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2019년 6월 17일

아이스에이지(Iceage) 내한

애호를 옹호하며

▲피스트레인 6월 9일 아이스에이지 공연 현장 ⓒ최미리 기자

올해 2회차를 맞은 ‘피스트레인’은 철원에서 열리는 록 페스티벌로, 내게는 다른 무엇보다 덴마크의 펑크 밴드 ‘아이스에이지(Iceage)’ 방한을 성사시킨 행사로 기억될 것이다. 물론 존 케일(John Cale)도 왔지만, 보지 못했다. 아이스에이지 공연 중 펜스를 붙잡은 채 머리를 흔들고 있었는데 몇 번 더 흔들면 실신할 것 같아 허둥지둥 뛰쳐나왔기 때문이다. 상관없다. 아이스에이지가 1집 수록곡까지 공연할 때 나 역시 외쳤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오 행진하는 교회여, 오 행진하는 교회여”(<White Rune>, 2011).

 
마땅한 관심으로 국내에 소개된 적 없기 때문인지, 지난 6월 7일 동아일보는 “자기파괴를 노래하는 ‘가장 위험한 밴드’ 덴마크 그룹 아이스에이지”라며 다소 낯간지럽게 그들을 소개했다. 그런데 이 제목은 모욕이다. 아이스에이지만큼 2010년대를 살아보고자 애쓰는 동시대 대중예술가는 드물다.


“네 모럴은 어딨느냐?” – <Morals>(2013)

“우리 같은 도둑들, [이것을] 자명한 것으로 가정해야 한다” – <Theives Like Us>(2018)


나의 청소년기에 데뷔한 밴드들은 마치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존재들인 것처럼 노래하곤 했다. 물론 그렇지 않았기에 그들의 라이브 영상을 꼼꼼히 찾아보지는 않았다. 반면 수년 전 『데이즈드』(Dazed)지의 필자를 비롯한 다수의 매체가 증언한 것처럼 “내가 이렇게 말하는 걸 그들이 안다면 기염을 토하겠지만, 네 명의 덴마크인이 모인 아이스에이지는 펑크에 일어난 가장, 영원히 섹시한 일이다”.

 
70·80년대에 작성된 근사한 록 비평문을 읽다 보면 느껴지는 바, 당시 펑크와 포스트펑크(Post-Punk)란 예술의 개별적인 장르이기 이전에 태도, 강령, 도덕, 윤리 등을 포괄하는 ‘모럴(Moral)’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반면 오늘날 포스트펑크란 첫째로 예술이다. 제도화된 예술은 아니지만 다분히 고상한 예술이다. 평가의 중점은 전적으로 모종의 가치, 가령 아름다움을 따른다.

 
아이스에이지는 물론 ‘자기파괴’에 대해 노래한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난 세기에 펑크와 펑크의 하위 장르가 수행한 ‘자기파괴’의 방법에서 미학적/기술적 가능성을 추출하여 정교화하고 확장한 바이다. 혹자는 여느 포스트펑크 밴드들도 그렇지 않냐고 되물을 수 있다. 아니다. 2010년대의 포스트펑크 밴드들은 종종 80년대를 계승해야 할 전통으로 간주하며 그 시절의 냉소적 감상주의에 무임승차한다. 그러나 아이스에이지의 정규 데뷔 앨범 <새로운 여단(旅團)>(New Brigade, 2011)은 예외다.

 
<새로운 여단>은 오직 그 자신과 자신의 덴마크인 친구들을 위해 펑크-이후의 2010년대라는 시공을 마련한다. 국내 팬들이 아이스에이지의 초기작에 ‘높은 진입 장벽’을 느끼는 이유는 여기에서 비롯한다. 당시 아이스에이지에게 ‘좋은 노래’란, 아직 명료하게 제시되지 못한 펑크(와 70·80년대 포스트펑크)의 기술적 가능성을 열어두는 노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여단>의 진면모는 노래의 완성도가 우선시되는 레코드보다 멤버 개개인의 기술이 직관적으로 와닿는 라이브 영상에 담긴다. 유튜브에 “PICK OF THE DAY ICEAGE – Vice Magazine Deutshland.mp4”를 검색해보라.

▲Vice Magazine Deutshland ⓒYouTube

 그런데 오직 레코드만 놓고 판단하면 <새로운 여단> 수록곡 가운데 몇몇은 동세대 밴드의 노래와 완전히 차별화되지는 않았다. 가령 1집 수록곡인 <너는 축복받았다>(You’re Blessed, 2011)와 ‘Japanther’의 <음 네 미소가 나를 완전히 지배하듯>(Um Like Your Smile is Totally Ruling Me, 2009) 같은 곡 사이에는 약간의 유사성이 보인다. 70년대 미국의 ‘하드코어’와 80년대 영국의 ‘뉴웨이브’에서 피를 물려받은, ‘1990년대스러운 사운드’에 대한 지향이 엿보인다는 말이다.

 
한편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는 라이브 영상 뿐 아니라 펑크 앨범으로써도 독자적인 위상을 차지한다. 2000년대 말렵 덴마크의 언더그라운드 펑크씬 “덴마크식으로 엿을 먹이는 새로운 방법(New Way of Danish Fuckyou)”을 떠올리지 않아도 누구든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의 <엑스터시>(Ecstasy, 2013)를 만끽할 수 있다. 멤버 전원이 (녹음실 안에서) 할 일을 완벽하게 해냈기 때문이다. 일례로 아이스에이지의 프론트맨 엘리야스(Elias Bender Rønnenfelt)는 더 이상 기타를 매지 않는다. 그가 할 일은 따로 있다. <노래의 왕>(King of Song, 2015)이 되는 것이다.

