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2019년 5월 29일

Take Me For a Little While
<아사코>(2018)

격렬하게(激しく) 살고 죽기

철학자 장 뤽 낭시의 책 『나를 만지지 마라』는 예수 부활 첫날을 언급하며 시작한다. 막달라 마리아가 정원지기에게 예수의 몸을 어디다 두었는지 묻자, 정원지기는 “마리아야”라고 말한다. 마리아는 그가 예수임을 알아보고 몸을 잡으려 한다. 이에 예수는 “나를 만지지 마라”고 명한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이 장면을 뒤집었을 때 보이는 것이 지난 3월에 개봉한 영화 <아사코>다. 다만 <아사코>와 『나를 만지지 마라』의 요지는 일치한다. 책의 36쪽에서 인용하면, “부활은 삶으로의 복귀가 아니다. 그것은 죽음의 품 안에서의 영광이다”.


이상한 댄스変なダンス


<아사코>의 이야기는 다음처럼 간추릴 수 있다. 아사코는 바쿠와 사랑에 빠진다. 바쿠는 사라진다. 아사코는 바쿠와 똑같은 몸을 지닌 료헤이와 만난다. 아사코는 바쿠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의 이름은 료헤이다. 이제 <아사코>를 보자. 한 여자는 한 남자의 등을 보고, 그를 좇는다.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묻고, 급작스럽게 키스한다. <아사코>의 첫 장면은 아사코와 바쿠가 이렇게 만났다고 주장한다.

아사코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상황 ⓒ(주) 올댓시네마 플러스
아사코와 바쿠가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는 상황 ⓒ(주) 올댓시네마 플러스


하지만 아사코와 바쿠가 정말 그렇게 만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사코를 연기한 배우 ‘카라타 에리카’와 바쿠를 연기한 배우 ‘히가시데 마사히로’도 모른다. 위 두 사진은 각각 아사코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상황과 아사코와 바쿠가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는 상황이다. 아이들이 폭죽 터뜨리기를 준비하던 시점에 아사코는 다리 밑으로 내려간다. 그런 다음 아사코는 사진 전시회에 들르는데, 그곳에서 바쿠의 등과 마주한다. 아사코는 바쿠의 등을 좇아 다시 다리 위로 올라온다.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다. 그런데 아사코가 바쿠와 함께 다리에 올라오자, 그제서야 아이들의 폭죽이 터진다. 폭죽은 단 몇초만에 터지는데 말이다.

 
이야기 속 두 인물과 영화 속 아이들 사이에는 충돌이 발생한다. 이야기 속 두 인물이 거기서 정당화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두 인물이 속해있는 세계가 명확하게 이야기의 세계도 영화의 세계도 아니라고 단정 짓는 것뿐이다. 요컨대 <아사코>의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는 위 장면을 편집하며 어떤 불편함을 느꼈다고 ‘카이에 뒤 시네마’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딱 음악을 넣어보자마자, 저는 슬로우모션을 삽입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어요”. <아사코>의 첫 장면은, 아사코와 바쿠의 첫 만남은 이야기도 영화도 아니라 (콧)노래에 근간한다. 정확히 말해, 바쿠의 콧노래와 이를 들어본 적 있는 아사코의 존재에 기초한다. 아사코가, 또한 바쿠가 거기 존재한다면, 오로지 바쿠가 항상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기억되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따름이다.

 
그 노래가 있으면, 이어지는 장면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아사코는 오토바이 사고에도 다치지 않는다. 헬멧을 벗고, 길바닥에 뒹굴거리면서 키스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오토바이 사고 직전에 아사코는 바다를 보고 있었다. 또한 바쿠가 빵을 산다고 말해놓고 떠날 때 아사코는 바쿠를 보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카메라는 아사코의 정면을 담고 있었다. (카메라를 노려보는 아사코의 얼굴은 <아사코>의 중심적인 도상으로, 반복해서 등장한다.) 아침이 되자 바쿠는 돌아오고, 그들은 껴안는다. 마침 우리는 화면 위로 떠오르는 아사코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아사코가 말하기를, “반년 지나, 바쿠는 구두를 사러 간다고 한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우리는 <아사코>의 일본어 원제와 마주한다. <자나깨나寝ても覚めても>.


이상한 파티変なパーティー


사라진 남자의 (몸의) 부활과 마주하기 전에, 여자의 죽음과 삶에 대해 생각해보자. 죽기 전에는 삶이 주마등처럼, 영화처럼 펼쳐진다고 한다. 하지만 ‘죽기 전’이란 정확히 언제인가? 죽기 직전의 순간을 정확히 셀 수 있을까? 죽기 전의 시간은 <아사코>의 (이야기로는) 성립 불가능한 첫 장면에 자리한다. 그 시간은 보편적인 시간이 아니라 사적인 기억 속의 시간이다. 죽기 전이라는 시간의 범위를 젊은 날의 시간으로 늘어뜨린바, 이것이 <아사코>의 첫 장면이다. 따라서 아사코는 죽기 전의 시간에, 죽음 직전에 놓인 여자다. 한편 <아사코>의 첫 장면을, 그 시간을 가능하게 만든 것으로는 바쿠의 콧노래가 있다. 다시 말해, 바쿠의 콧노래는 아사코에게서 삶의 시간을 뺏어가, 아사코를 죽음 직전의 (지속의) 시간에 묶어버린다.

