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2019년 4월 15일

(주사위 굴림)

TRPG <밤의 마녀들>


함께 TRPG <밤의 마녀들>을 플레이하자고 제안하고부터, 우리가 실제로 한곳에 모여 앉아 캐릭터 시트에 무언가를 적게 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첫 세션 일정을 잡은건 TRPG라는 놀이를 소개하는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난 뒤였다. 이 사실을 왜 밝히는가?


TRPG란 플레이어들의 대화(Tabletop/Table-Talk)를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의 롤플레잉 게임(RPG)이다.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 Stranger Things> 시즌1 제1장 초반부에 아이들은 지하실에 모여 캠페인(이어지는 내용의 여러 개 세션)에 몰두하는데, TRPG가 무엇인지는 이장면을 보면 곧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스터)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어. 피에 굶주려 있지. 네 뒤에 드리운 그림자가 널 집어삼키고 말거야. (…) 데모고르곤이다!” “완전 망했어.” “윌, 어떻게 할 거야?” “불덩어리 던져.” “숫자가 13 이상 나와야 해.” “너무 위험해. 방어 주술을 걸어.” “(마스터) 데모고르곤은 멍청한 인간들의 말 싸움에 지쳤어. 너희 쪽으로 걸어간다. (…) 분노로 울부짖는다!” “불덩이다! (주사위 굴림)”

TRPG의 역사를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단 플레이를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룰북,캐릭터 시트, 주사위 등이 필요하다. 이제 각자는 캐릭터를 만들고 가지고 논다. 캐릭터는 다른 캐릭터들과 관계를 맺고 플레이어는 필요할 때마다 주사위를 굴려 “액션”을 발동시킬 것이다. 플레이어들이 모였을 때, 그중 한 명은 마스터를 맡아야 한다. 마스터란 이 RPG의 ‘세계관’을 따르되 캐릭터들 주변의 ‘세계’는 다소 재량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사람, 그럼으로써 캐릭터들을 기쁨과 슬픔, 분노, 때로는 어처구니없음으로 몰아넣을 사람, 수많은 인물과 상황 들을 만들어내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주사위를 굴리게 할사람을 말한다. 마스터가 무언가를 제시했다고해서 우리가 그것만으로 즉시 만족하거나 오도가도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뭔가 해야 하고, 대개는 운을 시험하는 기분으로 주사위를 굴려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결과를 맞닥뜨려야 한다. 주사위를 굴리는 행위는 마스터가 아닌 플레이어들에게만 허락된다. 결국 마스터의 가장 핵심적인 역할은 결국 플레이어들이 공평하게입을 열게 하는 것이다. 가장 핵심적인 질문 또한 이렇다. 「좋아요, 그래서 어떡하나요?」


이제 <밤의 마녀들>에 대해 말하자. “섹스와 죽음이 몹시 강렬하고, 멍청하고, 끔찍한 모습으로” 그려지며 무엇보다 “실존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인 <밤의 마녀들>은 2차 대전 당시 활약했던 제588야간폭격연대 “나흐트헥센”(밤의 마녀들, Nachthexen)을 소재로 한다. 소비에트의 붉은 군대 공군 중 유일하게 여자들로만 이루어진 이 연대에서, 캐릭터들은 조종사 혹은 항법사가 되어 구식 쌍엽기로 매일 밤 독일군 진지를 폭격하는 임무를 맡는다. 열악하고 위험한 환경뿐이랴. 붉은 군대의 멍청하고 집요한 성차별도 우리를 화나고 피곤하게 한다. 분명히 하자. <밤의 마녀들>은 “전쟁 속 사람에 관한 RPG”가 아니라 “전쟁 속 여성에 관한 RPG”다.


우리는 지금까지 두 번 만나 단편 ‘파시콥스카야 야상곡’과 캠페인의 첫 세션을 플레이했다. 모두 TRPG에 별로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지난 세션에 대한 마스터의 질문에 「제가 뭘 하고 있었냐고요?」라 되묻게 되는 일도 있었다. 처음 만든 캐릭터들에 애정을 느꼈기 때문에 단편에서 캠페인으로 전환할 때도 캐릭터를 거의 수정하지 않았다. 불가피하게 경로를 이탈해야 했던 ‘류바’와 항법사 다샤의 죽음을 겪은 ‘레나’, 임무 중 조종사마리아와 의견충돌이 있었던 ‘소냐’와 자나 깨나 조종에 정신이 팔려 있던 ‘카챠’. 캠페인을 시작하며 그 사건들은 싹 지워졌다. (다시금 그리고 처음으로) 소비에트 비행사가 되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여자들은 배를 타고 옌겔스 비행장으로 향한다. 선상의 그들은 ‘아직은’ 어떤 사람들일까?


하얀 셔츠에 바지를 입고 낡은 신발을 신은 류바는 온갖 잡동사니가 든 커다란 트렁크를 들고 있다. 갈색 머리에 총기가 도는 초록색 눈. 그 눈은 군복을 입은 어떤 멋진 여자에 고정되어 있다. 류바는 이제 군인이지만, 언젠가는 같은 연대의 어떤 자매와 로맨틱한 관계에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긴 코트를 입은 레나는 삼십대 초반의 침울해 보이는 여자다. 그녀는 사실 소비에트에 대해 별생각 없다. 독일어책들이 들어 있던 트렁크는 빼앗겼고, 사람들이 다 보는 데서 울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소냐는 약간 눈치를 보고 있고또 조금 움츠러들어 있지만, 동시에 군인이 되었다는 자부심도 느끼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남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냐는 좀 교활한 데가 있다. 카챠? 카챠는 그때 거기 없었다(<밤의 마녀들>은 마스터를 돌아가며 맡는 시스템인데, 그땐 내가 마스터였다).


옌겔스와 사라토프를 나누며 볼가 강이 흘러간다. 이곳의 하늘을 날며 여자들은 강과 구릉지, 초원, 농경지를 내려다볼 것이다. 매일 밤 멀리까지 나가 많은 일을 하면서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보겠지. 그리고 결국엔 다시 돌아올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을 기원하고 또 기원하기.


군대라는 것과 전시 상황을 엄밀하게 생각한다면 여자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어 보이지만, 실은 (동시에) 전적으로 우리 손에 달려 있기도 하다(TRPG니까). 전투 자체보다는 “임무와 임무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이 이야기의 대부분이기에 고증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룰북에는 적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황을 아예 조사하지 않으면 나중에 플레이를 복기하며 낭패감을 느낄 수도 있다. 적어도 이 RPG, 적어도 ‘우리’의 경우, 낭패감의 중심에 있던 건 어쩌면 수치심 비슷한 것이었다. 정말 이 모든 것을 이렇게 다뤄도 되는 걸까, 바로 그런 기분 말이다. 숲에서 “히틀러의 도적떼” 일부와 마주쳐 붉은 군대의 일원이 아닌 척해야만 했던 레나의 경우. 나는 그녀가 좀 덜 고립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충분히 말했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TRPG는 상당히 흥미로운 놀이다(그리고 <밤의 마녀들>은 아주 멋진 이야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플레이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고, 적당한 계기도 필요했다. 사실, 이 놀이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바로 플레이어들의 성실하고 규칙적인 만남이다. 스토리나 캐릭터에 부담을 느낀다면 플레이 약속은 더욱 지키기 어려워진다. TRPG를 즐거운 놀이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글쎄. 일단 플레이를 시작하고, 거기서 공평하게 입을 열어보는 수밖에 없다. 이런 결론이라 스스로도 한숨이 다 나지만, 직접 해보지 않으면 답은 알 수 없을 것이다.



김해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