서 한 명이 등단하면 스터디가 와해하기도 하고 서로가 감정이 미묘해지기도 하는데, 똑같이 대해주는 것도 고맙고, 시상식에도 그 친구들이 와줘서 수상소감 하면서 친구들 이름 부르면서 많이 울었어요. 가족들한테도 고맙고, 하나님께 많이 감사했던 것 같아요.

다른 곳에서도 얘기했지만, 예전엔 사랑에 관해서 얘기하는 게 되게 부끄럽다고 생각했어요. 세련되지 않은 것 같고. 오히려 어떤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 거기에 집중해야 진짜 예술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근데 지금 돌이켜서 생각하면 어떤 말을 해야 하는 게 정해져 있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됐고, 요즘에는 진짜 사랑을 잘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어요. 습작 초기에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을 너무 손쉽게 얘기하기 싫어서 그런 생각을 못 했던 것 같아요. 근데 지금은 그 가치에 관해 이야기해도 괜찮다는 생각도 들고, 더 잘 말하기 위해서 실력을 갈고닦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말하고 싶은 게 예전보다 선명해진 것 같아요.


방금 답변에 대해서 두 가지 질문을 하고 싶어요. 첫째로 사실 사랑이란 게 굉장히 보편적인 주제잖아요. 그걸 김연덕스럽게 쓰는 법이 있나요?

방법은 생각 못 해봤지만, 제가 쓰고 싶은 마음은 진짜 사랑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랑하려고 애쓰는 마음이에요. 진짜 어려운 상황이나, 내 사랑이 되돌아오지 않더라도 그 사랑을 지속하려고 노력하는 마음에 관해 쓰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작품 내에서도 사랑이 좌절되는 배경이나 상황이 계속 제시되는 것 같아요.


두 번째로 ‘더 잘 말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는데, 시를 잘 쓴다는 건 어떤 건가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완벽하게 일치되는 작품은 못 쓴다고 생각해요. 근데 그 오차범위를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노력이 보이는 시가 잘 쓴 시인 것 같아요. 이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되게 많은 말들이 있는데, 그런 말들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어떤 장면이나 기분을 전달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느껴져서 말들을 새로 만들려고 해요. 그런 게 단순히 언어 파괴나 언어를 난해하게 쓰는 거로 해결되지는 않고, 내가 느끼는 답답함이 이 언어가 어떻게 배열되어 있기 때문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이 구절을 무너뜨리고 새로 배열해서 내가 얘기하고 싶었던 무언가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는가를 고민한 시가 잘 쓴 시인 것 같아요. 그래서 시간도 많이 필요하고 말들에 민감해야 해요.


혹시 ‘시로 사랑과 소망을 전하는 것’보다 좀 더 구체적인 목표가 있을까요? 예를 들면 작년에는 등단이었다면.

시집을 내고 싶어요. 출판사와 시집 모양에 대해 구체적으로 상상해뒀어요. 왜인인지는 모르겠는데 저는 민음사의 시집 디자인이랑 제가 쓰고 싶은 거랑 잘 어울린다고 느껴요. 주로 시집은 출판사에 투고하면 채택해서 시집을 출간하는 시스템이어서, 열심히 써서 원고를 45~50편 정도 모으면 출판사에 보낼 예정이에요. 아직은 시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열심히 쓰고 모으고 있어요.


“말들을 뛰어넘으며 말들을 거느리는 시를 쓰고 싶다.”는 일기 속 문장이 기억에 남아요. 그 의미를 물어봐도 될까요?

저도 어떤 설명을 해야 할지 어려운데, 내가 최선을 다해서 잘 말하려고 노력을 하다 보면 그냥 어느 순간 그 말들이 가진 개개의 의미보단 내가 쓰려고 했던 어떤 느낌이 붕 떠올라서 진공상태 같은 그런 멍한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시가 얘기하려고 하는 바에 가까이 가기 위한 노력이 완벽하게 보이는 그런 시를 딱 읽었을 때 드는 느낌은 ‘이 부분 표현이 진짜 좋다’ 보단 읽고 났을 때 할 말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그 안에서 말들을 뛰어넘어서 말들을 거느리는 상태가 되는 것 같아요.


지금 매달 이메일 연재를 하고 계시잖아요. 소감이 궁금해요.

진짜 재밌어요. 그 사진가분이랑 저랑 모르는 사이였는데, 제가 올해 1월에 그분 사진이 좋아서 사진 촬영 받고 싶다 연락을 드렸어요. 그렇게 프로필 사진을 찍게 되었는데, 제가 사진을 받아보고 너무 좋아서 사진 촬영했던 소감을 일기로 적어서 그분께 보여드렸어요. 근데 그 일기를 좋게 기억하고 계셔서 그로부터 몇 달 지나고 ‘앨리바바와 30인의 친구친구’를 함께하자고 제안해주셨어요. 매달 한 20일쯤 사진 작가님이 사진을 보내주시면 그걸 보고 떠오르는 거로, 아니면 그 사진이랑 제 글이 나란히 놓였을 때 뭔가 만들어지는 느낌이 이런 거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쓰고 있어요. 저도 매달 어떤 사진을 보내주실까 기다리는 재미가 있고 그분도 어떤 형태의 시로 답장이 올까 기대하시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메일 연재다 보니까 아무래도 문예지에 실리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제 걸 읽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걸 생각하면 되게 신기해요. 어디론가 내 시가 전해져서 읽히고 있구나. 그런 감각이 되게 소중한 것 같아요.


미술을 잘 그리시기도 하고,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셨다고 들었어요. 미술과 시의 관계성은 어떻게 되나요?

이미지를 다룬다는 점이 정말 비슷해요. 조형예술과 분들이 저희 수업을 많이 들어오시는데 통하는 게 많고 시도 잘 읽으시고 말씀도 잘하세요. 왜 그럴까 생각을 해봤더니 이미지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는 사람들이라서 통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시라는 게 언어랑 가까워 보이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쓰는 언어랑 다른 언어로 쓰려고 노력하는 분야잖아요. 미술도 무언가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려고 색조를 쓰고 형태도 만들고요. 그런 거에 대한 고민이 맞닿아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서사창작과에서는 시 수업만 배우진 않잖아요. 다른 장르를 배우는 것이 시에 도움이 되나요?

지난 학기에도 소설 수업만 들었지만 많은 걸 배웠어요. 선생님들께서 문학 전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세요. 지난 학기에 인상적인 말을 들었는데, 강영숙 선생님께서 글을 쓸 때 중요한 건 소설을 쓰든 시를 쓰든 그 장르에 자기 자신을 던져야 한다고, 나 따로 글쓰기 따로 생각하지 말고 내가 지금 이 문장을 이렇게 쓰지 않으면 내 삶이 진전되지 않을 것 같은 그렇게 느끼고 써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글쓰기는 보상받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영혼의 보상밖에 없다”는 말씀도 내가 그렇게 100% 살지 못하더라도 계속 떠올릴 수 있는 말씀들을 해주시고 그걸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한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중에 시집을 내게 되면 이 문장을 시인의 말로 하고 싶어요. 각자의 빛을 밝히며 또 비춰주며 힘내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여진 기자

eura08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