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2019년 4월 15일

3월의 부고를 전하며

저항하는 파라다이스


좋은 애도문은 찾기 힘들다. 『중앙일보』에 실린「사진작가 에드워드 김의 마지막을 지키는 사진전」(2019.03.14)은 지난 3월의 부고문 가운데 거의 유일한 예외인데, 장례식장에 열린 사진전을 묘사하여 애도의 현장이 담보된 경우였기 때문이다. 애도의 현장은 어째서 중요한가?


편지와 부고


페미니즘 미술사에 익숙하다면 故 캐롤리 슈니먼(Carolee Schneemann, 1939.10.12~ 2019.03.06)과 그의 퍼포먼스 <내밀한 두루마 리(Interior Scroll)>(1975)를 기억할 것이다. 슈니먼은 자신의 책 『세잔, 그녀는 위대한 화가였다(Cézanne, She Was a Great Painter)』를 읽다가 자신의 성기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거기 쓰인 글을 읽는다. 후일 슈니먼이 밝힌바, 이 글은 미술 영화평론가 아네트 미켈슨(Annette Michelson)에게 보내는 “숨겨진 편지”였다. [1]




(Carolee Schneemann, 1967)


편지는 애도문을 쓸 때 핵심적인 참고문헌 가운데 하나다. 꼭 글로 쓰인 편지일 필요는 없다. 슈니먼과 그의 파트너 제임스 테니(James Tenney)가 섹스하는 모습을 담은 <퓨즈(Fus- es)>(1967)라는 작업을 보자. <퓨즈>에서 섹스 자체보다 눈에 띄는 것은 섹스가 이루어지는 공간과 공간 속 정물이다. 나아가 “숨겨진 편지”를 찾고자 할 때 눈에 띄는 정물 가운데 하나는 실내에서 촬영된 창문의 이미지다. 수신인이 아니라면 “숨겨진 편지”를 알아차릴 수 없듯이 슈니먼의 집에 방문한 적 없다면 <퓨즈>에서 가끔 돌출하는 창문의 이미지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파악할 수 없다.


편지는 그 내용과 무관하게, 특정한 발신자나 수신자, 다른 누구도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 보내거나 받을 경우에만 편지로 기능한다. “숨겨진 편지”를 찾는 일이란 바로 그 사람을, 지상 위에 존재했던 하나의 생명을 추적하는 일과 같다. 이때 단 하나의 생명을 가리키는 동시에 오직 수신자와 발신자만 해독할 수 있던 ‘숨겨진 편지’를 보편적인 문서로 개방시키는 것이 부고다. 장 자크 루소, 정확히 말하자면 스위스 출신 문학 비평가이자 의학자 故 장 스타로뱅스키(1920.11.17~2019.03.04)에게 문제로 제기된 장자크 루소라는 18세기 사상가를 떠올려보자.


“루소는 자기 쇄신의 시대에 근본적 진리와 망각된 순수를 투명한 원천에서 증명하겠다는 의무를 떠맡았다. 그는 한 명뿐인 장 자크 루소가 되고자 하면서 동시에 자연인이라는 보편적 모델이되고자 한다. 그는 끊임없이 ‘자아’의 감각적 충만을 느끼는 동시에 진리를 소유하고자 한다. 특이한 존재로서의 유일성과 보편 이성의 단일성을동시에 갖고자 하는 것이다.”[2]


스타로뱅스키의 저작 가운데 『장 자크 루소: 투명성과 장애물』(아카넷, 2012)과『자유의 발명 1700~1789 / 1789 이성의 상징』(문학동네, 2018)은 국내 출간되었다. 궁금하다면 번역자 이충훈 한양대 조교수가 지난해 겨울 『교수신문』에 투고한 「균형과 절충의 비평가 장 스타로뱅스키」를 먼저 읽어도 좋을 것이다. 아무튼, 4월 중순에 접어드는 지금, 국내 언론 및 저널은 슈니먼과 스타로뱅스키의 부고를 전하지 않았다. 관련 분야 전공자와 애호가의 SNS 페이지를 제외하면 죽음은커녕 삶조차 마주할 길이 없다.


쿨한 모욕과 주인 없는 권위


물론 넘쳐나는 부고 기사가 그만한 애도를 뜻하지는 않는다. 다수의 언론을 통해 故 오쿠이 엔웨조(Okwui Enwezor, 1963.10.23~2019.03.15)의 부고를 접할 수 있지만, 전부 “나이지리아 출신 첫 베네치아비엔날레 감독”과 “2008년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이라는 두 가지 번듯한 키워드로 엔웨조의 성과를 정리하는 데 그치며, 지난해 8월 엔웨조가 『슈피겔(Spiegel)』과의 인터뷰에서 언급한 “모욕”을 떠올리게 만든다.


