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2019년 3월 5일

우리들은 그 노래를 알고 있다

스파이더맨과 포스트 말론 사이에서



“나는 유서에 뭐라고 썼더라, 라고 히로시는 생각했다. 그러고는, 바닥 모를 예지의 섬광이 히로시를 습격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어둠에 감싸였다.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SMAP(일본의 유명 아이돌)의 노래. <밤하늘 저 너머>”주1


지난겨울에 개봉한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이하 <뉴 유니버스>)는 ‘세계관(世界觀, worldview)’이라는 개념을 ‘이야기 설정’ 정도로 오도하지 않으면서도 적용할 수 있는 최초의 슈퍼히어로 영화이다. 그간 극장가에는 드러난 적 없지만 분명 존재했던 과거의 코믹스로부터 스파이더-우먼, 스파이더-돼지, 재패니메이션 속 스파이더-걸, 흑백 스파이더맨이 각자의 작화를 유지한 채 소환되는 광경을 떠올려보자.


또한 <뉴 유니버스>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만화와 영화의 복합체로 단순하게 단정 짓지 말 것을, 대신 일종의 연속체로써의 ‘만화-영화’라는 가능성을 모색하도록 이끈다. 만화와 영화 간의 장르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긴장과 충돌을 완화하기보다는 즐기면서 말이다. <닌자 무예장>(1967),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1988), <집에 가고 싶어>(1989) 등으로 이루어진 ‘만화-영화’의 실험 사례 목록에 또 하나의 성과가 부가된 셈이다.


그런데 <뉴 유니버스>와 가장 먼저 연관 짓고 싶은 영상은 위에서 언급한 ‘만화-영화’의 정전이 아니라 비교적 근래의 것,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2010)(이하 <스콧>), 정확히 말해 <스콧>의 뮤지컬 장면을 바탕으로 제작된 뮤직비디오 “Scott Pilgrim Vs. The World – Clash at Demonhead performs Black Sheep”이다. <스콧> 역시 ‘만화-영화’적인 스타일을 취하는데, 단지 그러한 방법론적인 유사성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뉴 유니버스>의 ‘뮤직비디오’를 떠오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홍보를 목적으로 유튜브에 선공개된 “Sunflower (Spider-Man: Into the Spider-Verse)” 뮤직비디오의 첫 장면에는 레코드판을 트는 손이 보인다. 반면 <뉴 유니버스>의 첫 장면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헤드셋이다. 새로운 고등학교로 전학 가는 아침, 새로운 스파이더맨 ‘마일스 모랄레스’는 헤드셋을 낀 채로 “Sunflower”를 흥얼거린다. 이때 우리는 레코드판을 트는 손과 헤드셋을 낀 채 들썩이는 몸 가운데 무엇을 <뉴 유니버스>의 오프닝으로 기억할 것인가?


잠시 오늘날의 매체 환경으로부터 거리를 두자. 우리는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나 불법적인 파일 유통을 통해 기억하고 싶은 장면을 언제든 돌이킬 수 있다. 이로 인해 더는 ‘기억’의 여지가 없거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은 뉴미디어 담론의 널리 알려진 화두 가운데 하나이다. 디지털의 세기가 시작하기 전에 죽은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오늘날의 전망에 관련지을 수 있을 상상을 남긴 바 있다.


“우리는 다음의 상황을 상상해볼 수 있을까?: 누군가 생전 처음 어떤 것을 기억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 이제 나는 ‘기억함’이 무엇인지, 기억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겠다.” – 그는 어떻게 이 느낌이 ‘기억함’이라는 것을 아는가?” (…) “그가 그것이 기억함이라는 것을 아는 이유는 그것이 과거 어떤 것에 의해 야기되었기 때문인가? 그런데 그는 과거가 무엇인지 어떻게 아는가? 결국 사람은 기억함을 통해 과거라는 개념을 배운다. 그리고 어떻게 사람은 기억함이 어떤 느낌인지를 미래에 다시 알게 될까?”주2


“기억함이 어떤 느낌인지를 미래에 다시 알게 될까?”에서 밑줄을 그어야 할 표현은 ‘다시’이다. 미래에 ‘다시’ 알게 된다는 말은 곧 ‘과거의 기억함의 느낌’과 ‘미래의 기억함의 느낌’ 사이를 구분지을 수 있음을 뜻하며, 둘을 비교할 수 있는 크거나 작은 차이를 암시한다.


레코드판과 헤드셋으로 돌아와, ‘영화의 뮤직비디오’와 영화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는 기준을 전제하자. 영화-뮤직비디오는 “그 영화는 인상적이다”라고 말할 적의 ‘인상’, 달리 말해 ‘느낌’만을 담을 수 있다. 반면, 영화에는 그냥 영화가 있다.