 
엘리야스는 자신의 친한 친구들인 로케(Loke Rahbek) 그리고 루카스(Lukas Højlund)와 함께 노이즈/일러스트리얼 작업(‘Vår’)을 이어갔다. 또한 일본의 ‘골든 가이(Golden Gai)’라는 술집에서 우연히 포르투갈의 언더그라운드 아티스트 데이비드 마라냐(David Maranha)의 앨범 <남극>(Antarctica, 2010)을 듣고는 재즈를 둘러싼 서구 대중음악사 전반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확보했다. 그 후 아이스에이지의 기타리스트인 요한(Johan Suurballe Wieth) 그리고 청소년 시절의 ‘형제’들과 함께 유닛 밴드 ‘마칭 처치(Marching Church)’를 꾸렸다.

▲‘마칭 처치(Marching Church)’ ⓒSacred Bones Records

 그런 가운데 유수의 인디음악 저널들은 아이스에이지의 3집과 4집을 이야기하며 둘의 차이에 주목했다. 하나는 어둡고 다른 하나는 밝다는 둥. 하지만 두 앨범 사이에는 차이점만큼 두드러지는 공통점이 있다. 요컨대 3집 수록곡 <영원히>(Forever)에 나오는 선언 없이는 아이스에이지의 4집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타자(the other)에게로 침잠할 수 있다면, 그것이 마치 바다인 것처럼 (…) 나는 나 자신을 영원히 잃을 것”.

 
이 선언은 20세기라는 <깨진 시간들>(Broken Hours, 2018)의 바다에 잠수하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이를테면 아이스에이지는 질리도록 ‘닉 케이브(Nick Cave)’, ‘와이어(Wire)’, ‘조이 디비전(Joy Division)’ 같은 80년대의 유명인사들과 비교받곤 한다. 이에 관해 그들은 5년전 『DIY』와의 인터뷰에서 다음처럼 밝혔다. “뭘 하려는 건지 알겠지만, 약간 찬물 끼얹는 일이다. 그들 외에도 수백가지의 레퍼런스가 있다”.

 
지난해 아이스에이지가 <비욘드리스>(Beyondless, 2018)에서 제안한 (닉 케이브나 조이 디비전이 아닌) 수백가지의 레퍼런스, 깨진 시간들은 포획되기를 기다린다. 동시에 “그 음악이 죽는 날(The Day the Music Dies, 2018)”을 요청한다. 그 음악은 언제 죽으며, 어떤 음악인가? 취향과 애호의 감정, 그리고 자신의 이유에 따라 ‘어떤 음악’을 가리킬 수 있을 때, 죽어야 할 음악은 죽었을 것이다. 여기서 취향이란 유튜브 알고리즘이 강제하는 취향의 웜홀도, 아저씨들이 맨날 지껄여대는 몇몇 밴드의 리스트도 아니다. 『더 콰이어터스』(The Quietus)와의 인터뷰에서 엘리야스가 평가하듯이 “핑크 플로이드와 지미 헨드릭스 (…) 그리고 비틀즈 같은 게 (…) 정말 역겹다”면, “그건 역대 가장 덜 섹시한 음악”이라고 단정짓고 아름다운 걸 찾으면 그만이다.

  
영미권의 보수적 모더니스트는 새로운 형식이 나타나지 않는 대중문화의 미래에 절망한다. 오늘날 맥락없이 과거를 짜집기하는 한국의 대중문화는 지루하다. 그리고 이로 인해 전방위적 ‘무기력’과 ‘자기파괴’가 나타난다. 다만 이처럼 뭉뚱그려진 과거가 유발하는 ‘무기력’과 ‘자기파괴’의 가장 단순한 해결책은, 과거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더욱 명료하고 개별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취향’과 ‘애호’에 관해 엘리야스는 『셀프-타이틀드』(self-titledmag)와의 인터뷰에서 다음처럼 말했다. “이 음악과 미학이 죽은 공간이 아니라는 (…) 새로운 것이 발견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그 믿음만이 오늘날의 대중예술가, 비평가 그리고 문화소비자에게 엄습하는 무기력과 자기파괴에 맞설 수 있는 대책이다.

 
지난해 엘리야스는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e_ronnenfelt)에 게시글 하나를 올린 적 있다. 게시글에는 2016년 작고한 가수 레너드 코헨의 묘지 앞에 멀뚱히 서 있는 엘리야스 자신의 사진과 코헨의 노래 <바람둥이의 죽음>(Death of a Ladies’ Man, 1977)의 가사가 담겼다. 이 사진 속 공동묘지는 괴담을 유발하는 밤의 묘지가 아니다. 사진 속에 담긴 한낮의 공동묘지는 고정적인 지시 대상을 갖는 이름 그리고 출생과 사망 연도가 새겨진 비석들의 콜렉티브다. 그곳에서 ‘누가 죽었다’라며 절망하는 일에는 시체를 알아보는 보편적인 능력만이 요구된다. 그러나 시체를 앞두고 아름다운 송가를 부르는 일에는 죽은 존재에 대한, 오직 그 존재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애호가 요구된다. 사람, 대중문화, 록, 펑크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펑크와 ‘로큰롤’이 죽었는가? 그런데 그게 무엇인가? 아이스에이지의 성실한 연구 결과를 들어보라.



김태원 기자
lemonadegogo9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