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비평
2019년 5월 7일

놀이기계에서 생산기계로

정보자본주의 시대 디지털 게임의 존재론적 변환



최근 국내외에서 가장 첨예한 게임 관련 이슈를 꼽으라고 한다면 중독 담론과 도박 담론, 폭력성 담론을 가장 맨 윗줄에 적을 수 있을 것이다. 선혈이 튀기고 선정적인 게임이 청소년들의 폭력 성향에 영향을 미친다는 논란, 게임 중독/과몰입의 사회적 문제, 확률형 아이템의 도박 문제들은 사실 전통적인 미디어 담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바보상자인 TV가 아이들의 학업을 방해한다, 연예인들의 선정적인 옷차림과 외설적인 영화장면들이 왜곡된 성의식을 조장한다, 말초적인 자극만 가득한 방송 프로그램이 인간의 미적 감각을 마비시킨다, 등등. 이는 컴퓨터가 없거나 지금처럼 흔치 않던 시기에 유년기를 보낸 세대에게는 기시감이 들 정도로 매우 익숙한 이야기들이다.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의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량/불법 비디오를 시청함으로써 비행청소년이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라는 옛 비디오의 경고문구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여기에서 TV/영화/비디오라는 주어만 제거하고 게임을 대비하면 고개를 끄덕일만한, 그럴싸한 사회적 금기의 근거들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근거들에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미디어와 정부, 기업들은 또 앞다퉈서 그럴싸한 인과관계를 만들어낸다. 위헌 논란에 휩싸인 셧다운제도와 몇 년 전 MBC에서 PC방의 두꺼비집을 내리고 게임의 폭력성 보도를 했던 촌극은 그 수많은 예제들 중 하나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 사회가 ‘게임’의 정확한 물성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더러 그에 대한 협의과정과 공통감각 자체가 부재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는 게임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존재론을 갖고 있지 못다는 말이다. ‘재현’은 게임에서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것만으로는 게임의 매체적 속성을 이야기할 수 없다. 게임은 이용자의 상호작용에 따라 재현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액체적 성격을 띄기 때문이다. ‘콘텐츠’ 또한 상업적인 맥락으로 사용되는 용어이며, 게임을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 게임은 또한 ‘예술’이 아니다. 근대적 의미의 예술이 종언을 고하고 있는 오늘날 게임은 물론 전통적인 문학이나 회화마저도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준거들이 사라지고 있다. 더군다나 게임은 문화산업의 팽창과 컴퓨터적 전환 속에서 서브컬쳐의 맹아로부터 발화했다. 한편 게임은 ‘미디어’의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미디어는 아니다. 사람들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유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본성 때문이며, 인류학자들이 정의했듯이 ‘플레이’는 그 자체가 목적이면서 아무런 가치를 만들어내지 않는 목적 지향적 활동이다. 반면 미디어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는 않는다. 인간은 미디어를 통해 세계로부터 소외된 존재의 간극을 매꾸고자 하며, 이미지·텍스트·사운드를 통해 사물과 자연, 인간의 지각을 매개한다. 장난감은 미디어가 될 수 있지만,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놀이’ 자체는 미디어가 아닌 것이다.  

 

이 모든 것이면서 모든 것이 아닌 게임은 도대체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지각하고 있으면서도 잘 이야기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게임의 ‘기계적인’ 구성 요소들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놀이/예술로부터 디지털 게임을 단절시켜야만 한다. 술래잡기나 장기는 기계가 아니며 인간 언어와 제스쳐라는 기표적 기호 체계를 갖는다. 반면 디지털 게임은 입력장치와 연산 장치, 메모리 기반의 비 기표적 기호체계로 이뤄져 있다. 최초의 기계적 게임인 <Tennis for Two>와 <Space War!> 또한 컴퓨터를 해킹해서 만들어진 발명품이다. 사람들은 이미 80, 90년대의 너드들과 개발자들이 RPG게임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고 또 그 게임을 얼마나 많이 플레이했는지 알고 있다. 초창기 퍼스널 컴퓨터 환경이 조성될 당시 <울티마> 시리즈, <마이트 앤 매직> 시리즈는 그 결과물이다. 디지털 게임은 기본적으로 보드게임을 연산화하는 작업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명>과 같은 시뮬레이션 게임의 육각형 타일은 보드 게임을 재매개한 것이며, TRPG(Table Talk Roll Playing Game)의 복잡한 데이터와 룰의 처리 작업은 필연적으로 컴퓨터 연산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우리는 <울티마> <폴아웃> <발더스게이트> 같은 게임들을 즐겼고, 인터넷이 발전한 뒤로는 수천 명이 한 공간에서 플레이하는 MMORPG 게임들을 만났다. 보드게임의 타일과 기물은 게임판이 아닌 디스플레이장치에서 구현되며, 복잡한 컴퓨터 연산이 외부 장치의 입력과 플레이의 재현을 매개한다. 디지털 게임 이전에는 게임에 참여하는 플레이어들의 대화, 손짓, 암묵지 등이 게임의 룰과 진행을 실천하는 주요 수단이었지만, 오늘날 디지털 게임에서는 코드 알고리즘으로 짜여진 작동이 이러한 인간 기호작용들을 대신한다. 정리하자면, 컴퓨터는 복잡한 수학적 연산을 기계화한 것이고 컴퓨터의 이러한 연산 기능을 놀이에서 구현한 것이 디지털 게임의 본질이다. 즉, 게임의 존재론은 ‘놀이를 수학적으로 연산하는 기계’, 즉 놀이기계임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연산이 복잡화되고 데이터 처리 능력이 커져가면서, 게임은 TV나 영화 등 올드미디어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와 관계 맺기 시작한 것이다.