레코드판을 트는 손은 <뉴 유니버스>라는 영화 자체에도 등장하는 이미지이며 게다가 주인공 마일스 모랄레스의 손이 아니라 그의 삼촌의 손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기억하는 경험과 ‘영화의 뮤직비디오’ 간의 차이는 이미지의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배열과 배치, 곧 구조의 차이로 문제 되는 것은 기억의 형식이다.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비교는 또 다른, 더군다나 현실적이며 긴급한 질문을 남긴다. 영화-뮤직비디오는 뮤직비디오의 범주에 속하는가? 또한, 우리는 그 제작 주체가 ‘영화적인’ 뮤직비디오를 꿈꾸거나 우리에게 뮤직비디오가 영화와 마찬가지로 작용하는 경우를, 한 마디로 ‘뮤직비디오-영화’를 상정할 수 있거나 시청한 적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뮤직비디오’가 ‘뮤직비디오-영화’와 맺는 관계는 어떤 성격을 보이는가? 유튜브 이전에는 보편적이지 않던 질문들이다.


유튜브는 눈에 비치고 귀에 들리는 모든 것을 ‘영상’으로 취급한다. 따라서 위 질문들은 사실상 유튜브로 인해 예술의 성격 전체가 바뀐 것은 아니냐는 하나의 물음이다. 예술과 그 미학이 우리보다 먼저, 아직은 기존 매체 및 예술 분과의 분류학을 기억하는 우리보다 먼저 ‘영상’으로 바뀌지 않았느냐는 물음말이다.


단지 ‘유튜브가 예시하는 동시대성’이 있고 이것이 오늘날의 예술에 적용된 바를 탐구하자거나 예술에 적용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었는데, 작년에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레디 플레이어 원>을 떠올려보자. 1980년대의 팝 컬쳐와 오늘날까지 이르는 비디오 게임 문화로부터 각종 도상을 빌려 시각적 놀이를 선사하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눈에 띈 것은 오토모 카츠히로 원작 애니메이션 <아키라>(1988)의 도상이다. 잠깐이라도 유튜브를 끄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들이라면 <아키라>를 모를 리 없다. 한 번쯤은 봤을 터인데, 언제부터였을까?


<아키라>의 원작자 오토모 카츠히로는 일본 뉴웨이브 만화의 기수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당시 오토모와 더불어 두 명의 여성 작가가 주목받았다는 사실과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전무하다. 그 사이에 <아키라>는 ‘네트워크’로 전송되었다. 그리고 평가를 불허하는 일본 버블 경제 시대 사이버펑크 애니메이션 걸작으로, 칸예 웨스트를 비롯한 아티스트에게는 영감의 원천으로, 24시간 ‘chill mix’의 배경 화면 및 프랭크 오션 팬 메이드 뮤직비디오의 삽입 화면으로, 마침내 <레디 플레이어 원>이라는 아카이브의 소장품으로 회고되었다.


스필버그가 일본 뉴웨이브 만화사에 지극한 관심을 보이며 사베아 노마의 『라이트 블루 페이지』(ライトブルーペイジ)(1980)나 타카코 후미코의 『절대 안전 면도칼(絶対安全剃刀)』(1979)을 읽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하지만 거슬린다. 필자가 비디오 게임에 관심이 많았어도, 80년대의 포스트 펑크 음악에 조예가 깊었어도 마찬가지로 거슬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다. ‘과거’는 없다. 막간의 ‘영화적인’ 쾌락뿐인데,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저자 마크 피셔가 생각한 대로 “소소한 쾌락과 음울함은 (…)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같은 사태”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에 덧붙은 한국 영화 비평의 이런저런 고질적 수사들이 아른거린다. ‘가상현실’, ‘아카이브’, ‘오타쿠적 미덕’,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카메라 운동과 교차 편집’, ‘내러티브의 새로운 가능성’ 같은 표현들 말이다. 각 표현에 어울리는, 지난해 업로드된 조회수 100만 이상의 영상들을 차례로 나열하면 다음와 같다. “POP/STARS – Opening Ceremony Presented by Mastercard”(2018), “Ariana Grande – thank u, next”(2018), “[Teaser] 이달의 소녀 (LOONA) “X X””(2018),  “Kanye West – All Mine/Violent Crimes (Lyric Video)”(2018), “Tierra Whack – Whack World”(2018). 손안에 있는 것부터 이야기하자.



김태원 기자

lemonadegogo99@gmail.com



각주

주1: 다카하시 겐이치로,『겐지와 겐이치로』,  양윤옥 역, 웅진 지식하우스, 2007. p.50

주2: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철학적 탐구』,  이승종 역, 아카넷, 2016. pp.657-6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