 
아사코는 벗어나고자 한다. 콧노래와 주마등(영화), 시간 예술과 그 조건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그 때문에 아사코는 영화의 세계에서 사진이 되고자 한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카메라를 노려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바쿠의 등과 처음으로 조우했을 적에, 또한 바쿠와의 사랑에 한창 취해있을 때도 아사코는 카메라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 경우, 아사코의 눈빛은 쇼트와 역-쇼트의 구조로, 즉 (바쿠와 아사코가 마주 보는) 이야기의 일부분으로 묶여버린다. 한 가지 예외적인 역-쇼트가 있었는데, 아사코가 바라보는 바다를 담은 쇼트였다. 그 바다를 지배하는 것은 이야기의 규칙이 아니라, 언젠가 사진-되기를 열망할, 영화의 규칙이다. <아사코>의 말미에 이 바다는 다시 등장하므로, 후술하겠다.

 
지속의 환상을 부수겠다는 말은, 사진이 되기를 열망한다는 것은, 미라가 되기를 자처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죽기 전의 타임라인으로 규정되어버린 삶을 삶으로 다시 명명하는 가장 단순한 방편은, ‘삶 직후’로서 죽음의 시간, 굳어버린 죽음의 시간을 명시하여 이를 삶의 시간과 떼어놓는 것이다. 그래서 아사코는 정지한다. 그런 다음 카메라를 쳐다본다. 굉장히 정적인, 회사 같은 곳에서. 히가시데 마사히로(바쿠 役)를 보며 아사코는 바쿠의 이름을 부른다. 그런 다음 묻는다. “바쿠?” 히가시데 마사히로는 여기서 “바쿠(貘, ばく, 악몽을 먹어치운다는 일본 전설 속 동물)”가 보이느냐고 되묻는다. 아사코는 히가시데 마사히로의 신상을 묻다가, 끝내 이름을 묻는다. 그의 이름은 마루코 료헤이다. 연극의 규칙이, 가면과 거짓말의 체계가 도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며칠 지나, 밤이 되어, 아사코는 료헤이의 얼굴을 만질 수밖에 없다. 그곳은 사진 전시실 앞이다. 료헤이는 그 손길에 당황하고, 불쾌해한다. “나를 만지지 마라. 나를 멈춰 세우지 마라. 나를 붙잡거나 내게 다가오려는 생각을 하지 마라. 왜냐하면 나는 아버지를 향해 떠나기 때문이다.” 부활한 마사히로의 아버지는 연극 규칙의 아버지다. 사진 전시실의 마감이 끝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아사코 앞에서, 굳이 거짓말을 꾸며내는 료헤이를 보라. “부탁드립니다, 저희들 정말로 이 사진을 보려고 일부러 교토에서 왔어요”.

 
곧장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흑백 사진 몇 장의 몽타주다. 아사코는, 언제나 그랬듯이,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아사코는 정지된 상태를 유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러한 얼굴이 담긴 프레임에 료헤이가 기웃거리면서 침범한다. 이야기의, 정확히는 소설의 인물로서 아사코는 이제는 연극의 인물과 부딪힌다. 그런 다음 바쿠가 아사코에게 내디딘 발걸음을, 이제는 아사코가 료헤이에게 내디딘다. 이제는 료헤이가 아사코의 발걸음을 모방할 차례다. 아사코가 달리면, 료헤이도 달린다. 그런데 머지않아 아사코는 바쿠가 모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고층 건물의 광고판에 내걸린 바쿠의 사진을 통해서. 아사코는 당연히 사진이 있는 쪽으로 떠날 수밖에 없다. 한창 체호프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남자 때문에 왁자지껄한 가운데 아사코 혼자 정지해있는 작은 파티, 그런 파티는 없는 편이 차라리 나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사코는 카메라를 부순다. <아사코>에서 스마트폰이란 문자를 주고받는 기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카메라이다. 중반부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클립 하나를 상기해보자. 그래서 바쿠는 아사코와 만나자 스마트폰을 부순다. 그래서 아사코는 달리는 바쿠의 차 안에서 손을 뻗어 스마트폰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더는 사진을 찍거나 사진에 담길 필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쿠의 차가 도착한 곳이, 그 바다였기에, 아사코는 깨닫는다. 바람으로 인해 머리카락이 흩날리기에, 그 바다에서 아사코는 정지할 수 없다. 그래서 아사코는 바쿠를 보내기로 한다. 바쿠가 “바이바이”라며 마치 요정처럼 훌훌 떠나버릴 때, 아사코는 “바이바이”가 아니라 “고마워”라고 답했다. 아사코가 깨달은 바, 작별은 작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사코는 료헤이에게 돌아간다. 영화 내내 줄창 담배를 피우던 료헤이는 이상하게도 돌아온 아사코와 함께 베란다에 갔을 때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카메라 앞에서는 흩어지는 연기가, 즉 지속이 담기기 때문이다. 아사코와 료헤이는 정지한 채 카메라를 노려보고, 뒤편에는 “더러운 강”의 소리가 들린다. 유치하게 비유하면, 청각 경험과 함께하는 사진 전시회에 도착한 것을 환영하는 양, 여기서 <아사코>는 끝난다. 죽음은 무한히 연장된다. 끝내, <아사코>는 소설의 인물로서 아사코가 (죽음으로써) 부활하는 이야기로 뒤집힌다. 영광(靈光)과 함께.



김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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