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2019년 5월 7일

허수虛數의 여자

Fate 시리즈와 마토 사쿠라: ‘사걸레’의 역사를 되짚으며


<Fatestay night [Heaven’s Feel] II. lost butterfly>
OST 앨범 커버 copy. 소니뮤직 엔터테인먼트



지난 3월 21일 개봉한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헤 븐즈필 제2장 로스트 버터플라이>(이하 <헤븐즈 필 제2장>)은 2004년 발매된 일본 비주얼 노벨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극장판 애니메이션이다. 에는 3명의 메인 히로인과 그에 따른 3가지 루트(분기)가 있다. Fate 루트, Unlimited Blade Works 루트, 그리고 Heaven’s Feel 루트(이하 HF 루트)이다. HF 루트는 2017년작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헤븐즈필 제 1장 프레시지 플라워>를 통해 최초로 영상화되었고, <헤븐즈필 제2장>은 그 속편이다.


<헤븐즈필 제2장>은 공허한 영화다. 오늘날 다뤄져야 할 당위를 상실한, 과거에 사멸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동떨어져 의미를 잃어버린 스펙터클, 각종 ‘모에 도식’을 비롯한 오타쿠적 재생산만이 눈앞에서 흘러 지나갈 뿐이다. 그런 폐허 같은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 숨 쉬는 존재가 있다. 메인 히로인인 ‘마토 사쿠라’다. 영화이론가 테레사 드 로레티스는 여성 영화를 ‘극 중의 여성 인물이 나에게 말을 거는 영화’로 정의한 바 있다. 마토 사쿠라는 이토록 폭력적인 작품 속에서 관객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녀는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그곳에 현전하고 있었다.


극 중 사쿠라가 재현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유령, 잡음, 오류, 어둠, 그림자. <헤븐즈필 제2장>에서는 시민들을 살해하는 수수께끼의 그림자가 등장한다. 이 살인귀의 정체는 사쿠라다. 사쿠라(=그림자)는 있을 수 없는, 존재해서는 안 될 오류와 같다. 주변 인물들은 그녀가 죽어야만 한다고, 혹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사쿠라는 악몽을 꾸고, 살인하고, 살해당하고, 밥을 차리고, 빨래를 개고, 자위를 하고, 섹스를 요구한다. 사람들은 그녀가 진정 왜 그러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 영화의 근본적인 뒤틀림은 그곳에서 발생한다. <헤븐즈필>은 오직 사쿠라의 서사로서만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본작의 제작자도, 등장인물도, 관객도 사쿠라를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사쿠라는 (그녀가 사용하는 마법의 속성과도 같은) 허수(虛數)의 존재가 되어버린다.



사쿠라는 갖가지 방법으로 타자화 되면서도, 여전히 내밀하고 무한한 영화적 가능성을 품고 있는 캐릭터로서 존재한다. 그녀에겐 역사가 있다. 사쿠라의 역사는 ‘비처녀’의 역사이고, ‘사걸레’의 역사이다. 그녀에겐 항상 ‘걸레’라는 수식어가 붙어왔다. 특정 사이트에서 일부 집단에게 불린 정도가 아니다. 일본 문화에 어느 정도 접근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Fate 시리즈를 본 적이 없더라도 ‘사걸레’는 알았다. 그녀가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유년 시절부터 성폭행을 당했기에, ‘처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쿠라는 세 명의 히로인들은 물론이고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인기가 없는 캐릭터였다. 그녀는 ‘처녀’도 아니면서, 주인공에게 성욕을 갖고,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고, 자기연민에 차 있다는 이유로 ‘호불호’ 갈리는 캐릭터가 되었다. 이것이 (다른 히로인을 내세운 두 루트와 달리) HF 루트만이 영상화되기까지 장장 15년이 걸린 이유다.



Fate 시리즈를 기반으로 2015년 제작된 모바일 게임 ‘Fate/Grand Order’의 총매출액은 지난 3월, 3조 4,095억 원을 돌파했다. Fate 시리즈는 각종 만화, 소설, 게임, 애니메이션 등을 배출했고, 일본 콘텐츠 시장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했다. Fate 시리즈와 그 파생 작품들의 여성혐오는 꾸준히 문제시되어왔다. 최근 이를 개선하려는 일부 팬들의 움직임도 트위터 등의 SNS를 중심으로포착되고 있으나, Fate 시리즈의 주 소비층이 여성혐오 문화를 재생산하는 대표 집단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변화는 요원해 보인다. 2019년인 지금까지도 <헤븐즈필 제2장>을 관람하던 10대 남성들이 상영 중 큰 소리로 ‘사걸레’ 발언을 했다는 증언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종종 올라온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 속에서 사쿠라가 직접 ‘나는 처녀가 아니다’라고 말하게 하는 제작자들은 얼마나 폭력적이며, ‘난 사쿠라만의 정의의 사도가 되겠어’ 따위의 대사는 얼마나 무의미하고, ‘너는 더럽지 않아, 아주 예뻐’라는 메시지에 감동하는 관객들은 얼마나 기만적인가? 거대 미디어 프랜차이즈가 된 Fate 시리즈의 역사 한편에는 사쿠라가, 그녀의 목소리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기에 극 중 사쿠라의 마지막 대사는 너무나도 다층적인 레이어 속에서 읽힌다. ‘왜 나를 둘러싼 세상은, 이렇게 나를 싫어하는 걸까?’



최미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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