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2019년 7월 13일

예술 작품의 절대적 가치와 합의된 가치

칸 국제영화제는 왜 <기생충>을 선정했을까


지난 5월 25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제72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이 수상 기준과 과정이 흥미롭다. 칸 영화제는 집행위원회가 (소위 작품성 있는) 출품작 가운데 경쟁 부문 작품들을 먼저 고른 다음, 매년 바뀌는 심사위원들이 최종적으로 작품을 평가한다. 결국 집행위원회와 그 해 우연히 그 자리에 있는 심사위원들의 취향에 맞는 영화가 유리하다는 뜻이다. 당연히 심사위원들의 성향에 따라 수상작 또한 달라진다. 엄밀히 말해 황금종려상은 1년간 나온 영화 중 최고의 작품에 수여 하는 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은, 칸 영화제를 단지 소수의 영화가 해외 마켓에서의 성적을 담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그러나 어떤 할리우드 프로듀서들은 다르게 생각한다. 오히려 ‘이 작품은 작가주의가 강하고 어려운 영화’ 라는 편견을 강화한다고 믿을 뿐이다. 가령 이러한 이유로 봉준호 감독의 또 다른 영화 <설국열차>의 해외 판권을 소유했던 하비 와인스타인은 영화의 칸 출품을 반대하고 막아낸 적이 있다. 사람들이 <설국열차>가 ‘대중성보다는 예술성에 치우친 영화’라는 편견을 갖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회가 인정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어떤 심사 기준마저 불투명한데, 예술의 가치라는 것을 ‘합의’할 수 있을까? 아니면 예술의 가치는 절대적일까?


절대적 가치


칸 영화제 수상 기준을 회의하듯, 예술에 절대적 가치가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예술이 가진 장르적 제약에 집중한다. 예를 들어 영화라는 예술 장르는 ‘프레임’이라는 제약을 벗어날 수 없다. 랩은 ‘라임’이라는 구속 위에서 그 장르적 지위를 획득한다. 아무리 뛰어난 기타 연주라도 물질세계에 존재하는 악기, 그 한줄 한줄의 현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제약이 있기에, 역설적으로 예술의 ‘기술’이 가지는 가치가 탄생한다. 어떤 영화 연출자는 프레임 안에 다시 프레임을 만드는 이차 프레임을 활용하여 주제를 담거나, 외부적 환경과 내면을 구분한다. 이차프레임을 부여한 후 오히려 파괴함으로써 강렬한 효과를 연출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힙합에서의 라임은, 비트 음색을 정확히 해석하여 그에 맞는 적절한 랩 선율을 뽑아내기 위한 변주 기술이다. 좋은 랩은 ‘무조건’ 잘 짜인 라이밍을 담보한다. 그리고 이 기술은 연주자가 처음 악기를 기술적 차원으로 내재화할 때와 같이 무한한 연습을 필요로 한다. 이 관점에서 기술의 훌륭함은 추상적이지만 평가가 가능하다.

  
다시 말해 기술이 담보된 예술에 예술가의 독창적 해석이 가미 될 때, 좋은 창작물은 비로소 그 가치를 획득한다. 수많은 모작 작가들이나 실용 음악 학원 강사들이 원본 예술가와 같은 기술을 가지고 있는데도 기억 될 수 없는 이유는, 자기만의 ‘프레이즈’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프레이즈가 바로 해석이다. 앞서 언급한 라이밍의 예를 다시 가지고 와보자. 힙합에서의 라임은 문학에서의 그것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힙합의 라이밍은 배경음과 비트를 ‘해석’ 해낸 후 마디의 끝부분을 비슷한 단어로 채워내며 서사를 작사해내는 기술 영역에만 그치지 않는다. 어떠한 음감을 가진 단어로, 어떤 위치에 라임을 배치하며, 어떻게 혁신적인 서사를 이끌 수 있느냐는 것은 그 자체로 음악에 대한 해석과 재창조라고 할 수 있다. 


합의된 가치

  
반대로 작품의 가치 판단은 사람들이 부여한 체계에서 나온다고 믿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시대별로 변화하는 예술 작품의 호용에 주목한다. 고대 사람들이 그린 벽화를 시작으로 가장 보편적인 예술 장르라고 생각되는 미술을 예로 들어 보겠다. 먼 과거에는 그저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물체를 그대로, 똑같이 따라 그리는 것이 최고로 여겨지는 때가 있었다. 실제와 가깝게 모사하는 것이 절대 가치였기 때문에 그 판단 기준은 비교적 객관적이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무너졌다. 시대별로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또 그림을 그저 그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심상을 현실로서 구체화 시킬 수 있는 여러 재료가 발견되었다. 이처럼 과거보다 ‘미술’ 이라는 예술 장르의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점점 그 객관적 기준이 흐려졌다. 대신 그 가치는 앞선 예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시대적 요구를 어떻게 해석했느냐를 소위 평론가들과 이론가들, 그리고 시장이 부여하는 체계가 자의적으로- 혹은 ‘인위적으로’ 부여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예를 들어 마르셸 뒤샹의 변기는 어떤 예술 작품의 가치 판단이 사회적 합의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극단을 보여준다. 그저 어디 굴러다니는 변기 하나를 가져와 이것이 예술 작품임을 명명했을 뿐인데, 뒤샹의 작가적 유명세와 그것을 ‘처음’ 시도했다는 가치를 인정받아 현대 미술사의 한 획을 그었다. 한 점 낙찰가가 몇백억 원을 호가하는 잭슨 폴록의 그림들 또한 그것을 창조해내기 위한 작가의 아이디어가 들어갔을지는 몰라도, 페인트 통을 매달아 중력에 의한 진동으로 그려낸, 인간의 물리적 에너지가 거의 들어가지 않은 작품이다. 심지어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를 완벽하게 모사할 수 있는 인공 지능 로봇까지 나온 세대다. 세상이 이러한 작품들에 찬사를 보내는 것을 마주할 때, 우리는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그 주체는 과연 누구/무엇인가’ 에 대한 자연스러운 의문이 든다. 

  
그 작품이 후대의 조류에 어떤 위치에 존재하느냐는 문제는 그 순간에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지극히 우연적 요소를 가진다. 



정세미 기자
semsempuri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