엔웨조는 2011년부터 독일 뮌헨에 위치한 “하우스 데어 쿤스트”(Haus der Kunst)의 총괄 큐레이터로 일한 경험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하우스 데어 쿤스트의] 후임자가 독일어에 능통해야 한다던데, (…) 몇몇 사람은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는 것조차 신경 쓰지 않는데도 내게 독일어를 말할 것을 요구한다. (…) 그런데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내가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건강상의 문제가 악화되고 “자신을 더는 원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은 이후, 2018년 엔웨조는 직장을 그만둔다. 그가 할애한 7년의 보상은 “두 개의 쿨한 감사 문장”(Two cool thank-yousentences)이 전부였다. 엔웨조는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였다.[3]

타계한 예술가가 속한 장르를 이해하는 능력이 애도를 보증하는 것도 아니다. 국내 음악 비평가들이 스콧 워커(Scott Walker, 1943.01.09-2019.03.22)의 부고를 전하는 글을 서너편 정도 읽을 수 있는데, 실상 위키피디아 영문 페이지의 발췌 번역에 다름 아니다. 지난해 『미디어포스트』에 실린 「영화/시각예술 비평가 아네트미켈슨(AnnetteMichelson) 타계」가 『뉴욕타임즈』에 실린 미켈슨 부고 기사의 전문 번역에 가까웠다는 것을 돌이키면, 불성실한 애도 작업에는 필자 개개인의 게으름보다 큰 문제가 있다. 스콧 워커이든 다른 누구이든, 국내에 애도의 현장이 자리잡지 않았다는 문제다.


워커의 부고를 가장 성실하게 다룬 글 하나를 읽어보자. 『Tiny Mix Tapes』의 필자 매튜 필립스(Matthew Philips)는 ‘당신은 스콧 워커의 이런저런 이야기에 관해 듣게 될 것’이라며 「In Memoriam: Scott Walker」를 개괄한다. 이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는 애도 작업 이전에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 죽을 때 우리는 그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는데, 그의 이야기가 결국 모종의 끝을 맺었다는 이유와 죽음이 기억을 유발한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은 채 옮겨 적기만 한 애도문과 ‘죽음에 의해 기억이 떠오른’ 독자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구멍이 있을 테다.


자국의 예술가에 대한 애도문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오히려 이 경우에는 지나친 기억, 기억보다는 망령에 가까운 잡념이 문제다. 『문학과 사회 123호』에 수록된 「故 최인훈 추모 특집」이나 『문학동네』 2019 봄 통권 9호의 「추모 김윤식」 항목에 수록된 애도문을 읽어보자. 이런저런 찬사와 애정고백이 ‘대가’나 ‘선생님’ 같은 표현의 정당화에 할애되다가 갑자기 끝나버리는 글들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스콧 워커의 작업은 이런 식의 손쉬운 기념비(memorial)와 저항한다”. 어떤 예술가는 죽어서도 그런 표현을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 죽지 않을 권리


죽어서도 끝나지 않을 저항은 발화하는 죽음을 전제한다. 모든 투쟁과 결부되는 삶의 권리와 마찬가지로 죽음의 권리가 화두에 오르는 셈이다.13년간 암 투병을 이어온 영화감독 故 바바라 해머(Barbara Hammer, 1939.05.15~2019.03.16)가 자신의 마지막 강연()에서 말하듯이, “이것은 나의 삶이고, 또한 나의 죽음이어야만 한다”. 레즈비언 영화사에 관심이 있다면 우리학교 석관캠퍼스 멀티미디어실에도 비치된 해머의 <질산염 키스 (Nitrate Kisses)>(1992)와 <역사 수업(History Lessons)>(2000)을 찾아봐도 좋을 것이다.


현재 영화감독 故 아녜스 바르다(Agn s Var-da, 1928-2019)의 특별전을 개최 중인 서울아트시네마는 SNS 계정을 통해 고인의 명복을 비는 짧은 글을 게시했다. 그리고 지난 4월 2일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는 서울아트시네마의 프로그램 디렉터를 재임용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우리학교 영상원 강사 재직 시절 성추행 의혹을 받은 모 평론가가 지난해 3월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고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직을 스스로 사임한 이후, 자리는 공석으로 남아있었다(참고 기사:이주현 기자,「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복귀 논란」, 『씨네21』, 2019.04.12). “모두의 바르다, 안녕히” 같은 서울아트시네마의 문장에서 바르다는 ‘모두’의 것으로 묶여버린다. 바르다의 죽음은 오로지 바르다의 죽음이어야만 한다.



김태원 기자
lemonadegogo99@gmail.com



[1] Quinn Moreland, 「Forty Years of Car-olee Schneemann’s “Interior Scroll”」, 『HYPERALLERGIC』, 2015.08.29.
[2] 장 스타로뱅스키, 이충훈 역, 『장 자크 루소:투명성과 장애물』, 아카넷, 2012, p.160.
[3] 『e-flux』 홈페이지에서 영역본을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