 

게임은 단일한 기술적 대상이 아닌 ‘외부의 정보와 작용에 열려 있는 비결정적-준안정적 시스템’으로서, 항시 외부의 기술적 대상들과 함께 상호작용하며 ‘기술 환경’으로 진화해 왔다. 프랑스의 기술 철학자인 시몽동에 따르면, 기계는 기술적·자연적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구성요소들의 각 기능이 상호작용하며 융합, ‘구체화’하는 지향성을 통해 진보한다. 처음에는 군사용 컴퓨터와 장비들에서, TV와 비디오게임기, 퍼스널 컴퓨터와 GUI, 인터넷과 OS에 이르기까지, 게임은 영속적으로 코드 구성요소들이 구체화되는 과정의 ‘기술적 대상’이었고, 구성 요소와 정밀도는 더욱 복잡화되는 중이다. 이러한 놀이의 ‘기계화’ 라는 역사적 프로세스를 거쳐 ‘게임 플레이’는 과거의 놀이나 보드게임, 스포츠, 예술과는 전혀 다른 사회적 맥락을 가지게 되었다. 그 징후는 오늘날 매우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유투브의 게임 스트리밍이다. 과거의 게임 산업은 고도 기술집약적인 노동 분업을 통해 게임을 만들어 판매하는 전통적인 물질재 생산 양식을 띄고 있었다. 게임을 돈 주고 사서 플레이한다. 가전제품을 구매해서 사용한다. 음식을 사먹거나 옷을 사 입는다. 이것들은 물질재 사용·교환 방식이다. 그러나 물질에서 벗어난 오늘날 게임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나아간다. free-to-play 방식으로 이용자들을 모으고, 그 안에서 게임의 요소들을(아이템, 강화) 판매하거나, 게임이 아닌 게임 플레이 시간을 판매한다(MMORPG게임의 월 정액제 과금). 또는 이용자들이 게임의 소스를 개조하여 만든 모드(mod)의 판권을 사들여 서비스하거나(카운터스트라이크, DOTA 등), 게임이 아닌 게임 엔진을 판매한다(언리얼, 유니티 등). 트위치, 유투브의 수많은 게임 스트리머들은 게임을 전유하여 자신의 게임플레이를 시청자들과 광고주들에게 판매한다. 게임이 아니라 게임의 각 기술적 요소들(소스, 엔진, 아이템)과 지각적 요소들(정액제, 플레이 시간)을 가치화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기존의 스탠드얼론 게임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게임이라는 기계의 각 구성 요소들이 외부의 다른 기술환경 및 인간 요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놀이기계’라는 틀을 벗어나 ‘생산 기계’가 되어가는 과정이야말로 가장 주목해야 하는 지점일 것이다.

 

사실, 철 지난 미디어 담론을 가지고 중독과 폭력성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것 자체가 구 세대가 행사하는 지적 권력에 다름아니며, 정부·기업간 이해관계 다툼에 지나지 않는다. 더 본질적이고 거대한 변화가 몰려오고 있다. ‘플레이의 노동화’라는 이 변화를 매우 주의깊이 살펴봐야 한다. 놀이기계였던 게임은 이제 생산기계가 되어 인간 본연의 목적지향적 활동인 놀이를 쓸모있는 또는 교환가치를 지닌 ‘고된 노동’으로 변주하려고 한다. 불안정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프레카리아트(불안정한 이라는 뜻의 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 proletariat의 합성어)의 삶이 조회수 수십만에 어마어마한 수익을 얻는 게임 스트리머에 대한 환상으로 가려진다. 뽑기 확률 0.0004%의 갓챠 대박의 헛된 꿈이 그나마 얇은 지갑마저도 털어간다. 신자유주의적인 경쟁과 항구적인 실업으로부터 도망쳐 약간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 게이밍의 공간에 발을 디뎠지만, 이곳은 공장이나 사무실보다 더 악의적인 플레이 노동이라는 도전을 받고 있다.  마르크스가 산업혁명과 찬란한 제국에서 혹사공장과 노동자들을 목격했듯이, 과거 우리가 플레이하던 모든 견고한 것들이 디지털이라는 공간으로 사라져간다. 구태의연한 미디어 담론으로부터 탈피해, 기술적 대상으로서의 존재 양식인 게임에 대해서 논의하기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현우

한국예술종합학교 기초교양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