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2014년 5월 27일

비스듬한 미래

이제는 봄이 지나갔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면 지난 봄, 어느 일요일, 나는 학교에서 길을 나서다 말고, 후문 근처 컨테이너 박스 옆에 뒤돌아서서 바보처럼 한 팔씩 들어 눈물을 닦고 있었다. 볕은 퍽 포근했는데, 개나리가 만개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내 뒤로 누군가 지나가는 기척이 느껴졌으나, 개의치 않고 조금 더 울었다. 인적 드문 후미진 구석에서 조용히 서 있다 보니, 근처에 인기척이 너무 잘 느껴졌다. 알고 보니 지나갔던 줄로만 알았던 바로 그 남자가, 담배를 피울 것처럼 하면서 담배를 피우지도 않고 컨테이너 박스의 반대편에서 엉거주춤하게 어정거리고 있었다. 불쑥 짜증이 났다. 이자는 왜 거기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이가 너무도 신경이 쓰인 덕분에, 나는 화가 난(무안한) 표정과 걸음으로 씩씩거리며 다시 가야만 하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버거운 봄 공기를 마시며 둔덕을 올라가면서, 문득, 미래의 어떤 시간들이 나를 비탈 반대편으로 밀어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러다 미술원 건물로 들어오는 길에서 《비스듬한 미래》(미술원 B104, 2014.5.12-5.16)의 손바닥만 한 작은 포스터를 보았다. 그리고 보자마자 이걸 꼭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포스터에는 돌로 만든 막대 풍선 같은 구조물 아래, 비스듬한 미래, 라고 차분히 적혀 있었다.
오월 중순인데도 지하에는 한기가 들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전시장 입구 오른편으로 대각선상에 있는 거대한 구조물 ‹비스듬한 미래›였다. 전시장 한 켠에 놓인 인쇄물에는, 이것이 ‘욕망이 생명을 가지고 폭발해버릴 것만 같은 상태의 구조물’이라 적혀 있었다. 돌로 된 욕망이라. 공들여 쌓아올린 이 복잡한 구조물은, 여러 갈래에 놓인 아주 작은 돌—스티로폼위에 회화적 변장술이 가미된 것—에서 시작하여 점점 몸집이 커진다. 울끈불끈한 이 ‘욕망’의 더미 위에도 뿅뿅뿅뿅 두두두 어어어어 하며 약간 아슬아슬하게 직립하는 여러 개의 작은 구조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또 서로에게 기대고 있거나, 비행청소년처럼 혼자 밖으로 삐죽이 빠져나와 있기도 했다. 우락부락한 두 개의 암석 사이에는 아슬아슬한 작은 돌을 겹붙여 만든 다리도 있었다.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랬는데. 두드려보고 흔들어보고 만져보고 싶은 심술 비슷한 마음을 참느라 조금 혼났다. 그 시간 지하 전시장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살짝, 가장 끝에 있는 가장 작은 스티로폼 돌을 하나 건드려보았다. 어디 붙어 있지도 않고 그게 그저 거기 가볍게 놓여 있었다는 걸 깨닫고는, 조금 놀랐다. 너무, 가볍고 연약했다. 그런 다음 한참을 바닥에 주저앉아 이 작업을 올려다 보았다. 선이나 도형 등의 기본요소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덕분에, 그 기우뚱하고 우글우글한 형태 속에 그루브가 있었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주황 내지는 노랑빛의 따뜻한 조명을 받고 있는 이 작업은 한편으론, 마치 강한 증식력을 가진 돌로 된 식물 같았다. 그 자체로 록키마운틴 같은 이런 무지막지한 식물이 눈앞에 있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기분이 좋았다. 후후 너는 ‘폭팔’하고 있지만, 괴물스럽게 사랑스러워. 부글부글 우우우하하하.
이 비스듬한 미래 왼편에는, 라벨지를 콜라주한 드로잉 연작들이 있고, 이 드로잉 연작들의 왼편, 그러니까 출입구에 가장 가까운 왼편 벽면에는 사진작업인 <신대륙 발견> 시리즈들이 있었다. 그리고 출입구의 오른편 벽면에는 <10개의 정상오이>가. 뭔가를 쌓아나간다는 방법론적 유사성으로 이들 작업은, <비스듬한 미래>와 같이 엮일 수 있다. 기암괴석이나 인공폭포의 암석을 연상시키는 <비스듬한 미래>는 또한, 그것과 마주한 <신대륙발견> 시리즈나 드로잉 작업과 같이, 기원과 추축에 관한 이야기를 직간접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함께 엮일 수 있을 것이다. 지면관계상 오이와 신대륙발견과 드로잉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게 간략하게나마 다른 작업들과 맺는 관계들로만 정리를 하려 한다.
대신에 <비스듬한 미래>와 <10개의 정상오이> 사이, 전시장 한쪽 구석에 있었던 <내일의 봄은 내일이다>라는 영상작업에 대한 이야기는 짧게라도 해야겠다. 어여쁜 젊은 여자인 작가가 썬캡을 쓰고, 몸매가 들어나는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청갈색 스타킹을 신고, ‘개나리처럼 만들어진’ 행사용 출입구처럼 반원형태로 된 구조물 아래에서, 꼿꼿하게 등을 세운 채 광고의 한 장면처럼 자전거 운동기구 같은 것을 타고 있다. 배경에는 한강공원 같은 곳에서 개나리가 만개해 있고, 자전거를 타고 오른쪽으로 또는 왼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 영상에는 시종일관, 핑거스냅과 껌 씹는 소리로 이루어진 1/4 정박(첫 박에 강세가 있다)이 깔리지만, 어느 것도 이 박자에 들어맞는 것은 없다. 작품초반에는 이 여자의 어깨에서 골반 뼈 사이의 몸의 움직임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데, 그 움직임이 내겐 마치 경련 같아 보였다. 자전거 타는 여자가 입고 있는 원피스의 색이 노이로제를 연상시키는 짙은 샛노랑이라기보다는 유치원 아이들이 입곤 하는 희망을 품은 노랑에 가까웠지만, 느린 속도로 늘여진 그 흔들거리며 뒤틀리는 움직임을 보니, 갑자기 이상하게 불안했다. 별수 없이 세월호 생각도 나고. 근래에 평정을 되찾기 위해 잠들기 전 잠깐씩 읽었던 ‘행복’ 운운하는 자기계발서는 어쩌면 다 거짓인지도 몰랐다. 자전거를 탄다는 단서는 중간부터 주어지므로, 처음부터 단서 없이 갑자기 나타난 그 장면은 이상하리만치 나를 사로잡았다. 사람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으려는 듯이 보이는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불완전함, 그것만이 바로 정상인 상태이며 두려움을 동반한 상태가 가장 평화롭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작년에 임정수 작가(=작업을 하는 사람)가 전시준비를 하며 풍경을 그린 회화를 어디에 걸 것인지를 동료와 진지하게 논의하는 걸 지나가며 흘끔흘끔 본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이 단단하고 야무져 보였다. 그래서 작가가 아무리 ‘두려움을 동반한 상태’를 평화롭다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나는 진지하게 작업을 하고자 하는 그이가 앞으로도 계속 작업을 하였으면 하는, 기울지 않는 믿음 비슷한 바람을 품어본다.

(최이나)